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은 계시다. 하나님과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신 책이다/ 로이드 존스/ 이안 머리
현대인의 견해에 따르면, 구약 성경은 인간의 종교적 발전에 대한 이야기, 유대인의 발견의 진보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구약 성경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고 생각했다. 성경은 계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할 수 있겠느냐?”(욥11?7)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이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욥36:26),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고, 자신의 말씀인 성경으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알려 주셨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왕과 백성에 대한 이 모든 역사를 보고, ‘이게 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이게 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과 능력과 위엄 그리고 통치권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의 주장은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다는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대하32:19)이 아니라 전능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별로 아시지만 자신의 권능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우리의 창조자, 우리의 목숨이 그 손안에 있는 주권적인 우리의 통치자, 우리가 상실해 버린 형상의 원천이시고 장차 그 앞에서 회계를 해야 할 우리의 거룩하신 심판자이시다.
영국 유대교 랍비 조나단 삭스는 ‘하나님은 우리 문화의 많은 부분에서 밀려나셨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돌아오도록 하는 곳에서는 존재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의 신관을 전혀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철저히 우리의 행동과 결정 위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좌절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권면하신다(마10:28).
현대 종교인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를 경고와 위협의 말이라고 멸시하지만, 이 경고와 위협의 말이야말로 엄밀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뜻이다. 하나님은 홍수 이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 없어지기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고의로 돌리지 못했으므로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려 주지 않는 설교는 참된 전도 설교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런 설교는 어떤 것이든 비성경적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말은 20가지가 넘는데, 이 말들은 다양한 형태로 구약 성경에서 580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관념을 빼내 버리면, 성경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이 진리를 감추는 것은 우리가 현재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었고, 만약 멸망하지 않으려면 그 관계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증거를 감추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윤리 법전으로 간주하여, 우리에게 도덕적 수고와 노력을 요구하는 책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가장 중대하고 은혜로운 주제 곧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런 것처럼, 눈이 멀게 된다. 구약 성경은 구속 역사에 대한 신적 증언이다.
“만약 우리가 복음과 복음이 주장하는 모든 것이 주로 인간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복음을 전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구원 계획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먼저 행하고, 또 하나님이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야만 행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활동에 대한 기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설교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놓을 어떤 일을 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설교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행하셨고, 또 행하실 어떤 일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심판을 설교에서 제시하지 않는 것은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 대해 참된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보았다. 창세기 3장 이후를 보면, 심판에서의 구원을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예비하고 계시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약속된 대리인, 화목제물, ‘피 흘림’ 등이 예비되어 있다. 이것들은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엄청난 대가를 치른 수단들이다. 이삭이 구원을 받은 방법은 우리 모두에게도 유일한 구원 방법이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죄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상태를 인식하게 될 때, 자신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아만처럼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영적 나병을 느낄 때, 완전히 입장을 바꾸기 마련이다. 이런 일들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공의로우면서 동시에 ‘긍휼에 풍성하실’ 수 있는지 아는 것이 영생이다.
로이드 존스는 복음의 본질적 모든 요소가 구약 성경 계시에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거듭남을 신약 시대에만 속해 있다고 보는 관념을 ‘철저히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또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복음은 거대하고 방대한 것,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그러기에 사람들은 경이와 놀라움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반면에 단순히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라고 곧 선하고 친절한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복음’은 이런 효력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런 복음은 우리 안으로 파고 들어와 복음의 위엄과 은혜로 우리를 압도하지 못한다.
이런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행동을 선포하는 복음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과 선지자와 모든 신약시대 성도들을 놀라게 하셨다.”
- 이안 머리,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pp 11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