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마다 노르웨이의 꿈을 꾼다>
그 긴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와도
그 아름다운 나라 노르웨이는 나에게 영원히 꿈과 같은 나라이다.
지금도 내 마음의 절반은 항상 우리 관저가 있던 홀맨꼴랜(Holmenkollen)에 가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겨울에는 백설로 뒤덮인 순백의 자연에서 '크로스컨트리(Cross Country)'를 즐긴다. 또 크리스마스 시즌인 11월 말부터는 밤마다 아름다운 촛불을 켜고
갖가지 화려한 장식을 설치하여 기나긴 겨울 밤을 낭만이 가득한 밤으로 만든다.
노르웨이는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웅장한 자연을 가진 나라이다. 예전에는 산세가 험한 척박한 땅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하던 나라였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때 묻지 않은 절경으로 인해 더욱 각광받는 나라인 것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한국인과 외모는 다르지만 순수하고 질박한 성격은 비슷하다. 또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영락없이 한국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노르웨이 사람과 한국 사람이 기관차를 운전한다면, 철로에 바위덩이가 가로막고 있더라도 제시간에 도착시키기 위해,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자주 들려준다. 떠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밤마다 노르웨이의 꿈을 꾼다.
노르웨이가 이처럼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한 것은 아마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1996년 7월 25일, 나는 노르웨이 중부 트론드하임(Trondheim)으로 출장을 갔다.
이 당시 노르웨이 대사관에는 영사를 보던 정태인(현 인도 대사관 공사)서기관과 박원섭(현 수단 대사) 서기관이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트론드하임 시내에 있는 한 중국식당에서 교포들과 저녁식사를 하였다. 이자리는 정태인 서기관이 그 지역 교포들에게 미리 연락하여 마련된 자리였다. 그 당시 노르웨이에는 200여명의 교포가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그녀들은 한국에 파견된 노르웨이 선박기술자들을 만나 결혼했다가 귀국할 때 함께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트론드하임 지역에는 10여명의 한국인 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그 지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동포들을 만날 희망으로 200킬로미터가 넘는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밤중에 험한 산길일지라도 남편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와서
오랜만에 만난 동포들과 한국말로 마음껏 수다를 떨며 회포를 풀었다.
2미터에 가까운 노르웨이인 남편들이 자그마한 한국인 부인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그 고 험한 길을 운전하고 온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랑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노르웨이 인들은 남에게 방해 받지 않고 자기 가족들끼리만 사는 것을 좋아해서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피오르드(Fjord: 급격한 괴암절벽의 협곡해안)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외딴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경우도 흔했다.
노르웨이인 남편들은 대부분 한국인 부인을 무척 사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르웨이 여성들은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한국인 부인들은 성품이 온화하고 가정과 남편에게 헌신적이기 때문이었다.
중국식당에 초대된 10여명의 한국인 부인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한국말로 마음껏 떠들며 맛있게 음식을 들었다.
그런데 작년 9월에 만난 적이 있는 스벤 빅스빈(Sven Viksveen)이라는 노르웨이 남편은 홀로 측은하게 앉아 있었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물었다.
"빅스빈 씨, 왜 부인과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
빅스빈은 대답 대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노르웨이 인들은 남에게 눈물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데, 단 두 번 만난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니 당혹스러웠다.
잠시 흐느끼던 빅스빈이 탁자 밑에서 뭉툭한 뭔가를 꺼내놓았다.
못 자국이 잔뜩 나 있는 허벅지 굵기의 몽둥이였다.
빅스빈이 그 몽둥이를 바라보며 흐느끼듯 말했다.
"제 아내는 일주일 전에 죽었습니다."
"쾌활하시던 부인이 돌아가셨다니 무슨 말인가요?"
빅스빈은 아내가 뇌종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나는 슬픔에 겨워 연거푸 눈물을 훔쳐내는 빅스빈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못 자국이 잔뜩 나 있는 그 몽둥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빅스빈 씨, 저 몽둥이는 무엇입니까?"
"저 몽둥이에 나 있는 못 자국들은 제 아내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랍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저 못 자국 하나하나에는 아내의 외로움이 묻어 있답니다."
연거푸 알쏭달쏭한 말을 하던 빅스빈은 아내를 만나 사랑하고 노르웨이에서 사망하기까지의과정을 차분차분 들려주었다.
1980년대 초반, 선박기술자인 빅스빈은 한국의 현대조선에 스카우트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 1986년 4월, 빅스빈은 주말 오후에 양산 통도사로 구경을 갔다가 부인 이숙희 씨를 만났다. 당시 이숙희 씨는 30대 후반의 이혼녀였는데, 첫 결혼에 실패하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통도사 근처의 친척집에 와 있다가 빅스빈을 만난 것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이듬해 5월, 빅스빈이 별거 중이던 노르웨이인 아내와 이혼하자
두 사람은 그 해 연말에 결혼했다.
부산 출신인 이숙희 씨는 남편을 하늘같이 따랐고, 빅스빈도 전 부인과 달리
순종적인 아내를 자상하게 대해주었다.
1988년 3월, 한국 근무를 마친 빅스빈은 아내 이숙희 씨를 데리고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트론드하임 시 북쪽 외딴 시골의 오래된 집을 사서 수리하여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웃도 없는 외딴 곳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
이숙희 씨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만 생각해주는 자상한 남편 덕분에 한국에서의 괴로웠던 삶을 점차 기억에서 지웠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갖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는데, 언제부턴가 이숙희 씨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남편이 말을 건네면, 대꾸도 없이 조용히 웃는 것이 전부였다.
노르웨이 말도 웬만큼 익혀서 프람(Flam) 근처에 사는 시집식구들과 의사소통도 가능했지만, 그녀의 얼굴엔 오히려 수심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겉으로는 행복한 척했지만, 마음속에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그 아이를 키우면서 외로움을 달랬을 텐데, 하늘은 끝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숙희 씨가 외로울 때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이었다.
게다가 노르웨이의 기나긴 겨울이 찾아오면, 두 딸에 대한 그리움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이숙희 씨는 동그란 몽둥이 하나를 구해서 외로울 때마다 큰 못을 박았다. 특히 두 딸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으면, 가장 큰 대못을 쾅쾅 소리가 나도록 박으면서 울었다. 또 부부싸움을 하거나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을 때에도 못을 박았다. 그것이 이숙희 씨가 유일하게 외로움을 달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빅스빈이 자정이 다 돼서 들어왔는데, 이숙희 씨가 황급히 뭔가를 감췄다. 빅스빈은 방금 감춘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닦달했다. 이숙희 씨는 어쩔 수 없이 못이 잔뜩 박힌 그 몽둥이를 내놓았다.
그리고는 그 동안 외로울 때나, 부산에 사는 두 딸이 보고 싶을 때나, 남편이 늦게 들어올 때마다 몽둥이에 못을 박았다고 실토했다.
빅스빈은 그 말을 듣고 아내의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이숙희 씨를 꼭 안아주었다.
그날 후로 빅스빈은 아내와 자주 대화를 나눴고, 밖에 나가서도 늦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 이후로 이숙희 씨도 점차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의 사랑을 질투했다. 언제부턴가 이숙희 씨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뇌종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빅스빈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내의 병은 의학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1996년 7월 19일, 이숙희 씨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빅스빈은 아내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수없이 못을 박아놓은 그 몽둥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죽음을 앞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용서를 빌었다.
"여보! 정말 미안하오. 당신이 그토록 외로워하고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는지는 정말 몰랐소. 그런데도 이 외딴 산골짜기에 혼자 내버려두고 돌아 다녔으니 …
나는 당신에게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당신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었소.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즐거움을 줬다고 생각되는 날에는 당신이 박아놓은 그 못을 하나씩 빼왔소. 자, 보시오! 이제는 몽둥이에 못이 하나도 박혀있지 않소.
여보, 어서 눈 좀 뜨고 봐요!"
부인 이숙희 씨가 혼신을 다해 말했다.
"고마워요. 착한 당신에게 내가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요.
부산에 있는 내 아이들과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요. 그 몽둥이에 박힌 못은 없어졌지만, 못 자국은 남아 있으니 그것이 끝내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내가 죽거든 몽둥이를 불에 태워버리세요."
이숙희 씨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끝내 죽고 말았다.
빅스빈은 엊그제인 7월 21일 아내를 집 입구에 묻었다면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못 구멍이 잔뜩 나 있는 그 몽둥이를 보자기로 소중하게 쌌다.
한편의 슬픈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보고 들은 이야기이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이야기는 마치 어제 일처럼 내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나에게 슬픔과 감동을 주었던 빅스빈 씨가 노르웨이의 수려한 자연 속에서
행복한 새 삶을 살고 있기를 간절히 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