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딘은 미국 침례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로 미국 해외선교회의 단비치 브레들리와 함께 배를 타고 1834년에 미국을 출발하여 8개월간의 항해를 했다. 이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이들은 평생의 동역자가 되는데 그들의 기인한 인연을 역사속의 한 페이지에서 꺼내어 본다.
윌리암 딘 목사 부부는 침례교가 파송한 선교사였고, 목사이자 의료선교사였던 단 비치 브레들리 부부는 초교파 선교단체인 미국 해외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였다. 이들은 비록 교파는 달랐지만 태국에서 평생 동역자로 지근 거리에서 함께하는 동역자가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일어난 일로 인하여 평생 떼어놓을 수 없는 동역자가 되기에 충분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윌리암 딘 목사 부부와 단 비치 브레들리 목사 부부는 결혼한 직후 싱가폴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태국 선교를 위해 싱가폴을 거처 중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딘 부인은 몸이 허약하여 배를 타고 오는 내내 구토와 설사로 앓아 누워야 했다. 임신한 딘 부인은 배를 타고 오는 7-8개월 동안 거의 기진 맥진하여 거의 몸을 가누기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역시 갓 결혼하여 임신한 브레들리 부인은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병약한 딘 부인을 간호하느라 자신 역시 기진 맥진 하였다. 7-8개월의 항해 끝에 싱가폴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만삭의 몸이 되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을때 의사인 단 비치 브레들리는 수술을 하여 아기를 낳게 되었으나 배에서 오랫동안 시달린 딘 부인은 끝내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딘의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선교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아내는 싱가폴에 시신을 묻어야 했다. 같이 동행하며 수술하여 아기를 출산을 도왔던 브레들리가 딘의 아내였던 마틸다의 모든 장례절차를 주관해야 했다.
한편 산달이 찬 브레들리 부인 역시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딘 부인을 간호하느라 심신이 지처 아기를 출산하였을 때 그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 부부는 자신의 첫번째 아이를 잃은 아픔을 슬퍼할 틈도 없었다. 브레들리 부인은 딘 부인의 아기를 맡아 양육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미를 잃고 울고 있는 동역자인 윌리암 딘 선교사의 첫번째 아이를 돌봐야 했다. 아기가 크기까지 거의 2년간 자신의 모유를 먹이며 아이를 양육하여야 했다.
두 사람은 이후 태국에서 지근 거리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며 좋은 동역자로 친구로 사역하였다. 브레들리는 내내 태국에서 사역하였지만 윌리암 딘은 태국과 중국(홍콩을 포함하여)을 오가며 사역하였다. 비록 그들은 같은 선교부는 아니었지만 좋은 동역자로 태국 선교의 선구자로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들에게 두번째의 기이한 운명이 찾아온 것은 태국에서 사역한지 10년이 되던 해인 1845년 8월이었다. 브레들리의 첫번째 아내인 에밀리 로이스가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명의 어린 자녀들을 남겨놓은 채 소천한 것이었다. 윌리암 딘 자신도 이미 두번의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는터라 누구보다도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윌리암 딘은 딸의 양육자이며 마음을 나누는 동역자인 에밀리 로이스 브레들리의 모든 장례식을 주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