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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6
3월6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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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의롭다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주변 열강들의 외세에 시달려왔던 우리 민족이기에, 숱한 나날 동안 식민 통치에 이력이 난 우리들이기에, 긴 세월 동안 군부 통치에 시달림을 받아온 우리들이기에 '의로움'이란 단어만 보면 즉시 뇌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강함' '결사항전' '혈서' 같은 말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하면 즉시 떠오르는 대상은 불의를 보면 절대 못 참는 사람, 삭발하고 머리띠 두른 사람, 길거리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이 납니다.그런데 한자 의(義)자 분석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의(義)자는 양(羊)과 나(我)의 합성어입니다.
결국 의로운 사람은 자신 안에 한 마리 양이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순한 채식동물, 염소와는 달리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동물, 흠없고 순결한 동물, 겸손하고 순응적인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양은 염소와 대비되어 천국의 동물, 하느님의 동물로 묘사됩니다. 이는 우리가 장례미사 때마다 읽게 되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오면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갈라놓듯이 의인은 오른쪽에 악인은 왼쪽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의롭다는 것은 강경일변도, 투쟁일변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기보다 겸손하다는 것, 순수하다는 것, 순응적이라는 것, 부드럽다는 것, 하느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의 표방했던 의로움은 거짓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은 한없이 뻣뻣했습니다. 그들의 콧대는 하늘 높은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뒤는 구리고 또 구렸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때로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불의 앞에 날 선 대립과 섬뜩한 비판, 강한 투쟁과 강직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부드러움과 온유함도 필요합니다. 따뜻한 배려와 측은지심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얼마나 자상하고 부드러우셨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섬세하고 다정다감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의 한없는 부드러움이 우리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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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위보다 감정이, 감정보다 자기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
형과 동생이 싸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
역시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형이 먼저 손을 내밉니다.
“야! 미안하다.”
아마도 동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형의 스타일은 더욱 구겨졌을 것입니다. 동생은 원래 동생이니 동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형은 ‘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라는 말은 사실은 형이 먼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위도, 감정도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롭다는 말은 주님 마음에 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의 의로움은 ‘행위’의 의로움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고 나와 있다면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의 의로움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은 ‘감정’의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은 행위를 넘어서는 감정의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은 이 감정으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했다고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행위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을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행위보다는 감정을 의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정을 항상 기쁨과 평화, 사랑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고아인 줄 알았다고 참 부모님을 찾게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지금까지 아무리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이 있더라도 그 부모님을 찾은 기쁨에 그 미운 마음이 싹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듯 기분은 결국 자기 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으로 우리 감정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감정의 흐트러짐을 막을 수 있습니다.
보물섬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가족들과 함께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부인이 놀라 뒤따라 나가서 남편을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스티븐슨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주님께 드리기가 괴롭소, 마음이 편치 않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유지해야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감정은 정체성과 직결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명확한 자기 정체성은 행위의 의로움을 넘어서 감정까지 의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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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라고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에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루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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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복음서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따르고 지키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유다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상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힘겨워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법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법대로’ 살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그들 삶의 가장 큰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법대로’ 사는 것에 만족하고 떳떳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될뿐더러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많은 이들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물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고,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갚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로움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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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워하지 마라. 미움 받을 짓도 하지 마라.>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형제를 증오하고, 그래서 형제를 모욕하고,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은 살인죄와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오와 분노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를 증오하고, 모욕하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의 죄’는 ‘그의 죄’이고, 그 일 때문에 짓게 된 ‘나의 죄’는 ‘나의 죄’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에 그 형제에게 가서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면서 그가 죄를 지은 것을 심하게 비난하고 꾸짖었다면? 그런 경우에 그의 죄가 너무 커서 그렇게 크게 혼내야만 했다고 변명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타일러라.”라는 말씀은, “사랑으로 회개시켜라.”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미움 받을 짓을 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미움 받을 짓을 한 쪽이 잘못한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라는 말씀은,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미움 받는 고통’과 ‘미워하는 고통’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큰 고통일까? 아마도 ‘미워하는 고통’이 ‘미움 받는 고통’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그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 주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고통보다 상대방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은 물론 나의 ‘미움 받는 고통’을 없애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 사람이 혼자서 오해하고서 나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잘못이 없는 내가 왜 그에게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하는가?”라고 따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자꾸만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화해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빨리 가서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상처를 받은 사람만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원망과 원한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에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잘 반성해 보아라.”로 해석됩니다.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을 “우연히 생각나거든”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고...”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시작 예식에 ‘참회 예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부터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바치는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을 형식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바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는지, 혹시 내가 미움 받을 짓을 한 적이 있는지”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을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중간에 고해성사를 볼 수는 없으니까, 실제로는 양심 성찰과 고해성사를 보는 일은 ‘미사 전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여기서 ‘법정’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고소한 자’는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그 형제”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법정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분명히 잘못한 사람은 ‘나’이고, ‘그 형제’는 나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라는 말씀은,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승에서의 인생은, 사실상 하느님의 법정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재판관’은 하느님이고, ‘형리’는 죄인의 처벌을 담당하는 천사입니다. ‘감옥’은 연옥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습니다. 연옥이라면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으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는다는 말은 철저하고 완벽한 보속을 뜻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다 끝난 상황이고, 그곳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승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연옥과 지옥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회개하고 보속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연옥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는 것도 포기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살고 있다면, 그 상황은 지옥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면서도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영혼과 양심의 평화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무의식 속에는 심판과 멸망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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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너그럽다’는 말은 한편에서 보면 마음이 넓고 선한 뜻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에서 보면 줏대도 없고 자기 소신도 없어 보입니다. 이 너그럽다는 뜻을 좀더 살펴본다면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이 그 뜻을 살피려면 꼭 집어서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량雅量'이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인데 '너그럽고 속이 깊다.'라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문을 살펴보면 '아雅'는 '맑다', '바르다'.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요 '량量'은 '헤아리다', '추측하다,'라는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글자대로 한다면 '마음이 맑고, 바르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헤아릴 수 있다.'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너그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다 넓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너그러운 마음'이야 말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의 심성이겠지요?
사람이 본래 착하고 선한데, 살다보면 떼가 끼고 욕심이 들어가고 그리고 '자기'라는 주장이 강하다 보니 본래의 아름다운 마음이 손상 입거나 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우리가 나누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러하듯, 살아가려고 하다보니까 우리가 갖고 있던 본래의 선하고 좋은 마음들이 주위의 환경으로 좁고 이상하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으로 받은 ‘하느님의 모상’은 기도와 그분을 닮으려는 노력으로 그 모습그대로를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7-28)
좁아터진 세상 사람들은 이웃의 지난 잘못들을 기억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처벌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마음으로 기다리시며 악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화답송으로 바치는 시편저자의 청원을 한 없이 부족한 우리도 전심으로 바치게 됩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3)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신데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법의 멍에를 씌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허세를 비판하시며 사람은 작은 잘못이라도 다스려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이라는 말도 다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견주기 좋아하는 그들보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를 거슬러 고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화해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일을 하고도 우리는 때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도 하지 말고 나의 작은 과오라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주님께서는 남에게 작은 과오를 따지지 말고 먼저 나의 티 같은 잘못도 살피고 악의 시작부터 다스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내 것을 양보하고 낮추며 상대를 존중해 줄 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넉넉함과 너그러움이 자라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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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화를 다스리는 것>
영문도 모른 채 15년을 사설 감옥에 갇혀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 감옥을 나와서는 더 엄청난 업보를 치르는 남자에 대한 영화가 있었다.
철없던 시절에 무심코 뱉은 말 한 마디에 대한 죗값은 그가 사설 감옥에서 15년간 먹었던 군만두보다 더 컸으니…. 여하간 ‘입조심’, 곧 세 치 혀를 잘 다스려야 함을 일깨워 주었던 영화였다.
화를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베트남 출신의 스님이요 시인이며 평화운동가인 틱낫한도 화를 절대 내지 말라고 하지 않고 제대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나지 않은 척해서는 안 된다. … 내가 지금 화가 났으며 그래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아주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화를 다스리고 세 치 혀를 다스리기 위해 ‘사랑’을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의 이 ‘사랑’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사랑은 시기도 자랑도 교만도 화도 사욕도 품거나 내지 않으며 오히려 친절하고 잘 참고 견디어 낸다고(1코린 13,4 -7)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 화를 다스리고 세 치 혀를 다스리는 데 실패하게 되면 서둘러 ‘화해하라’고 하신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 24).
누가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서느냐에 따라 믿음의 성장이 결정됨을 가슴속 깊이 새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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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자 안에는 인간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고통, 절망, 욕망, 근심, 걱정, 시기, 질투, 열등감’과 같은 것입니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자 안이 너무 궁금해서 기어코 열고 말았습니다. 신화는 이야기합니다. 상자 안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입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소녀는 가을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나무 잎사귀를 보았습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잎새는 소녀에게 희망이 되었고, 소녀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잔의 물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가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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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징검돌>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징검돌>
하느님과
나 사이에
당신
걸림돌이
아니라
징검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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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께 봉헌할 예물>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새로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셨습니까? 거룩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그리스도인답게 예수님을 본받아 나눔과 섬김으로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벗님들의 신앙생활에서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가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은 성찬례, 곧 미사입니다.
미사, 특히 주일미사는 우리 삶의 중심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흥겨운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벗님들께서는 과연 어떠한 몸과 마음의 자세로 미사에 참례하십니까? 진정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기쁨에 넘쳐 미사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단지 의무감에서 미사에 참석하십니까?
벗님들께 미사는 말씀과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충만한 생명으로 거듭 나는 잔치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벗님들을 한 사람의 관객으로 만드는 그저 거룩한 연극 같은 것입니까?
주일미사를 한 시간 남짓 진행되는 형식적인 종교 행사쯤으로 여긴다면, 미사가 삶의 중심도, 살아가는 힘의 원천도 될 수 없습니다.
미사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고 화해하는 자리요,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한 시간의 주일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일주일이라는 삶의 소중한 시간을 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분리하려는 유혹에 빠져듭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고, 지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교회 안에서 봉헌되는 미사나 신심행위로 해소하려는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구체적인 이웃 사랑은 외면한 채 하느님 사랑을 공허하게 외치는 어리석음도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웃과의 일치와 화해를 도모하지 않으면서, 그저 애타게 하느님만을 목 놓아 부를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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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박사학위 공개심사를 앞두고 있을 때 제가 가장 많이 받은 스트레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제가 쓴 논문이니 만큼 내용에 대해서도 자신 있었고 발표 또한 자신 있었으나, 문제는 저를 평가하고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되었는데, 나의 이태리어가 이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교수님들의 질문에 내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걱정과 스트레스는 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함에 있어서 본인이 우위에 서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남을 깎아 내리고자 하는 심리적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지만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상처를 받아본 저는 그런 경험 자체를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고 잘하는 모습만 보이고 싶었습니다.
반면, 박사학위 공개심사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여러 교수들과 직접 토론을 하는 것이기에 이런 저런 약점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 보였습니다. 그러니 논문 심사를 앞두고 걱정이 되는 것은 논문 발표보다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좀 더 유려하게 잘 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하고 연습했습니다.
그렇게 공개 심사 날이 다가왔습니다. 정신없이 준비하고 교수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긴장된 마음으로 발표석에 앉아 시작기도를 하려는데, 강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시선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은 “네가 얼마나 잘 하는지 지켜보겠어”라는 시선이었는데, 저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들은 “제발 잘 통과해야 할텐데, 교수들이 너무 깐깐하게 굴면 안되는데” 라는 시선이었습니다.
그렇게 공개 심사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인사를 나누며 얼마나 그들에게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했던 사소한 경험을 토대로 저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고 평범한 다른 사람들까지 매도한 제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이렇듯 이전의 경험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오해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움과 오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독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미워해도 상대는 변하지 않을뿐더러 설사 변한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험담하고 미워하면 내 마음의 불편함만 가중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은 불편합니다. 누군가에게 성을 낸다는 것은 분명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해서이고 그로 인한 미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기에 애써 용서해보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말씀은 세상과 동떨어진 이야기 같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원망을 품거나 미워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우리 자신은 어둠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가 상대를 바보라고 부르고 멍청이라고 불러봤자 그는 어떠한 손해도 입지 않습니다. 결국 그로인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는 자기 자신 뿐입니다.
둘째는, 악인이 갖고 있는 가능성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더 큰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안에는 우리 모두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 또한 악인일 수 있으며 누구나 죄를 짓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처럼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것들에 대해서 흔히 “암적인 존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암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해를 끼치는 악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암세포는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변이가 일어나 종양을 만드는 것으로써 신체조직의 과잉성장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덩어리를 의미합니다. 이 암세포는 일단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화기관 혹은 배설기관을 잠식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이 암세포란 자신이 자라나고 있는 그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면 자기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다가 자신 역시 죽음으로, 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이 이런 암세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내 자신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향하여 애정을 가득 담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참된 회개와 그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란 그 죄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야 하느님과의 화해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함으로써 나 자신이 암적인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어둠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느님과 나 사이에 어떤 장벽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 장애물을 걷어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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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회개의 시작…>
신학교 은사 신부님이셨던 이제민 신부님께서 쓰셨던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어 보았습니다. 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납니다. 컴컴한 저녁 길에 비가 내려서 잠시 쉴 움막을 찾고 나서야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움막에서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서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물이 있어서 맛있게 마셨습니다. 원효대사는 그날 밤을 잘 잘 자고 일어나서 보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지난 밤에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해냈습니다. 그 이유는? 간밤에 바가지를 집어서 맛있게 먹었던 물이 해골 가지에 담아진 썩었던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과 오늘 모두 똑같은데, 어째서 어제는 단물 맛이 나고 오늘은 구역질이 나는가? 중요한 것은 어제와 오늘 사이 달라진 것은 물이 아니라 원효대사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을 나설 수 없어서 하룻밤을 더 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에 잠을 잘 잤던 움막에서 도저히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움막이 아니라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원효대사는 기도합니다.
“전날 밤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오늘은 그 해골에 담긴 물 때문에 모두 토해버렸다. 어젯밤에 그렇게 잘 잤는데 오늘은 잠을 못 잡니다.”
여기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다. 그래서 바로 마음먹기에 따라서 썩은 물도 달콤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네가 문제가 아니고 당신 탓이 아니라, 내가 문제이고 내 탓이다.”라는 말씀을 담고 영적 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솔직히 다른 사람에게 단 한 번도 성을 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도 품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우리가 모두 죄책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판단 자체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그래서 얼른 뉘우치고 화해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길로 돌아서게 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도 주님 덕분에 그 영혼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 덕분에 용서하고 싶습니다. 주님 덕분에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덕분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나라가 힘든 상황에 놓여 있고, 그리고 국민은 두렵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 역시도 마음이 너무나 답답하면서 절망하고 분노가 일어날 지경입니다. 그런데 국민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이 어렵고 힘든 상황을 틈타서 자기들 잇속을 챙기려는 집단에 어리석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과 정부가 하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흠집을 내고 흔들어서 나라와 국민을 더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여러 집단들이 있습니다. 물론 정부가 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재난 상황에서는 조금 실수가 있고 답답하겠지만,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아니면 입 다물고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는 배려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집단에 어리석은 영혼들은 거만하고 교만으로 가득 차 지금까지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지도 않으면서, 뻔뻔하게 이 모든 일이 ‘자기 탓이 아니고, 다 네 탓’이라고 매몰차게 상대를 공격합니다. 이제 그 어리석은 영혼들이 회개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어리석은 영혼들에게 먼저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고 내 탓임을 고백하는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힘을 합쳐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는 코로나 19를 극복할 수 있고, 함께 행복하고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시작은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모습(제 탓이오!)입니다.”
저 두레박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보여주셨던 사랑과 자애로, 오늘 우리 고운님들도 기억하는 영혼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가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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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8)
♧♧ 시편 76편 12절…
"주 너희 하느님께 서원하고 채워 드려라. 그분 주위에 있는 이들아. 두려움이신 그분께 예물을 바쳐라."
* 주 너희 하느님께 서원하고 채워 드려라.
이는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인해 아시리아 군대의 위협에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 그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요구입니다.
* 그분 주위에 있는 이들아.
문자적으로는 ‘그분 이웃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남 유다 주변의 이방 민족에서 더 나아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역대기 하권 17장 10절. 참조)
* 두려움이신 그분께 예물을 바쳐라.
이 구절의 뜻은 하느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악인을 징벌하며 의인을 구원하는 분이시니, 당신의 피조물인 모든 인간은 마땅히 그분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열심히 섬기라는 말입니다.(시편 68편 30절. 참조)
♧♧ 시편 76편 13절…
"그분은 제후들의 얼을 꺾으시는 분, 세상 임금들에게 경외로우신 분이시다."
* 그분은 제후들의 얼을 꺾으시는 분...
여기서 ‘제후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불의한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얼’은 제후들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느님을 대적하여 그분이 선택하신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하느님의 징벌을 당해 멸망할 것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세상 임금들에게 경외로우신 분이시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임금 중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단숨에 꺾어버리심은 소위 백성들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는 이 세상 임금들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즉 세상 임금들 역시 폭력과 핍박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명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권력자를 세우신 것은 정의로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함이지, 결코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불의하게 권력을 휘두르라고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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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족의 강요로 고해소에 들어왔거나,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판공성사를 위해 들어온 사람일 것입니다. 고해소 밖에서 ‘내가 어떤 죄를 지었지?’라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법을 어겨서 수갑을 찰 어떤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 미사는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많이 빠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일 미사 빠졌다고 해서 감방에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분은 사회법의 기준에 맞춰서 자기 죄를 살펴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지요. 한 남성이 어느 공공장소에서 소변이 너무 급해서, 오른쪽 손을 자신의 자동차에 올려놓고 자동차 뒷바퀴에 일을 보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경찰이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남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공장소에서의 노상 방뇨로 경범죄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경찰은 흘낏 한 번 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남성은 영국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고, 영국에서는 법으로 괜찮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 나라마다 다른 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법과 이 세상의 법이 같을까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법과 다른 하늘나라의 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율법의 옛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르지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성을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심한 욕도 퍼붓는 우리는 아닐까요? 분명히 이 세상의 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법은 마음에서 죄의 뿌리마저 뽑아 버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심한 법 규정이라고 하면서 그 나라에 살지 않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너무 심하다면서 위헌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그 나라에 살려면 그 나라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죽음 뒤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됩니다. 죄의 뿌리를 뽑고 대신 그 자리에 사랑이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우편이나 택배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직접 전해주십니다. 그러니 은총을 받으려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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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 주는 교훈>
어느 책에서 연필이 주는 교훈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서 적어봅니다.
첫째, 연필은 뾰족하게 깎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깎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듬는 것은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의 쓸모를 높이게 됩니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필심이 부실하면 좋은 글씨를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내면의 성장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셋째, 연필로 잘못된 글씨는 지우개로 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즉시 지워서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연필로 글을 쓰지만, 훌륭한 글은 연필을 손에 쥔 작가에게 나옵니다. 나를 이끄는 존재인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섯째, 연필로 쓴 것을 지워도 자국이 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늘 흔적을 남깁니다. 그 자국들이 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연필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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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정화淨化의 여정>
-사랑과 지혜-
어제의 복음 묵상중 빠진 것이 있어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백절불굴의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의 자세를 가리킨다 했습니다. 물론 내 원하는 대로의 내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겠습니다.
이런 기도의 자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까? 바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절대적인 신뢰의 믿음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없으면 이런 한결같은 기도의 자세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새삼 깨닫는 바 믿음과 기도는 함께 간다는 것이며, 부족한 믿음을 더해 달라 주님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이어 사랑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노력努力이요 실천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했습니다. 사랑은 인생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사랑은 바로 다음 오늘 복음의 서두의 말씀에 대한 답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유일한 비결은 ‘사랑’뿐이라라는 것입니다. 내일 복음의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의로움, 완전함에 대한 유일한 답은 사랑뿐이라는 것입니다.
지엽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원적인 처방입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입니다. 무지로 인한 무자비한 언행입니다. 몰라서 판단이요 비방이지 정말 자기를 알면 알수록 판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깨달아 아는 것이 사랑이요 지혜요 겸손입니다.
실제적인 살인에 앞서 참으로 거칠고 사나운 혐오와 증오가 가득담긴 생각과 표정과 눈빛과 눈길, 말의 간접적 폭력과 살인을 주목해야 합니다. 비수와 같은 언어 폭력의 말, 섬찍한 표정, 살기 등등한, 미친 듯 광기의 눈빛 역시 그대로 평생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간접적 살인입니다.
참으로 우리 안에 깊이 내재해 뿌리 내리고 있는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공격성등 참으로 무지의 악이, 무지의 어둠이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근원적 무지의 악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무지의 뿌리를, 마음의 정화를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행위,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하는 무시와 멸시의 말, 남의 원망을 받는 행위, 타협하지 못하고 끝까지 파멸의 길을 가는 어리석은 행위들 그대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무지의 악에 유혹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각적 회개로 원망을 푼다음 제단에 예물을 바치며 법정에 가는 도중 즉각 타협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도 말도 행위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비로운 마음에서 자비로운 생각과 말과 행위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입니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중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가 아닌 사랑할수록 깨끗해지는 마음, 거룩해지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깨달음, 사랑의 정화입니다. 사랑으로 깨달아 알아갈수록 비로소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 수행의 목표이자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이 바로 무지에 대한 답이요, 영적 삶은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필생의 영적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 정화의 여정 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그 궁극의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는 평생 여정을 가리키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이런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이들은 날로 하느님과 앎의 관계도 깊어져 지혜롭고 겸손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바로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과거에 안주하여 자만하지 않게 합니다. 하느님께는 일체의 기득권도 소용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한결같은’ 삶의 모습입니다.
과거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소용없습니다. 과거 아무리 못살았어도 지금 회개하여 잘 살면 구원입니다. 누가 나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내가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절박한 회개의 메시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와 희망이요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회개도 희망도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시종여일始終如一, 변절變節, 변심變心하지 말고 변질變質되지 않고, 지조志操있고 품위品位있게, ‘한결같은’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순시기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의 압축입니다. 전화위복, ‘코로나 19’가 역설적으로 우리의 회개와 정화의 여정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정화의 여정후 마침내 부활 승리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다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모든 시련과 장애를 깨달음의 계기로, 정화의 계기로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깨어 있는 이들은 결코 오늘 지금 여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오늘 하루도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제 좌우명 고백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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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보, 멍청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이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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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돌아섬"을 제시하십니다. "돌아섬"이 곧 회개의 시작입니다.
"돌아서서"(에제 18,21.23.27.28)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돌아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악인이 자기의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는 "돌아섬" 이전의 모든 불의를 용서받게 됩니다. 그의 죄악이 주님께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돌아섬"도 있습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주님께 그의 정의는 잊혀지고 나중에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으리라는 것이 냉정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돌아서되 올바른 방향쪽으로 돌아서는 것이 관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로움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성을 드러내고 증명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더 요구하십니다. 신분상으로도 그렇거니와 정식 종교 교육도 받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들을 능가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물리적 살인만이 불의가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 하는 인격 살인까지 그에 버금가는 불의라고 하십니다. 육적 생명을 앗아가는 죄만 죄가 아니라 영혼의 생기를 빼앗는 위해 역시 엄청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마태 5,23)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권고를 방금 들은 엄격한 말씀의 해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하라는 것과, 자기를 고소한 이와 얼른 타협하라는 것입니다. 둘 다 "멈춤"과 "돌아섬"이 요구되지요.
사실 관계가 어그러지고 상처까지 입게 되면 화해나 절충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성과 윤리를 떠나 자존심으로 자기 입장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지요. 그때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여태까지 치달아온 방향을 돌이켜 서로에게 생명이 되는 방향으로 재조정하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극으로 치닫던 방향을 돌려 일단 서로를 향하고, 그 다음은 대화가 되건 합의가 되건 만나는 겁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고, 승패와 상관없이 그간의 제 길을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나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죄인이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영성체송)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서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을 생명을 걸고 하시니 어마어마한 무게가 느껴지지요. 실제로 주님은 우리 회개를 위해 당신 생명을 거셨습니다.
돌아섬은 변절이나 줏대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밀어붙이는 것이 죄를 쌓는 무모한 어리석음이고 상대를 죽이는 악이지요. 하물며 하느님도 우리 같은 죄인 때문에 마음을 바꾸시고 징벌을 돌이키십니다. 제단의 예물보다 시급하고 재판장의 판결보다 위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서로의 생명을 북돋우고 살리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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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분노를 버려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려는 이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올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잘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카인이 바친 예물을 하느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카인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형제간의 사랑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신 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도 하십니다. 주님께서 즈카르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하여라. 형제에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풀어라.”(즈카 8,16-17 참조.) 주님께서는 “노여움을 그치고 성을 가라앉혀라.”(시편 37,8)며 다윗을 통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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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마음이 근심에 싸이고 흔들리면 그대의 마음 가운데 십자가를 놓게!
어떤 성인은 이 사연을 편지에 쓰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니 그대의 마음이 근심에 싸이고 흔들리면 그대의 마음 가운데 십자가를 놓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을 때 물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바가지를 물 위에 엎어 두거나, 나무 조각이나 나무 가지를 물 위에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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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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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런데,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이는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곧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말해 줍니다. 형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요, 형제와의 의로움의 관계가 곧 하느님과의 의로움의 관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무엇이 우선이고 먼저 해야 할 일인지를 헤아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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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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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꼬인 관계>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악인이 죽는것보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마음은
누구와도 원수지지 않을 때입니다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자주
사소한 것으로 큰 화를 일으키는 약함들...
유혹이 더 많은 사순시기
주님 선하심으로 초대받은 이때에
서로 꼬인 관계는 따지는 것 멈추고
상대의 소리를 들어주는게 필요합니다.
손해보는것이 예수님 닮는 것입니다.
'따지는것 멈추고 부드럽게 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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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제 멋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을 반성하는
요즈음입니다.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우리들 일상이
하느님 말씀을
듣게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내면을
관통합니다.
십자가의 겸손이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됩니다.
믿음은 판단을
내려놓는 데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지울 수 없는
형제와 형제의
관계입니다.
화해는 가장
가까운 데서
길을 트는
기도입니다.
화해도 용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배우는 생명의
여정입니다.
화해와 용서로
돌아갈 우리의
짧은 시간입니다.
사람의 길이
화해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름답기를
기도드립니다.
주고받는 것이
화해와 용서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화해의 물길이
마음과 마음에서
쏟아지길 바라는
십자가에서
화해를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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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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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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