喝
윤회의 본질
선남자여, 일체 중생들이 모두 원각을 증득하나니 선지식을 만나서 그가 지은 인지법행을 의지하면 그때 닦아 익힘에 문득 돈, 점(頓漸)이 있음이요, 만약 여래의 위없는 보리의 바른 수행의 길을 만나면 근기에 대, 소(大小)가 없이 모두 불과를 이루리라. 만약 중생들이 비록 착한 벗을 구하나 삿된 견해를 가진 이를 만나면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리니 이를 곧 외도 종성(外道種性)이라 이름하나니, 삿된 스승의 잘못이요 중생의 허물이 아니다. 이를 중생의 오성 차별(五性差別)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오직 대비의 방편으로써 모든 세간에 들어가서 깨닫지 못한 이를 개발케 하며 내지 여러 가지 형상을 나타내어 역경과 순경계에 그와 더불어 동사(同事)해서 교화하여 성불하게 하니, 다 비롯함이 없는 청정한 원력에 의함이니라.
만약 말세의 일체 중생들이 대원각(大圓覺)에서 증상심(增上心)을 일으킨다면, 마땅히 보살의 청정한 대원을 일으켜 응당 이렇게 말하리라. '원하옵니다. 내가 이제 부처님의 원각에 머물러서 선지식을 구하오니 외도와 이승(二乘)은 만나지 말아지이다.' 원에 의지하여 수행해서 점차 모든 장애를 끊으면 장애가 다하고 원이 원만함에 문득 해탈의 청정한 법 궁전에 올라 대원각의 묘한 장엄 경계를 증득하리라."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라.
일체 중생들이
대해탈을 얻지 못함은
모두 탐욕을 말미암아
생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미움과 사랑
그리고 탐진치를 능히 끊으면
차별한 성품에 인하지 않고
다 불도를 이루리라.
두 가지 장애가 길이 소멸하여
스승을 구하여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보리원에 수순하며
대열반에 의지하리라.
시방의 보살들이
모두 대비의 원으로써
생사에 들어감을 시현하나니
현재 수행하는 이와
말세의 중생들이
모든 애견(愛見)을 부지런히 끊으면
문득 대원각에 돌아가리라.
(<원각경 > ‘제5. 미륵보살장’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 별은 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2. 그 별이 아비소스를 여니, 거기에서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은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해와 하늘이 그 구덩이에서 나온 연기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3.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와서 땅에 퍼졌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전갈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4.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하지 말고,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만을 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5.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라는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것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6. 그 기간에는 그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7. 그 메뚜기들의 모양은 전투 채비를 한 말들과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과 같은 것을 쓰고,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8. 그리고 그것들은,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이빨은 사자의 이빨과 같고,
9. 쇠로 된 가슴막이와 같은 가슴막이를 두르고, 그 날개 소리는 마치 전쟁터로 내닫는 많은 말이 끄는 병거 소리와 같았습니다.
10. 그것들은 전갈과 같은 꼬리와 침이 달려 있었는데,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11. 그것들은 아비소스의 사자를 자기들의 왕으로 떠받들었는데,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요, 그리스 말로는 아볼루온입니다.
12. 첫째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가지 재앙이 더 닥쳐올 것입니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금제단의 네 뿔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4. 그것은 나팔을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프라테스에 매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놓아 주어라"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15. 그래서 그 네 천사가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그 해, 그 달, 그 날, 그 때에 맞추어 예비된 이들입니다.
16.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천사들이 거느린 기마대의 수는 이억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17. 나는 이러한 환상 가운데서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화홍색과 청색과 유황색 가슴막이를 둘렀고, 말들은 머리가 사자의 머리와 같으며,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18. 그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9. 그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는데, 꼬리는 뱀과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달려 있어서, 그 머리로 사람을 해쳤습니다.
20.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에게나, 또는 보거나 듣거나 걸어 다니지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21. 그들은 또한 살인과 점치는 일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오늘 요한계시록에서 “6. 그 기간에는 그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써도 죽지 못하고,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를 보자.
이 무슨 경우인가? 왜 이런 상황 설정을 하였을까?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난감하다.
여기서 “죽기를 원해도 죽음이 그들을 피하여 달아날 것입니다”는 여러모로 기억해둘 문장 같다. 응용할 수 있는 영역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해보자.
“내가 너를 원해도 네가 나를 피하여 달아날 것이다.”
“삶을 원해도 삶이 너를 피하여 달아날 것이다.”
“권력을 원해도 권력이 너를 피하여 달아날 것이다.”
“패망을 원해도 패망이 너를 피하여 달아날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아이러니한 문장들, 성경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
다음으로 “18. 그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를 보자.
우한 폐렴이라는 전염병이 연상된다. 이 시대에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위치는 어떻게 봐야 할까? 천형인가, 우연인가, 재수 없음인가? 죽음에도 과연 격(格)이라는 게 있을까? 태어남은 환대가 있지만, 죽음에도 과연 환대가 있을까? 지구인들의 종말은 언제 어떤 식으로 올까? 내 죽음은 그 전에 오는 것일까? 난감한 궁금증들이다.
장석주의 <은유의 힘>을 보자.
[한 유명한 철학자는 동물을 가리켜 ‘세계의 가난’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이 이성을 배제한 채 힘과 본성의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동물들은 왜 태어나는지 모른 채 태어나서 힘껏 먹이를 구하고 짝짓기를 하고 때가 되면 죽는다. 동물은 ‘몽롱한 욕망’이고, 애초에 자아실현이라는 목적이 배제된 ‘얼빠져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세계 안에 있지만 그 있음은 어리둥절한 가운데의 있음이다. 동물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조자 모른 채 죽는 것이다. 동물의 삶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런 까닭에 동물은 인류보다 열등한 형제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하이데거가 말한바 “실존 일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고독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동물들은 죽음도, 고독도 인지하지 못한 채 피동적으로 수납한다. 그로 인해 동물들의 내적인 가능성은 한계 처해진다. 그게 철학자가 동물들을 “세계의 가난”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동물과 인간의 유한한 생명의 시간을 살아낸 뒤 죽는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동물의 죽음은 인간과는 다른 죽음이다.]
인간중심 사고가 철저히 들어간 문장들이다. 인간도 동물처럼 사회의 연결된 한 구성요소라는 점을 새롭게 발견한 현대 사상을 간과한 문장들이다. ‘세계의 가난’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에서 부자가 된다는 욕망’을 가진 존재인 인간들이 지구를 지속 불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문장들이다. 이럴 때면 많은 사고를 하지 않고 사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우리들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 인간도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태어남도 죽음도, 그 의미들도. 그런 면에서 동물과 같다. 동물처럼 ‘몽롱한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몽롱한 욕망’, 이 구(句)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 사색자는 더욱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도대체 가르침으로부터, 스승들한테서 네가 배우려고 하였던 것이 무엇이며,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지?’ 그리고 그는 찾아냈다. ‘나는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단지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며,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단지 몸을 숨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진실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의 자아만큼,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별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그토록 많은 생각에 몰두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에 대하여, 싯다르타에 대하여 가장 적게 알고 있지 않은가!’]
왜 나를 그토록 알기 어려울까? 몸을 알려면 의학공부를 해야 하고, 정신을 알려면 심리공부를 해야 하고, 건강하려면 음식공부를 해야 하고, 자신을 거두려면 능력을 가져야 하고, 누군가와 함께하려면 마음을 얻어야 하고, 모욕을 당하면 그 원인을 제거시켜야 하고, 온화한 경멸을 받으면 복수를 연구해야 하고, 목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학을 통한 수정이 있어야 하고, 아프면 고쳐야 하고 등등 단 한순간도 미동이 멈추지 않는 이 나를 어떻게 획일적인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을까? 내 바깥의 것들은 단순명사, 혹은 개념어로 지칭해도 충분히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세상 모든 것과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를 사유해야 하는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럴 때 이렇게 하고, 저럴 때 저렇게 하는, 이 천방지축 날뜀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나를 안다는 것, 참 난감한 일이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몽롱한 욕망이란 무엇일까?
어떤 시인은 왜 동물에서
몽롱한 욕망을 읽었을까?
동물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인간은 뭐 원래부터 문자를 가지고 있었나?
문자가 만드는 이 세상
과연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도 가짜도 없는 게 이 세상인가
몽롱하고도 모호한 욕망을
정확하고도 적합한 언어로
드러내는 글쓰기
세계의 가난인가
세계의 부자인가
‘할(喝)’이면
족하지 않을까?
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