녹두가 베어지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없는 걸까? 오늘 내 녹두가 베어졌다. 그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글을 쓰기도 싫어 전말만 간략히 전한다.
오늘 오전 호두와 녹두거리로 산책을 나갔다. 그저께 오랜만에 단비가 내려 녹두들이 신이 났을 듯해서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계 소음이 요란하다. 다급히 다가가 보니 아저씨 한 분이 예초기를 돌리고 있고, 연세 드신 할머니 예닐곱 분이 낫으로 제초하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내가 걱정했던 대로 칡넝쿨이 도로 쪽으로 뻗어 나온 녹두거리 남쪽이다. 곁에서 지켜보니 이 분들은 칡넝쿨 뿐 아니라 내 녹두까지도 거침없이 베고 있었다. 한창 예쁘게 자라고 있고 어떤 것은 벌써 꽃을 피웠는데 그런 것들이 여지없이 잘리는 것을 보니 내 가슴이 에이는 듯 했다. 그렇다고 내가 다가가 “이건 녹두거든요. 그냥 놔두면 안 될까요?”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마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녹두거리에서 아래쪽으로 한참 걸어 내려 가다가 길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혼자 속으로 ‘칡넝쿨만 베어내면 될 것을 왜 내 녹두까지 다 자르나.’ 하며 속상해 했다. 담배를 다 피운 후 걱정이 되어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녹두거리로 올라갔다. 멋도 모르는 호두는 여기저기 냄새 맡고 영역 표시 하느라고 혼자 신이 났다. 녹두거리에 다시 도착하니 예상대로 할머니들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연신 내 녹두를 베어내고 있었다. 아, 내 녹두거리가 오늘로 끝이로구나!
바로 그때였다. 한 젊은이가 할머니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더니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할머니들이 녹두 베는 것을 멈추더니 모두 그 옆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도 공원관리소 직원인 듯한 그 젊은이가 할머니들께 ‘여기 개천가 사면은 칡넝쿨을 베어내는 것으로 됐고, 이제는 우리가 심고 가꾸는 잔디밭의 잡초를 매라’고 새롭게 지시한 모양이었다. 아,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그 위쪽으로는 녹두가 무사하게 되었다. 총 녹두거리의 1/4 정도가 잘렸고, 3/4 쯤은 살아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래도 3/4이나 남았잖아. 얼마나 다행인가’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으나, 그래도 내 마음은 여전히 잘려나간 1/4 쪽에 가 있다. 밑동부터 잘린 내 녹두들이 눈에 계속 밟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다시 가 보니 나머지 3/4도 녹두가 다 베어졌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
(2016. 8.30)
(경남대 김원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