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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4 - 비타츠왕 사후에 천황 자리를 둘러싼 암투와 스이코 여왕!
제 30대 비타쓰왕(천황)은 572년에 즉위 후에 조정의 최고 대신으로 20세에 불과한
백제계인 귀족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 를 등용했으며..... 720년에 씌어진
‘일본서기’ 에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나라(奈良)에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
곧, 백제대정궁을 지었다” ( 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 ‘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경)란 일본 고대 왕조사 (王朝史) 에 기술된 비다쓰왕
행적에는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 을 야마토 (大和)
의 도읍에 마련했다” 라고 적었는데 나라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 ‘구다라오이
(百濟大井)’ 에 왕궁을 지었다는 얘기라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방증합니다.
(1) 비다쓰천황(일왕) 과 아내 스이코 여왕은 이복남매?
29대 킨메이왕과 이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비다쓰천황의 첫 번째 부인은 히로히메
(廣姬)였으니 비다쓰왕은 왕 4년(575년) 1월에 히로히메를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불과 10개월 만인 그해 11월에 죽자 이듬해인 576년 3월에 18세의 이복
여동생인 가시키야히메(스이코 여왕)를 두번째 왕후로 맞이하니 근친 결혼 입니다.
왜나라 왕실에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으니 당시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은 흔한 일이라는데 720년에 씌어진 ‘일본서기’ 는 스이코여왕
이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음을 말하고 있으니 즉 “용모가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여성이었다 (姿色端麗, 進止軌制)”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다쓰 천황(일왕)과 가시키야히메(스이코 여왕)는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 것인데, 킨메이왕
은 6명의 왕비를 거느렸으며 슬하에 25명이나 되는 왕자와 공주를 두었으니 황후인 석희(石姬,
이시히메)가 낳은 왕자가 비다쓰 천황이며 두번째 왕비 견염원(堅홸媛, 기타시히메)이 낳은 남매가
요메이왕과 스이코 여왕으로 스이코 여왕의 공주 때 이름은 취옥희 (炊玉姬, 가시키야히메) 였습니다.
비다쓰 천황은 병환으로 585년에 서거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비다쓰왕의 이복 동생인
요메이(用明, 585~587년 재위)천황(일왕)이었으니 그는 왕후 스이코 여왕의
친오빠 였는데 하지만 요메이 천황(일왕)은 병에 시달렸고 불과 2년간 왕위에
있다가 세상을 등지니 뒤를 계승한 사람은 스슌왕(崇峻, 588~592년 재위) 이었습니다.
스슌은 요메이천황(일왕)의 이복동생이니 스이코여왕 과는 이복 남매간이며
비다쓰왕과도 이복형제간으로 그 스슌천황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스이코
여왕이니 따라서 이복 남매 4명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한 것인데 4명의
남매 왕을 둔 친아버지는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 천황(일왕) 입니다.
(2) 왕후를 넘봤다는 누명을 쓴 이복오라비
비다쓰천황(일왕) 은 가시키야히메 왕후(훗날 스이코여왕) 이외에도 여러 왕비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가시키야히메 황후가 2남 5녀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으니
이렇듯 둘의 금실이 좋았으나 비다쓰천황은 서기 585년에 48세로 죽으니
그때 황후의 나이 32세로 과부는 남편과 사별한후 거센 풍우에 휘말리게 됩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인데 일단 시신을 모시는 빈궁
(殯宮, 모가리노미야) 이 마련됐으며 왕릉을 마련하고 매장을 하기 전까지 그 당시
본국 백제에서는 3년간 빈궁에 시신을 가매장하는 풍속이 있었으니 이것이 ‘백제의
대빈 (百濟の 大殯, 구다라노 오오모가리)’ 이라고 일컫는 3년 국장(國葬) 이었습니다.
비다쓰왕의 시신은 나라현(奈良縣北葛城郡) 코료쵸(廣陵町) 의 히로세(廣瀨) 땅에 마련한 빈궁
에 가매장됐는데 가시키야히메 왕후는 히로세의 빈궁에서 승하한 비다쓰천황의 명복을
빌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고 조정 신하들도 빈궁에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조상
했는데 왕실 쪽에서 볼멘소리를 하는 왕자가 한 명 있었으니 아나호베(穴穗部) 왕자 였습니다.
“어째서 죽은 왕의 빈소에만 모여들고 살아 있는 왕인 나에게는 얼씬도 안 하느냐?” 혈수부왕자, 즉
아나호베는 스스로가 왕위 계승권자라고 말하면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울분을
터뜨렸던 것이니 아나호베왕자는 킨메이천황의 세번째 왕비 오아네키미(小姉君) 사이에 태어난
왕자였으니 가시키야히메 왕후의 이복오라비였는데 그는 행동이 난폭하고 경솔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무렵 아나호베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년) 대련(大連, 조정
제2위의 벼슬) 와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었으니 즉 모노노베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 계승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 당시 조정의 최고 권력자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년) 대신으로 두 대신은 원수지간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교(佛敎)를 놓고 대립하고 있었으니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백제 불교의 숭불파였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배불파였으니... 날이 갈수록 궁 안팎은 시끄러웠고 먹구름이
낀 폭풍 전야와도 같았는데 가시키야히메 왕후는 사태가 험악해지는 기미를 이미 알아
차린 듯 빈궁에서 죽은 남편의 명복만 빌 따름이었으니 그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심각한 대립을 저지시킬 만한 묘수가 달리 없었으며 선왕(先王)
의 상중에 누구도 함부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황후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일본서기’는 “여름 5월에 아나호베 왕자는 가시키야히메
황후가 있는 빈궁에 강제로 들어가려고 하자 비다쓰천황(일왕)의 총신 미와노 키미사카후
(三輪君逆) 가 경비병들을 불러 아나호베 왕자의 빈궁 침입을 막았으니 쫃겨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왕궁 안팎으로는 “왕위를 노리던 아나호베왕자가 선왕의 비를 폭행하려고 빈궁에
난입을 꾀했다” 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으니 발끈한 아나호베왕자는 제 앞을 가로막은
미와노 키미사카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고는 배불파(排佛派)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에게 살해를 명령하자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거처를 기습해 죽입니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라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니 다른 면에서 보면 누명을 쓴 것
으로 볼수도 있겠는데 이후 왕궁을 둘러싸고 거센 폭풍이 일기 시작하니 아나호베왕자
는 모노노베노 모리야대련과 모의해 왕권을 쥐기로 작정했으니...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자신의 본거지 아도(阿都, 오사카의 야오시) 에서 반란군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4) 왕위를 계승한 요메이왕은 가시키야히메 왕후의 친오빠
결국 왕위를 계승한 것은 아나호베 왕자가 아닌 요메이왕(用明 천황) 이었으니 가시키야히메
왕후의 친오빠가 남편 비다쓰왕(천황) 의 뒤를 이은 것인데..... 요메이를 옹립한
것은 최고대신이자 숭불파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가시키야히메 왕후가 협의한 결과였습니다.
백제 불교의 철저한 옹호자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백제 성왕이 준 금동석가상을
자기 집에 모신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으며 또 소가노 우마코는 가시키야히메
황후의 외삼촌으로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누나인 견염원(堅홸媛, 기타시히메)
은 킨메이왕의 두번째 왕비로 가시키야히메 왕후와 요메이 천황(일왕)의 모친입니다.
이때 등극하자마자 병상에 누은 요메이왕의 어린 아들인 마구간왕자(성덕태자, 574~622년)는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병구완에 힘썼는데 마구간이라는 명칭은 그의 어머니(간인공주)
가 마굿간 앞에 이르렀을 때 낳았다고 지어진 이름으로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마구간
왕자는 어린 몸에도 밤을 지새우며 부왕이 쾌유하기를 부처님에게 기원하고 분향 했습니다.
병상의 요메이천황(일왕)은 조정 신하들을 머리맡으로 불렀으니 천황은 이때 조신들에게 “짐은
삼보(三寶, 佛·法·僧)에 귀의하려 하오. 경들은 의논하도록 하시오” 라고 하며 숭불(崇佛)
할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니 신하들은 뚜렷하게 두 패로 갈라서게 되었는데 즉
최고대신 소가노 우마코의 숭불파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배불파로 확실하게 갈라섭니다.
(5) 숭불파와 배불파의 대립
두 파는 왕의 병상 앞에서 언쟁을 벌이고 말았으니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대부(大夫) 벼슬의
나카토미노 카쓰미(中臣勝海) 대부와 함께 숭불파의 거두 소가노 우마코 대신에게 대들었으니
“어찌하여 국신(國神, 왜나라의 신)에게 등을 돌리고 이신(異神, 남의 신)을 믿는다는 것이오?
도대체 모를 일이오!” 이들 배불파는 병석의 요메이천황 마저 거역하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전하께서 조칙을 내리신 대로 불교를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계책은
용납하지 못하겠소.”이때 왕의 병상이 있는 침전으로 풍국법사(豊國法師, 도요쿠니노 호후시)
가 안내를 받아 들어왔으니 풍국 법사란 한국법사라는 뜻으로 ‘풍국’이라는 말은 고대의 한국을
보배나라(寶國)인 재보국(財寶國)으로 부른 데서 생긴 표현입니다(中田祝夫, ‘靈異記’ 講談社 1995).
요메이천황(일왕)은 병상에서 풍국법사를 맞이해 불교에 귀의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준비를 했으니.... 13세의 소년 마구간 왕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손을 덥석 잡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으니“삼보의 묘리(妙理)
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설(異說)을 허망되이 생각하면서 사견(邪見)을 함부로 좇고 있습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마구간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것을 듣자 “전하의 성덕을 입어서
삼보는 이제 크게 일어나 번창할 것입니다”라고 위로했는데 이때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에게 급히 다가가 귀엣말을 전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시사카베(押坂部)의 관리인 그는
허둥대면서 말했는데 “어서 피하세요! 지금 궁궐 밖에서는 군사들이 퇴로를 막기 시작했어요.”
이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배불파 일당의 반역 모의를 알아차리고 이들을 체포할 구실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파는 급히 궁궐을 빠져나갔으며 삼보에 귀의한 요메이천황
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했으니 서기 587년 4월의 일이었는데 요메이천황이 세상을 떠나니
아도 땅에서 반란군을 모으던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아나호베왕자가 등극이나 한 듯 기뻐합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재빨리 손을 썼으니 그는 조카딸인 가시키야히메 황후에게 달려가 의논하자
가시키야히메 황후는 명했으니 “경들은 군사들을 보내 아나호베왕자와 야카베(宅部)왕자를 주살
(誅殺)토록 하시오! ”선왕의 상중에 감히 황후를 폭행하려고 난동을 피운 아나호베왕자를 내버려
둘수 없으며 야카베왕자는 아나호베왕자의 친동생으로 반란 모의에 깊숙이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황후의 명을 받은 니후테(丹經手) 등 신하들은 아나호베왕자의 궁을 기습했으니
군사 하나가 궁의 누상에 올라가서 활로 아나호베왕자의 어깨를 쏘아 쓰러뜨렸고
날렵하게 담장을 뛰어내린 또 다른 군사는 도망치던 아나호베왕자를 일거에 창으로
찔러 죽였으니 6월 7일 밤이었고..... 이튿날인 6월 8일에는 야카베왕자가 독살됐습니다.
(6)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전투 정미의 난
요메이 오오키미 사후, 소가노 우마코와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각각 요메이 천황의 배다른 형제들인
하츠세베(泊瀨部) 황자와 아나호베(穴穗部) 황자를 지지하였으니... 소가씨가 밀던 하츠세베는
요메이 오오키미 처럼 어머니가 소가노 이나메의 딸이었기 때문에 소가씨의 피가 흐르는 황자니
소가노 우마코는 하츠세베를 왕으로 올리기 위해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587년 6월 소가노 우마코는 먼저 비다츠 오오키미의 황후이자 요메이 오오키미의 여동생
으로 소가씨 어머니를 둔 야키야히메(炊屋姫)를 찾아가 명을 내려달라 했고,
명이 떨어지자마자 6월 7일 니후테(丹經手) 등 신하들은 아나호베가 있는 궁을
포위하고 기습해 아나호베왕자를 죽였으며 동생 야카베왕자는 다음날인 8일 독살됩니다.
반역의 무리와 결탁한 두 왕자를 제거한 가시키야히메 왕후는 이제 나약한 과부가 아니었으니
남편 비다쓰천황의 시신을 안치한 빈궁에 칩거하고 있고, 친오빠 요메이천황이 또 다른
빈궁에 안치되는 험난한 시기에도 그허둥대지 않았으니 반역의 무리가 아도 땅에 진을
치고 한창 군세를 확장시키고 있는 상황이라 나라가 안정되는 날을 차분하게 기다립니다.
587년 7월, 소가노 우마코는 야키야히메와 논의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처분하라는
명을 받아냈으니 야키야히메는 하쓰세베(泊瀨部) 왕자와 우마야도 왕자(厩戸皇子
훗날 쇼토쿠 태자) 를 비롯한 황족과 소가씨를 지지하던 호족 세력들을
연합한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군' 을 구성해 소가노 우마코를 지원해 줍니다.
소가노 우마코의 군대가 모리야의 본거지 가와치쿠니(河内国; 오사카 동부)에 다다랐을때 모노노베씨
의 군대와 강변에서 교전을 벌이는데 그러나 모노노베씨는 당시 조정에서 군사와 관련된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소가노 우마코의 군대보다 병력이 강했고, 더군다나 수비하는 입장이었기에
유리했으니 특히 이들의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공격은 소가씨의 군대에 엄청난 공포심을 줍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도 나무 위에 올라가 화살을 쏘면서 싸움에 가담하자 오합지졸이 되고만 소가씨
의 군대는 퇴각하였는데 병사들이 화살 세례에 불안해 하자 13살로 마굿간 오아자로도 불리는
우마야도 황자는 직접 나무를 깎아 사천왕 불상을 만들어 공을 들이면서 승전을 기원했다고
하며 이에 병사들도 다시 힘입어 싸울 의지를 갖게 되었고 소가노 우마코는 다시 군대를 진군킵니다.
마구간왕자는 붉나무(옻나무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만들어 맹세했으니 “이제 만약 우리가 적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호세(護世) 사천왕을 위하여 절과 탑을 세우겠나이다.”총사령관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도 “모든 천왕(天王)·대신왕(大神王)께서 우리를 도와 지켜주신다면 해서 이로운 것을
이루게 된다면 실로 모든 천왕과 대신왕을 위하여 절과 탑을 세우며 삼보를 받들겠나이다.”(‘부상략기’)
모노노베 군은 동일한 수비 전술을 펼쳤고 모리야도 나무 위에 올라가 화살 세례에 가담했는데...
소가노 우마코 군의 토미노 이치이(迹見赤檮)가 나무에 있던 모노노베노 모리야에게 화살을
명중켜 죽이니 수장이 죽자 모노노베 군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가씨 군대는 여세를 몰아
승리한후 587년 7월까지 모노노베씨 일족을 모조리 죽이니 모노노베씨는 완전히 멸망해버립니다.
8월에는 승하한 요메이왕 후계자로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가시키 야히메 황후가 상의해서 하쓰세베
왕자를 왕위에 올리니 스슌왕(崇峻 , 587~592년 재위) 이 등극했는데 스슌천황이 된 하쓰세베
왕자는 소가노 우마코와 가시키야히메가 제거한 아나호베 왕자와 야카베 왕자의 친동생으로
반역자들의 동생을 옹립한 것은 살해당한 아나호베 왕자의 생모를 위안하려는 뜻으로 봅니다.
즉 죽은 두 왕자의 생모인 오아네키미(小姉君) 왕비는 아나호베 왕자가 반역에 가담했다가 살해
당한 것을 매우 비통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오아네키미 왕비 그녀는 실은
가시키야히메 황후의 이모였으니 즉 오아네키미 왕비는 기타시히메왕비(가시키야히메 황후
의 생모)의 친여동생이었으니 킨메이천황(일왕)은 두 자매를 나란히 왕후로 삼았던 것입니다.
(7) 소가노 우마코 스슌천황(일왕)을 옹립하고 또 살해하다
587년 6월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전투인 정미의 난에서 승리한 소가노 우마코의
계획에 따라 하츠세베 황자가 대왕직을 맡게 되었으니 그가 스슌 오오키미
(崇峻大王; 숭준천황) 인데 방해꾼이 없어진 소가노 우마코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마음껏 불교를 장려하고 권력을 펼치니 이제 소가씨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스슌왕이 등극한후 왜 나라 왕실은 백제 불교의 재건에 활기를 띠게 되는데 이제 배불파가
완전하게 제거되었으므로 백제 불교가 나라의 아스카 땅으로 대거 진출해 오게 된 것이니
스슌천황 원년인 서기 587년에 7당 가람인 호코지(法興寺 법흥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라 최초의 대가람 건설을 위해서 이 해에 백제의 사신과 승려와 사원 건축가들
이 대거 아스카 땅으로 건너왔으니 그 사실은 ‘일본서기’ 와 ‘부상략기’ 등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이 해(587년) 에 백제국의 사신을 비롯
해서 승려 혜총(惠總)·영근(令斤)·혜식(惠 ) 등이 왔으며 부처님 사리도 보내주었다.
백제국의 은솔(恩率) 벼슬의 수신(首信)· 덕솔(德率) 개문(蓋文)· 나솔(那率) 복부미신(複富味身)
등 사신과 부처님 사리, 승려 영조율사(聆照律師)· 영위(令威)· 혜중(惠衆)· 혜숙(惠宿)·
도엄(道嚴)· 영개(令開) 등과 사찰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문가고자(文賈古子),
금노반박사(金盧盤博士)인 장덕(將德)벼슬의 백미순(白味淳)·기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
(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능귀문( 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화공(畵工)인 백가(白加)를 보냈다.”
호코지(법흥사) 7당가람의 건설은 8년걸려 596년 11월에 준공을 보는데 왜나라에 건너왔던 사신
은솔 수신은 백제로 귀국하는 길에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불법을 전수시켜 달라고 간청한
젠신 등 3명의 비구니를 데리고 백제로 건너갔으니 2년이 지난 589년 3월에 젠신 등이 백제
에서 수계(受戒)하고 왜나라 아스카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서기 592년 11월3일 이었습니다.
호코지 건설 공사가 5년째 계속되고 있던 시기에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으니 소가노 우마코는
스스로 옹립했던 스슌천황을 부하를 시켜 암살한 것인데.... 사건의 발단은 그해 10월 4일에
있었으니 신하가 스슌천황에게 사냥해 온 멧돼지를 바치자 스슌천황은 멧돼지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했으니 “언제쯤에야 이 멧돼지 목을 자르듯이 과인이 미워하는 자의 목을 칠 것이런가.”(‘일본서기’)
스슌천황(일왕)이 미워하는 자란 다름아닌 소가노 우마코 대신으로 저도 모르게 실언을
하고 말았는데 한번 쏟은 물은 다시 물통에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이 말이
즉각 소가노 우마코 대신 귀에 들어갔고 그리하여 11월3일에 스슌천황은 살해당하고
말았으며 드디어 스슌왕의 이복 여동생인 가시키야히메 왕후가 왜국 왕위를 계승합니다.
스이코여왕이 도유라궁(豊浦宮)에서 등극한 것은 서기 592년 12월 8일로 그의 나이 39세 때
인데 이듬해 593년 1월 15일에 스이코여왕은 공사중인 아스카(飛鳥)의 호코지에서 목탑
(木塔)인 찰주(刹柱)를 세우는 법요를 거행해 찰주의 기초 속에 부처님 사리함을 모셨는데...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은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도열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부상략기’ 는 밝히고 있지만 그러나 ‘일본서기’ 에는 이 대목이 빠져 있습니다.
538 서기 476년 서울의 한성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멸망당할때 구원군
을 요청하러 일본에 온 목리만치의 후손 을 후일 왜국에서는 소가씨 蘇我
(소아만치) 라고 하는데, 그 후손은 소아만치 - 소아한자 - 소아고려....
소아도목 - 소아마자(우마코) - 소아하이(에미시) - 소아입록(이루카) 에 이릅니다.
불교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모노노베(物部)씨와 투쟁하던 소아도목은 긴메이천황
에게 두딸 견염원과 소시군을 시집보내고 30대 비타쓰와 요메이 천황(일왕)
에게도 딸을 출가 시키며 그아들 소아마자도 딸을 스슌천황(일왕)에게 출가
시키는등 외척으로 왜국 조정을 장악하고 천황을 제마음대로 폐위하고 죽입니다.
그러나 너무 커져버린 소가노 우마코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스슌 오오키미(천황)는 그를 제거할 계획
을 세우게 되었지만 계획은 금방 탄로나 버렸고 결국 소가노 우마코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하니
소가노 우마코는 본인을 도와줬던 가시키야히메를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추고천황) 으로 올립니다.
일본에서는 왕을 "오오키미" 로 부르다가 논란은 있지만 이때 33대 스이코여왕 부터 '천황'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보는데 다른 견해로는 40대 덴무가 처음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추고천황) 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봉하던 우마야도 황자를 황태자
(쇼토쿠 성덕태자)로 세우니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적극적인 불교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제 왕자 혜(恵) 가 성왕의 사망을 알리기 위해 야마토를 방문했을때, 소가노 이나메가 '불교만 믿고
국신을 경시한 것이 왕의 죽음을 자초했다' 라고전했다니 소가씨도 불교와 함께 신토신앙도 지켰을
것으로 보이는데... 숭불논쟁은 불교의 수용 · 거부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불교를 국가 종교로
할 것인지' 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는 설과 본질은 두 가문의 조정내 세력 싸움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8) 비다츠왕의 왕비 스이코여왕으로 등극하다
비다츠오아과 이복 남매로 근친결혼을 해 2남 5녀를 둔 가시키야왕후는 서기 592년
에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했으니 33대 스이코 여왕(推古·592~628 재위)
으로 36년간 아버지 킨메이왕이 포교한 백제 불교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웠으니 일본 역사에서 ‘아스카 문화 시대’(592~ 645)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 ‘부상략기(扶桑略記)’ 에 다음 내용이 있습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柱礎中.”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됐으니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직후 593년
1월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이‘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
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는 내용입니다.
‘만조백관이 ‘백제복’ 을 입었다’는 것은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 왕들이 백제계
왕가임을 말해줍니다만...... 그러나 당시 행사에 관해서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백제복을 입었다’ 는 ‘부상략기’ 의 대목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서기 720년에 왜 왕실 역사책 ‘일본서기’ 에도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와 불교문화를 꽃피웠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으니 스이코여왕은 백제의 관륵(觀勒)스님을 모셔다가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백제의 음악가 미마지(味摩之)를 모셔다가 일본 땅에 처음으로 한반도의 아악(雅樂)을 이식
했으며 고구려의 담징(曇徵)스님을 모셔다가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 등 미술문화를 일으켰습니다.
(9) 쇼토쿠(聖德)태자의 율령국가
쇼토쿠(聖德)태자는 31대 요메이왕(천황)의 아들로 어머니는 백제계인 대호족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조카인데 삼촌인 스슌왕(천황)이
암살당한 후에 어머니가 33대 스이코여왕(천황)으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었습니다.
쇼토쿠(聖德)태자는 12계급의 관위(복식)에 이어 604년에는 17조의 헌법을 제정하여 율령국가
체재를 확립하였는데,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 해뜨는 나라의 천황이 해지는 나라의
황제에게 소식을 전하노니 그간 무양하신가?” 라고 적어서 수양제를 대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고구려와 전쟁에 전력을 다하던 수나라로서는 왜국의 사신을 물리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는 외에, 오오사카의 시텐노지(사천왕사), 나라의 호류지(법륭사
고구려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렸으며 현존하는 세게 최고(最古_의 목조 건물이다)를 세웠습니다.
(10) 본존 아스카 대불
폐허가 되었다가 재건된 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인 아스카
대불이 본존으로 안치되어있어 여전히 주요 유적지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605년 아스카 시대에 천황과 쇼토쿠 태자, 일본의 권신이었던 소가노 우마코 및 각
왕자들이 588년 발원하여 596년에 창건되었으니 사찰 건립에 백제 장인 등이
기여했다고 하는데 609년에 구라쓰쿠리노도리에 의해 만들어진 해당 불상은
높이 3m로, 당시 이를 주조하는 데 동 15톤과 황금 30kg가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의 대화재로 불상의 전신이 불에 타버렸다. 지금의 불상은 후에 보수
된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스카 시대의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1956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창건 당시의 절은 탑을 중심으로 동서쪽과 북쪽에 각각 금당을
배치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 사원이었다. 바깥쪽으로는 회랑이 둘러싸여 있으며
강당도 있는 장대한 가람이었다고 하나, 옛 가람은 887년과 1196년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무로마치 시대 이후로 절은 폐허 상태였다가 1632년과 1826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610년 백제와 고구려에서 담징등 승려와 와박사를 초빙해 오사카 사천왕사와 나라 법륭사(호류지)
등을 창건합니다. 이때 백제에서 온 3명의 도목수 중에서 금광씨는 쇼토쿠태자의 명에 의해
사천왕사의 관리를 맡게되어 후손들이 대를 이어 1,400년간 수리보존을 책임져 왔는데 근세
에 들어“금강조” 회사로 발전했고 사천왕사 경내에도 가문의 묘지 및 회사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11) 백제인 혈통을 입증하는 일본 고대문서
스이코여왕(推古天皇, 592~628년 재위) 은 백제 왕족의 혈통을 이은 여왕으로 백제불교
를 바탕으로‘아스카(飛鳥) 문화’를 일으킨 주인공이며 남편 비다츠(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 왕족’ 이었다는 사실은 815년 사가 천황의 명으로 칸무천황의
제5왕자인 만다친왕(萬多親王, 788~830년) 이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에 나옵니다.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인 ‘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 에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
(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고 했는데, 일본서기에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나라의 “구다라강(百濟川 백제강) 옆에 구다라궁(百濟宮
백제궁 )과 구다라노데라(百濟寺 백제사) 라는 큰 가람을 지었고 구중탑(九重塔)도 세웠다” 고 나옵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도
있으니 즉 백제인인 죠메이 천황(일왕)이 나라의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번째로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당시까지 백제인 거주지였음을 입증해 주니
‘백제강’ 은 1868년 메이지유신 때에 다른 백제 명칭 처럼 ‘소가강(曾我川)’ 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2) 키비 연못에서 백제대사 발굴!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 옛 터전
을 발굴했으니 ‘일본서기’ 에 기록된 백제계인 죠메이천황이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입증됐으며, 1998년에는 같은 지역에서 죠메이천황이 지은 구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백제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으니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였던 것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 천황(일왕) 의 백제
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
고 밝힌 바 있습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비다쓰 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
천황이 백제왕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같은 고장입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는“서기 641년 10월에 죠메이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당시 구다라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강(曾我川) 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 이 있었다.” (‘大化改新の 眞相’ 1967)
한편 죠메이 천황(일왕)이 백제인이라는 것과 관련해‘부상략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으니,
“642년 2월에 백제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하였다.”(壬寅二月,
百濟使來朝, 弔先帝之喪). 백제 본국의 왕보다 승하한 왜 나라의 왕(죠메이천황)의 서열
이 백제왕 가계상 윗대라는 뜻이니, 이 당시의 백제왕은 의자왕(義慈王, 641~660년
재위) 이므로 죠메이 천황은 의자왕 보다 윗대의 일본 땅 백제 왕족인 것이라고 봅니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 이라고 부른다.”
(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죠메이 천황(일왕)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 으로 모셨다는 뜻이니 이것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키는데 어째서 그의 장례를‘백제의 대빈’ 으로 모셨을까? 바로 죠메이 천황이
백제계 천황이기 때문에 마땅히 모국인 백제국 왕실의 국장 절차를 따랐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일본 학자 마유즈미 히로미치씨는 일본서기 ‘조메이기(舒明紀)’ 에 대한 주해(註解) 에서 “ 여기서
말하는 빈소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을 의미한다” 고 설명했는데 ‘백제대빈(百濟大殯)’
이란 백제 왕실에서 행한 3년상(喪) 을 가리키니 백제 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
곰나루(웅진, 공주) 에서 ‘백제대빈’ 을 치렀다는 사실은 1971년 출토된 무령왕 ‘묘지명’ 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