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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 세번째 선교사로 온 데이비드 아빌(David Abeel,1831.7-32.1, 1832.5-32.11)
데이비드 아빌은 미국 선교의 초창기에 미국의 개혁교회에서 중국으로 파송한 선구적인 선교사로 태국에 세번째로 온 선교사였다. 그는 처음에는 선원선교회 소속이었다가 나중에 미국 해외선교회(ABCFM)로 소속을 바꾸게 된다.
데이비드 아빌은 1804년 6월 12일에 뉴저지주의 뉴 브룬스윅에서 테어났다. 그의 부모는 암스테르담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다. 그는 15세가 되었을 때 서부의 육군사관학교에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육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그는 부득불 자신의 요청을 거둬들여야만 했다.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미국의 군인으로 사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은 헌신을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공부하는 동안에 그는 의료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는 깊은 종교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빛을 찾기 위하여 지루하고도 잠 못이루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리빙스턴 박사와의 적절한 만남을 통해 그 빛을 발견하였고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인생의 최고의 질문인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어떻게 그를 가장 잘 섬길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는 1823년에 뉴욕의 뉴 브룬스윅에 있는 신학교에서 3년동안 공부를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선교 사역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가 신학생으로 있는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고 글로 표현하였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그분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1825년 9월 15일에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자백하였다. 그것은 나의 눈알을 빼는 것이나 손목을 자르는 것과 같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나의 직분에 맞는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1826년 4월 20일에 그는 목사로 임직을 받게 되었고 뉴욕에 있는 아덴 지역의 개혁교회에서 목회자로 수년간을 사역하였다. 그는 그 지역을 믿기 이전의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문제가 매우 많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용감하게 사역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자신들의 교회가 없어서 근처에 있는 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곳에서 2년 반을 사역하면서 성령의 도우심과 주님의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구령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강한 프레임을 깨부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후 그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핸리 마틴의 전기와 같은 선교사들의 전기를 읽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그로하여금 선교사가 되도록 결정하는 궁극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앞에는 두가지의 어려움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그의 몸이 그리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유일한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교사로 나갈 때 그의 부모로부터 승낙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그때 길이 예비되었는데 마침 선원선교회에서 중국의 광동성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미국의 선원선교회(Seamen’s Friend Missionary Society)에서는 그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항해하는 기간 동안 그의 건강이 회복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를 소망하면서 그는 1829년 10월 14일에 미국을 떠나 중국의 광동성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인 1830년 2월 25일이었다.
그는 즉시 선원들 가운데서 신실하게 사역을 시작하였다. 선원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거의 1년 정도 일하였을 무렵 그는 중국어를 배워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중국어를 배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자 미국 해외선교회로 선교 단체를 옮겼다. 하지만 당시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중국인 교사가 그에게 중국어를 가르칠 때 그는 대문을 잠겨야 했다. 중국 공안들이 집으로 찾아와 외국인이 무엇을 하는지 조사를 할때면 그의 중국어 선생은 책을 신발을 만드는 통에 책을 숨겨야 했다. 만일 그가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공안들에게 발각된다면 그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빌 또한 중국에서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해외선교회는 그에게 주변의 섬들을 방문할 것과 인도네시아의 자바와 보르네오 태국 등을 여행하도록 권면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화란선교회는 이런 섬들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항해를 하는 동안 그는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였으며 선원들이나 중국인들과 종교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열정적인 선교사인 웰터 H. 메드허스트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1817년에 인도네시아의 말라카로 파송을 받았고 나중에는 바타비아로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다. 그는 또한 여러 지역을 방문한 수많은 경험이 있는 선교사였다. 그는 아빌로 하여금 선교사역에 참여하면서 중국어를 배우도록 도와주었다.
데이비드 아빌은 1831년 6월에 싱가폴에서 처음으로 태국에 왔던 제이콥 톰린을 만나 태국에 가서 귀츨라프와 함께 사역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이 태국에 도착한 것은 귀츨라프가 떠나고 난 후였다. 그는 톰린과 함께 태국에서 귀츨라프가 남겨두고 간 서적과 의약품을 배포하면서 7개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자 1832년 1월에 싱가폴로 나왔다. 그곳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난후 다시 태국에 들어온 것은 1832년 5월이었다. 이번에는 태국 정부가 외국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제한하였고 나눠주는 중국어 전도지도 무슨 내용인지 알고자하여 태국어로 번역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등의 선교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싱가폴로 나온 것은 1832년 11월이었다. 그는 싱가폴에 머무르면서 다시 태국으로의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며 기다렸지만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여 부득불 이듬해인 1833년에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런데 항해 기간 동안에 건강이 속히 회복되어 영국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그를 진찰한 의사는 겨울 동안에는 미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가지 선교사 회의에 참석하면서 선교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것은 1834년 7월 25일이었다. 그는 동양에서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그는 여성 선교사들은 가족들에 대한 의무 때문에 자신들이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기독교인 여성들에게 동양에 있는 여성 선교사들과 여성들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결국 여성선교사회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빌의 후계자로 엘리후 도티가 그의 아내와 함께 지목되었다. 중국과 동양의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의 개혁교회로부터 공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1837년에는 스코틀란드에서 여성선교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개혁교회는 최초의 여성 선교사회를 조직하는 영예를 갖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미국의 남부 지역으로 갔다. 그의 건강 때문에 그는 남부에서 겨울을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곳에 가든지 선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대학교와 신학교를 방문하면서 보냈다. 그가 미국의 남부지역으로 돌아왔을 때 선교에 대한 깊은 영향력을 끼치면서 그는 화란 개혁교단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에서도 베툰 박사의 어머니 집에서 최초로 여성선교사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 자리에는 미국 해외선교회의 총무인 앤더슨 박사도 참석하였는데 그는 그들이 따로 선교 단체를 만들기보다는 자신들의 선교단체인 미국 해외선교회와 합할 것을 권면하였다. 이에 베툰 여사는 그에게“뭐라구요! 미국 해외선교회는 여성들이 그들 앞서 일하는 것이 두려운가보죠?”앤더슨의 제안에 따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는 여성들이 원하는대로 하자는 것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앤더슨의 의견을 존중하여 당분간은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그때 눈물을 글썽이던 아빌이“자비와 성경의 제안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라며 그들에게 여성선교사회를 조직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비록 여성 선교회가 당시에는 조직이 되지 않았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1861년에 뉴욕에서 도레무스(Mrs. Doremus) 여사의 지도하에 연합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여성선교사회가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질병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야 했다. 1836년 10월에는 중국으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런 질병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서부 인디아로 보내졌다. 성토마스 지역에 머무는 동안 한 의사가 그를 체크하였는데 심장의 기질적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폐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질병이었다. 그의 제안을 물리치고 살든지 죽든지 그가 좋아하는 사역을 방해받지 않고 주를 위하여 노력을 계속하였다. 즉 중국으로 들아가게 되었을 때는 그의 좋지 않은 건강은 거의 파괴된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그리핀 박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들은 동아시아의 영적 필요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나눈 후에 그리핀 박사는 예언적으로 말했다.“아들아, 너의 일은 중국에서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지역에서 너로하여금 더 많은 것을 이루기를 원하신단다.”고 말했다. 그와 시간을 보낸 후 교회와 대학교와 신학교를 방문하여 선교에 대하여 설교할 수 있는 체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838년 10월 17일에는 중국으로 항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자 1839년 2월2일에 광동성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편전쟁이 영국과 중국간에 발발하여 그로 하여금 이번에 도 중국에서 사역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광동을 떠나 마카오로 옮겨가야만 했다. 따라서 본부는 그에게 보르네오에 있는 화란의 개혁교회 선교부들을 방문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이번의 아편 전쟁은 중국으로 하여금 선교부에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진 것처럼 분리의 중국의 벽도 무너졌다. 마침내 중국이 복음을 받아드릴 시간이 되었다.
그는 4억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에 매우 뜰떠 있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서 1842년에 아모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중국인들 가운데 장기 거주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아모이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콜롱소 섬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영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그제서야 중국인들 가운데서 그의 실제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드리아의 사도 바울처럼 그는 그곳에서 12년간 있으면서 어느 곳이 입구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중국 해안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모이 지역에 성공적인 개혁 선교부의 토대를 놓기 시작하였다.
아빌은 사역의 초기에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중국의 고위직 관원들의 사회적 방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중국은 복음에 문을 열었다. 일반 백성들의 복음에 대한 관심도 증가되었다. 수년 동안을 이 지역에서 살아온 후에 데이비드 아빌은 중국에 적응하고 거주하게 되었다. 영어로된 개혁 교회의 공문서를 받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런 자유와 수용성은 매우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는 1843년에는 중국 내륙에로의 여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중국의 내륙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대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서적들을 배포하였고 많은 현지인들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하였다.
1844년 6월에 그는 그의 동료 선교사들과 그의 계승자들인 도티(Doty)와 폴만(Pohlman)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그들은 즉시 오지 않았다. 두달 후에 아빌은 건강이 악화되어 그의 직위에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콩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아모이에서 가까운 쿼모이 섬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강력한 소망이 일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기후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는 중국어로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의 건강의 악화와 폐에 염증으로 말미암아 그는 사역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것은 이방인들에게 그의 사역을 마감해야만 하는 아픈 사람에게 그것은 매우 적절한 주제였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으니 1845년 4월 3일의 일이었다. 추운 겨울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조지아주로 갔다. 그리고 여름철에 다시 돌아왔다. 마침내 1846년 9월 4일, 뉴욕의 알바니에서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 그가 죽기 12일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놀랍도다! 나는 일반적으로 쉽게 죽은 문제가 있는 질병을 갖고 있음에도 나는 그분의 자비함으로 아직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치고 힘든 날들과 고통스런 저녁을 통하여 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히브리서 5장의 후반부처럼 믿음의 확신을 갖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나는 그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죽음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오! 정복자여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하소서!”
그의 삶은 핸리 마틴처럼 하나의 좋은 예증이었다. 육체가 매우 약한 사람들이라도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는 어느 해외선교부라도 아빌 박사와 같이 병든 사람을 누구라도 보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실제로 그는 비범하고도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견고하고도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의 능력을 향상시켜주고 빛나게 한 것은 그의 천재적인 영성이었다. 미국 해외선교회의 총무였던 앤더슨 목사이자 박사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형제, 데이비드 아빌은 바울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사랑받는 요한을 더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화해하고 영혼을 얻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지역 선교에 좋은 선구자였다. 그가 최초로 시작했었던 중국의 아모이 지역의 선교는 매우 귀감이 될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우리는 그 지역의 호의적인 중국인들에게 특별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