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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7
3월7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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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1)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그날>
마태오 복음 5장-7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산상설교로 이루어져있는데, 5장에서는 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건네시는 행동지침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니 참으로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오늘 하시는 말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 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 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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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는 언제나 놀라운 기적과 변화가 뒤따릅니다!>
오늘 우리에게 ‘원수’는 어떤 존재일까? 생각해 봅니다. 평생 지울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고 이제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그가 원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게 가족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댓가로 ‘큰집’에 수감되어 있는 그가 원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좀더 묵상해 보니 원수는 뜻밖에도 아주 가까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 한 사무실 안에 같이 일하는 동료, 매일 몸붙여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가운데 원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듣기 싫은 말만 골라하는 그,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하는 그, 끝끝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원수인 듯 합니다. 남들 앞에 내 위신 좀 세워주면 좋겠는데, 틈만 나면 사람들 앞에서 내 흉을 보는 그가 원수일 것입니다.
나는 할일이 태산이라서 분단위로 시간을 나누어 뛰어 다니고 있는데, 일어나지도 씻지도 않고 뒹굴거리는 그가 원수로 여겨집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기껏 차려놓은 밥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리는 그가 원수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백 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존재 자체로 고통이요 십자가인 그를 기꺼이 견뎌내고 기다려주는 것이 원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가 이제 절정을 향해 다가서고 있습니다. 바로 원수 사랑이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요청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폭력·무저항 평화주의를 뛰어넘은 꽤나 부담스런 요청입니다. 성격이 원만하고 예의바른 사람은 원수에게도 관용을 베풀고 편안하게 대할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즉 한 차원 높은 사랑, 결국 신적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자아’(自我)라는 작고 옹색한 그릇을 벗어날 때 가능합니다. 인간의 협소한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원수 사랑은 우리 인간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과 그분의 정신이 자라날 때, 우리는 옹색함에서 광활함으로,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사랑에서 아가페적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때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원수 사랑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에서 선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증오의 힘을 사랑의 힘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 이 세상에 악이 종식되지 않지만 악은 사랑에 의해 선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말이 쉽지 원수 사랑,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를 위한 목숨 건 기도요, 틈만나면 그를 하느님께 의탁하려는 노력입니다. 그의 인생 안에도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동행하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는 언제나 놀라운 기적과 변화가 뒤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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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거기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 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자녀는 부모를 믿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분명 가능하니까 시키는 것이고 불가능하더라도 도와주실 것이니까 시키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완전해지는 길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원수가 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분명 나는 그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못 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 등에 타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 그분은 성체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맡기지 않으면 내 안에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행자가 관광 중에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물속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댔습니다. 그러나 곧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이제 난 죽었구나!’ 하며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그를 세게 받쳐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이 물에 둥둥 떴습니다. 그가 빠진 바다는 사해였던 것입니다. 사해는 다른 물과 달리 염분과 다른 광물들이 많이 섞여 있어 물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누워 있기만 하면 둥둥 뜨게 됩니다.
우리 안의 예수님은 마치 사해와 같습니다. 사해에 있으면서도 빠져 죽을 걱정을 한다면 자신이 사해에 있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냥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기분을 상상해봅시다. 하느님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 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못 해도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진정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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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월7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5,43-48 :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에 대해서보다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이다.(루카 18,27참조) 스테파노가 수난 당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다.(사도 7,60 참조)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법으로 만들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렇게 하였다.(1코린 4,12-13 참조) 이러한 것을 볼 때, 이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이것은 원수에 대한 최고의 정점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하는 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 말씀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1,12 참조)는 말씀과 같은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자녀들은 아드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 불린 것을 표현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며 악을 피하고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의로움을 지니라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고 하신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써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가 아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이라는 선행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이런 사랑은 믿지 않는 이들과 죄인들 사이에서도 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인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삶을 청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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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상선벌악(賞善罰惡). 선한 이는 상을 받고 악한 이는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가톨릭의 네 가지 기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지니지 않은 이들에게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다른 모습도 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왜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시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기다림은 악인에게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닮으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따라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따라 완전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실천의 바탕이자 행동의 기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한편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겁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깊이 체험한 이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 사랑과 자비를 손수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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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모세는 하느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지침을 일일이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침을 살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세상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걸 밝힙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그 나라에 들어갈 자녀일 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세상의 것과 전혀 달라야 한다는 걸 일깨우신 까닭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세상이 하듯 세상의 수준을 벗어나 세상과 다른 차별화된 삶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임을 밝히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모세와 주님의 가르침은 서로 상통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가 됩니다. 세상처럼 살지 말고 세상과 차별화된 삶을 살으라는 뜻이니까요.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는 일들로 그분의 나라를 드러내는 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여 스스로를 구별하는 일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하느님의 자녀가 어떻게 다른지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나를 통해서 주님을 보여준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그분 나라를 알리는 간판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 새깁니다.
오늘 내가 행하는 일이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 나의 온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까닭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 천국을 보여주는 일이 나를 이 땅에보내신 하느님의 목적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사랑에도 순서를 정하고 용서에도 차별을 두고 희생 봉사도 값을 따지는 얄팍한 모습이라면 그분을 알리지 못합니다. 이는 주님의 모습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이 아니며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뜻을 위해서 쉼 없이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삶이 그분을 드러낼 수 있도록 쉼 없이 단도리 해야 하고 그분처럼 습관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기 위해서는 맹렬히 기도하여 의탁하는 일로만 가능합니다.
이 모자란 인간 안에 숨어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주려 하시는 그분을 기억한다면 몸짓 하나 눈빛 하나 손놀림 하나를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원칙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해야 하는 이유라 믿습니다. 창세 이후 면면히 이어져 전혀 변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뽑힌 우리들이 오직 기도로 힘을 얻고 오직 기도로 무장되어 오직 기도에 의탁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표지가 되기 원합니다.
온 땅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서게 되도록 꿋꿋이 이 자리에서 그분을 알리는 이정표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에 서 그분을 알리는 묵묵한 우리이기를 소원합니다. 내 삶으로 누군가를 그분께 인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할 바를 다한 것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가 알릴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그리고 부활로 인도하는 그분의 나라입니다. 이 모든 기적은 기도에서 비롯되고 기도로서만 가능합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기도함으로 생명을 알리는 주님 나라의 간판, 주님 나라로 이끄는 이정표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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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송열섭 가시미로 신부님]
<누가 원수인가>
원수란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히어 원한이 맺히게 한 사람을 말합니다. 원수에게 해를 주어 앙갚음 하는 것을 원수 갚는다고 하는데, 주님은 앙갚음을 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느날 TV에 노부부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할아버지에게 문제를 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천생연분’이라고 답하도록 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쉽다고 생각하고 할머니에게 “당신과 나 사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거침없이 “웬수” 하고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아니 두 글자 말고 네 글자” 하니까 할머니는 또 거침없이 “평생웬수” 하고 답을 했습니다.
‘원수’와 ‘웬수’는 느낌이 다르지만, 어떻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서로의 생각이 크게 다를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흔히 상처를 준 것은 기억 못하고, 상처받은 것은 오래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원한이 있는가’보다 ‘나는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가’를 종종 살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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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해 요한보스코 신부님]
<원수야, 놀자!>
“으이그, 원수 놈의 돈, 돈이 원수지 원수야!”
오늘도 김 주임은 신용카드 청구서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는 작년에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행히 건강이 좋아져 업무에 복귀했지만, 생활이 많이 어려운가 봅니다.
전업주부로 지내던 부인이 돈벌이를 하겠다고 공장에 취직한 후, 장시간 서서 일하다 보니 다리가 퉁퉁 부어서 밤마다 끙끙 앓는다고 합니다. 늘그막에 부인을 고생시키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김 주임에게 돈은 원수입니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술이 원수지예. 제가 진짜 오늘은 일찍 오려고 했는데 말입니더. 그놈의 웬수 같은 술 때문에….”
박 팀장은 오늘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굳게 결심합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 자제분이다.’
그러나 해가 지면 박 팀장은 개소리를 내면서 원수를 찾아 나섭니다.
“자식이 원수 아입니꺼. 품에 자식이라꼬, 낳아서 실컷 키웠더니마는 지 마누라밖에 모릅니더. 흐이그! 자식이 웬수야, 웬수!”
마리아 씨는 지난 명절에도 고향에 오지 않은 자식 원망을 합니다.
세상에는 원수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원수가 실은 가장 사랑하는 것이거나 사람 또는 가장 필요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상처 주는 이들은 대부분 내가 잘 아는 사람, 나와 함께 마음을 맞추어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의 원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 삶 속에서 함께하고, 어떤 형태든 나와 사랑을 나누던 이가 그 사랑을 배신할 때 원수가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뒤틀어진 관계, 어그러진 사랑을 복원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복원하는 시작은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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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회가 되어서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먼 타향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시는 어르신을 보면서 강론대신 ‘고향의 봄, 봄날은 간다.’를 불러드렸습니다. 어르신들을 보면서 한국의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봄날은 간다.’를 잘 부르셨습니다. 비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시지만, 가시고 싶은 곳을 마음껏 가실 수는 없으시지만 마음은 따뜻한 봄날, 생동감이 넘치는 봄날, 사랑이 싹트는 봄날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흥부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서 품을 팔았고, 매를 대신 맞았습니다. 그러나 흥부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처마 밑에서 날지 못하는 어린 새끼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놀부는 넓은 집에서 살고,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었지만 놀부의 마음은 봄날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어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흥부는 박을 타서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흥부는 그것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기에 흥부는 가난했어도, 부자가 되었어도 언제나 봄날이었습니다.
심청이는 어머니가 일찍 죽어서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했습니다. 눈이 먼 심봉사가 심청이의 먹을 것을 얻어 왔습니다. 어린 심청이는 아버지 대신 동냥을 했고, 바느질을 배워서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가난했지만 심청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공양미 삼백석에 바다에 몸을 던질 때도 심청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용왕의 도움으로 왕비가 되었어도 심청의 마음은 봄날이었습니다. 전국의 눈먼 이를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심청의 효성으로 아버지와 같이 왔던 맹인들이 모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심청은 가난했어도, 왕비가 되었어도 언제나 봄날이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또 다른 ‘봄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실천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듯이, 햇빛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듯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봄날’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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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차이>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차이>
선한 사람은 선하기에
악한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하기에
선한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선한 사람은 선하기에
악한 사람이 선하기를 기도하지만
악한 사람은 악하기에
선한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에
증오하는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에
증오하는 사람이 사랑하기를 기도하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기에
불의한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불의한 사람은 불의하기에
정의로운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롭기에
불의한 사람이 정의롭기를 기도하지만
불의한 사람은 불의하기에
정의로운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기에
거짓된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거짓된 사람은 거짓되기에
진실한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기에
거짓된 사람이 진실하기를 기도하지만
거짓된 사람은 거짓되기에
진실한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살리는 사람은 살리기에
죽이는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죽이는 사람은 죽이기에
살리는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살리는 사람은 살리기에
죽이는 사람이 살리기를 기도하지만
죽이는 사람은 죽이기에
살리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하느님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 따르기에
하느님 밀쳐낸 사람을 박해하지 못하지만
하느님 밀쳐낸 사람은 하느님 밀쳐내기에
하느님 따르는 사람을 박해할 뿐이다
하느님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 따르기에
하느님 밀쳐낸 사람이 하느님 따르기를 기도하지만
하느님 밀쳐낸 사람은 하느님 밀쳐내기에
하느님 따르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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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세상에 불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고통 속에 있는 각자의 인생이지만 언제나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유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행복은 될 수 없습니다. 돈은 쓰면 쓸수록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투자 혹은 노동과 같은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돈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되고 해친 건강으로 인해 벌어놓은 돈을 다시 쓰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아무리 가져도 더 많은 양을 원하게 되니 돈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며 유용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죽음 이후, 그 소유주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되는 것은 명예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나의 모습,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회적 위치라 할 수 있는데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하는 가치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부모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자녀의 좋은 학벌을 기대하고 이는 좋은 직업, 결혼까지 모두 연결됩니다. 하지만 이 명예 또한 일시적인 것일 뿐 지속성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는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좋은 학벌, 좋은 직업 모두 일시적인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또 다른 외부적 환경으로 인하여 무의미해지기 쉽습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좋은 학벌,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가정이 불행하거나 인성이 올바르지 않으면 명예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또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행복의 가치는 쾌락입니다. 맛있는 음식, 육체적 즐거움, 잘 먹고 잘 자는 것,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에 관한 쾌락을 인간은 모두 지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적인 쾌락에는 근원적인 만족이 없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강력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며 즐거움을 주지만 한순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부제 때, 가르멜 봉쇄 수녀원으로 성주간 실습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보통 사순시기 성주간에 신학생들은 출신 본당에 나가 전례 실습을 하는데 봉쇄 수녀원에도 부제들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따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며칠 머무는 동안, 언제나 침묵을 지키며 철창 안에 머무는 수녀님들의 모습이 저는 참으로 부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위하여 일정 공간에 “갇힌 채”로 지내지만 그것은 갇혀있는 것이 아닌 하느님 품 안에서의 “머뭄”이었습니다.
그러니 수녀님들의 표정에는 언제나 밝은 미소와 평화가 가득했습니다. 세상의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하느님 안에 머무니 더 이상 행복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부활 대축일 후에는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주어졌는데,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배꼽을 잡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진심으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렇게 실습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도대체 왜 수녀님들의 모습이 부러운 걸까, 왜 저토록 아름다워 보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답은 수녀님들이 일시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영원한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영원한 것”에 있습니다. 돈과 명예, 쾌락의 공통점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일시적인 행복이 때로는 활력을 주고 필요한 것이기에 아주 의미 없거나 좋지 않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이 “영원한 것”에 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영원한 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사랑에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분,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우리는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추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제와 같은 따뜻함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다소 어렵고 가혹하게 들립니다. 이것이 설사 행복을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인간의 현실로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지혜로우신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비교적 현실적인 대안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를 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누군가를 끌어안고 악수하고, 지난 앙금을 남김없이 털어내는 것만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한 기도, 즉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정신 차리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가 아닌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부족한 저를 굽어 살피소서. 그리고 그 사람이 오늘도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가 커다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혹은 부모님과 배우자를 위해 얼마든지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사랑을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사랑을 기반으로 한 원수를 위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일으켜 우리를 한결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영원이란 하느님의 본질이며 그것은 곧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을 때 사소한 것은 행복으로 치환됩니다. 식당에서 비싼 값을 치루고 먹는 만찬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소박한 밥상이 더욱 더 행복하고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에는 행복이 피어나고 그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이 바로 이 행복을 증언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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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그리스도인의 암호…>
어디 은행에 가니까 직원들만 볼 수 있도록 천장에 이런 암호가 있었습니다.
“백 배 이익은 1이 0이다.”
그 뜻은 “손님 100사람한테 잘해도 한사람한테 불친절하면 이제껏 쌓아 올렸던 공로가 다 땅에 떨어진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고운님들이 열심히 공로를 쌓다가도, 마귀의 장난(성질부리는 마귀, 욕 마귀, 험담하는 마귀, 게으름 마귀)에 한순간에 공로가 허물어지는 그런 때입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본당마다 미사 중단되어 있어서 신자분들이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고 대송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그 대송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은 고운님들의 심령 속으로 말씀의 씨를 뿌리러 들어가셨고, 잠시 후에 신령 성체로 고운님들의 마음속에 녹아내리는 순간에 기도의 능력이 생기고, 기도의 은혜가 생기게 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성 알폰소 마리아데 리구오리의 ‘신령 성체(영적 영성체) 기도문 *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께서 진실로 성체 안에 계심을 믿나이다. 세상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사랑하오며 주님의 성체를 영하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지금 주님의 성체를 영할 수 없다면 적어도 영적으로라도 제 안에 오소서. (잠시 침묵 가운데 주님과의 일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 주님, 성체를 모실 때처럼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려 하오니 영원히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원수와 박해자들에게도 감동을 주라.”
그래서 사랑하고자 할 때, 특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고자 할 때 우선 “기도”부터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큰 감동은 ‘용서’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붙잡고 있다면 지금 당장 건너뛰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감동을 주고 상대에게도 감동을 줍니다. 장애물 없는 길은 없습니다. 고통 없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장애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힘을 청하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로써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면 고통과 장애를 뛰어넘을 힘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고운님들이 기도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이 사실을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언젠가 본당에서 피정할 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이 생각하는 기도는 뭡니까?”
그때 저는 피정을 준비하면서 매일 기도 속에서 살았습니다.
“기도란? 처음엔 기도는 미움이 줄어들게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분노를 가라앉게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다시 보게 합니다. 주님의 눈으로…. 다음으로 기도는 이해하게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불쌍한 마음(예수님께서 바라보셨던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관심이 생기게 합니다. 다음 마지막으로 기도는 감동으로 사랑을 싹트게 합니다. 그리고 덤으로 기도는 그 사랑으로 용서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저 두레박 사제가 생각하는 기도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저 두레박 사제는 기도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사랑의 중심은 고운님들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오늘, 고운님들이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은혜로운 날이자 성령 충만한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가득한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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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9)
♧♧ 시편 77편 2절…
"내게 귀를 기울이시라고 나 소리 높여 하느님께. 나 소리 높여 하느님께 부르짖네."
* 나 소리 높여 하느님께 부르짖네.
‘부르짖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아크’라는 말은 ‘온 마음을 다해 통곡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삽은 현재 매우 절박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느님께 전적으로 매달려 기도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아삽의 태도는 곤경의 날에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는 진실한 신앙을 엿보게 합니다.(이사야서 58장 9절, 요한복음 15장 7절. 요한 1서 3장 22절. 참조)
* 내게 귀를 기울이시라고 나 소리 높여 하느님께.
이 구절은 시편 77편의 핵심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77편의 저자인 아삽이 커다란 신앙적 고민에 빠졌지만(8-10절. 참조), 하느님께 부르짖음으로써 자신의 고민이 반드시 풀릴 것임을 믿고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서 33장 3절. 참조)
♧♧ 시편 77편 3절…
"곤경의 날에 내가 주님을 찾네. 밤에도 내 손을 벌리지만 지칠 줄 모르고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 곤경의 날에 내가 주님을 찾네.
‘주님을 찾네.’라는 말은 하느님께 기도로 의지했다는 뜻입니다.(창세기 35장 3절. 시편 86편 7절. 참조) 한편 여기서 말하는 ‘곤경’이 개인적인 것인지, 민족적인 것인지 또한 육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곤경이 아삽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준 것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아삽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오로지 하느님을 찾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 밤에도 내 손을 벌리지만 지칠 줄 모르고...
이 구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드’라는 말을 ‘상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고, ‘벌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가르’를 ‘상처가 쑤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밤에는 내 상처가 찌르고 쑤시다.’라고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둘째, ‘손을 벌리다'라는 말을 ‘기도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탈출기 9장 29절. 참조) 아삽의 계속적인 기도의 모습을 뜻한다는 견해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중에 두 번째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손을 들고서 하느님께 기도함은 기도 응답의 간절한 염원을 표하는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기도 자세이기 때문입니다.(탈출기 17장 12절. 시편 63편 7절, 143편 6절. 이사야서 26장 9절. 참조) 한편, 여기서 말하는 ‘밤’은 실제적인 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삽의 심경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삽은 이 같은 상황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이 구절은... 요셉을 잃은 야곱과 자식이 없어 통곡하는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했던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창세기 37장 35절. 예레미야서 31장 15절. 참조) 아삽은 아마도 극한 슬픔 속에 빠져 인간의 어떠한 말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에서도 아삽이 하느님께 부르짖었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위로를 애타게 갈구하는 아삽의 애타는 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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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목수는 목수 일을 하면서 목수가 된다.”라는 라틴어 속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오늘부터 나는 목수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훌륭한 목수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목수 일을 묵묵히 해나가면서 진짜 목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속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결혼만 하면 성가정을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정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진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사제도 그렇습니다. 단순히 사제서품을 받는다고 완벽한 사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제 일을 철저히 해나가면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만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서 훌륭한 그리스도인,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갈 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나눠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시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진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냐면서, 이 말씀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원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옳은 진리의 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나의 원수에게 육신의 해를 끼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다가선다면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겉과 안 모두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해서 사랑을 실천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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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체험>
올 초에 3년 동안 함께 사목했던 신부가 본당신부로 발령을 받아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를 채워줄 다른 신부가 오지 않기에, 두 신부가 나눠서 하던 것을 저 혼자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야 벌써 두 달이나 지나서 익숙해졌지만, 인사이동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되더군요. 우연히 중국속담을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곧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적의 체험은 자신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지에서 둘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고, 이제 혼자서 성지를 꾸려나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모든 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도 기적의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설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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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젊음>
-젊음은 나이가 아닌 사랑-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커갈수록 마음은, 정신은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85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매일의 삶이나 강론을 대하면 전혀 노인이라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젊음의 청춘같습니다. 바로 사랑이 그 답임을 깨닫습니다. 얼마전 받은 사랑 가득 담긴 메시지에 용기 백배했습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 얘기네요. 신부님! 제 눈에는 언제나 젊으신 신부님이시지만 나이가 있으시니 영양섭취도 수면량도 충분하게 하셔야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할 때 무리가 없으세요오.”-
누구나 원하는 바 젊음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 몸은 늙어도 마음은 사랑으로 영원한 젊음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 젊음의 비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배움에 대한 사랑도 날로 커집니다. 특히 사랑에 대한 배움입니다. 배워도 배워도 끝없는 평생 공부가 사랑입니다. 하여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언젠가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삶, 영원한 젊음의 비결입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주 우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모두의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된다는 참으로 고무적인 말씀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항구히 실천할 때 거룩한 사람이 되고 영원한 젊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구체적 사랑 실천에 대해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더 이상 무슨 군더더기 설명이 주석이 필요하겠습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하느님을 닮아 사랑을 실천해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원수나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보복의 악순환을 단斷, 끊어버리고 오히려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엊그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저명한 문학평론가의 글입니다. 바로 오늘 이어지는 복음 말씀에 감격한 비신자의 고백입니다.
-“나같은 필부조차도 숨막히게 되뇌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47).
그러므로 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를 제 삶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포근한 정신적 복지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세속적 정신은 가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실존의 의미를 추구追求한다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이타적인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기복祈福과 반공反共을 부르짖는 기독교란 그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다.
자부심 넘치는 합리주의자들은 ‘최악의 기독교’를 과녁 삼아 조롱 섞인 논박을 퍼붓고 그런 자신에게 도취되고는 하지만, 나는 이와같은 ‘최상의 기독교’ 앞에서 내가 신앙을 갖는 데에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한다. 주변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신앙인들을 경외敬畏하면서 말이다.”-<경향3.4일자, 신형철>
참으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영원한 젊음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룩한 삶, 완전한 삶, 둥근 삶,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할 사랑공부에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역시 어제 일간신문에서 읽은 젊은 작가의 글도 길다 싶지만 인용합니다.
-“사실 나는 바오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울에서 바울이 되는 격정의 삶은 전향자들이 쉽게 과격한 근본주의자가 되는 과정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린도 전서 13장 11-13절까지의 말씀, 특히 12절의 이야기는 매번 가슴을 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뿌옇게 서리가 낀 것처럼 투명하지 않고 확고한 단 하나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내게는 천금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가장 힘들 때마다 저 말은 나를 구했다. 당신이 나처럼 종교가 없든, 혹은 비기독교인이든 관계없이 저 12절의 말씀으로부터 바로 이어지는 문장을 함께 나누면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그런즉 믿음, 희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한겨레3.5;하지웅>
인생은 말 그대로 사랑의 학교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할 사랑의 학교에 ‘주님의 학인, 사랑의 학인’인 우리의 신원입니다. 인생은 영적전쟁터이기도 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원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학인이자 사랑의 전사인 우리 모두에게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로서 항구히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119,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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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약이다>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 또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 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 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참된 정의의 실현을 수반합니다.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양심을 지니게끔 도와주는 용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선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도 서로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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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다른 존재들에게 어떻게 연장되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이 언급됩니다.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신명 26,17)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였다."(신명 26,18)
서로 마주 선 두 존재가 각각 선언을 통해 이처럼 계약을 체결합니다.
"주님께서 너희 하느님이 되시고"(신명 26,17)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신명 26,18)
이것이 바로 계약의 골자입니다. 이 계약을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서로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발생하지요. 그 세부 규정들이 신명기 전반을 채우고 있습니다.
복음 속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따라야 하는 율법 규정의 한계를 넓혀 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고 네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마태 5,4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분명 율법에 등장합니다(레위 19,18 참조). 하지만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씀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살인 등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복수가 동태복수법의 형태로 공동체 안에 존재함을 묵인 내지 인정하는 정도지요.
그래도 선량하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은 십분 양보해서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정도의 아량과 선의를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그것만도 큰 희생과 포기가 따르는 자기 비움의 수행일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보복과 복수가 공동체와 자기를 보호하는 미덕인 문화 속에서, 자기애와 일차적 감정에 충실한 우리 인간에게 실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니까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 자기 형제들에게만"
그런데 하느님은 "~에게나" 방식으로 존재를 대하시고, 사람은 "~에게만" 방식으로 존재를 대합니다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 사이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에게나" 방식은 포용적인 반면, "~에게만" 방식은 선택적이고 차별적입니다. "~에게나" 방식의 접근에는 제외되는 대상이 없지만, "~에게만" 방식은 구별부터 하고 봅니다. 주체의 호의와 적대감에 따라 대상의 그룹이 선명히 나뉘지요. "~에게나" 방식은 상대를 고려하는 반면, "~에게만" 방식은 자기 중심이기에 그렇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거룩함"이 이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완전함"을 입습니다. 이 둘은 별개의 특성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의 '아버지다움'입니다.
물론 여기서 완전함은 모든 면에 철두철미한 완벽함과는 다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인간 존재에게 완벽함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공동체적으로 보면 무용하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시각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관상하고 연민하는, 아버지의 자녀다운 품성이 "완전함"이고 또 "거룩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완전함입니다. 그리고 이 완전함이야말로 거룩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모두는 이 거룩한 완전함의 수혜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 중에 있을 때라도 해가 우리를 비껴가지 않았고 비도 우리를 건너뛴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버지 사랑에서 제외된 적이 없는 우리가 좁고 편협한 시각 밖으로 감히 누구를 밀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더 배우고 획득하고 익힌들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의 완전함이 지식이나 능력, 기술, 겉모습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버지 자녀다운 완전함은 가진 바를 나누고 가난을 선택하며, 경계를 허물고 미움을 내려 놓고 차별을 그치는 비움으로만 채울 수 있는 역설적 신비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영역에서 제외 목록이 적으면 적을수록 완전함에 더 가까이 가는 것 아닐까요? 아버지의 완전함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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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
<미움으로 자신을 고립시킨다>
원수에 대한 미움은 친구사이의 사랑으로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원수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분의 자비심에 그가 흔들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 원수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미움은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 괴물입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건전한 생각의 아름다움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모세 율법은 원수에게 신체적 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원수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여러분은 그의 육체에 대해서보다 여러분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힙니다.
여러분이 원수를 미워하더라도 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
이 여러분 자신을 휘저어 놓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원수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자보다 여러분 자신을 살린 것입니다. 그에게 친절올 베푼다면, 그자보다 여러분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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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통과 십자자의 가치와 의미(사순시기에 묵상해 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예수님을 따르름(追從)에 요구되는 두 조건은 ‘자기부정, 自我否定’과 ‘십자가 수락十字架 受諾’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아自我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추종 追從에 역행하는 자아인 ‘거짓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참 자아를 온전히 실현實現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라” 고 명하신 것은 장자가 “자아를 버린다”(吾喪我) 한 것과 같은 뜻이다.(莊子, 齊物論)
♣自我 否定은 주님을 따르는 데 역행하는 自我, 거짓 자아를 버림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참 자아를 발견하고 <참 자아>를 온전히 실현할 때 비로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과 주님 제자로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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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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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도 계속해서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에는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니라,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또 오늘, 대체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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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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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나는 어떤가>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것이 무엇이겠느냐?"
완전한 사람이 되기위해
사랑과 용서는 필수입니다.
주님을 따라사는 사람의 모습이
주위 사람과 별반 다를바 없고 그 보다 못한
태도로 산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순수지향으로 움직일때 전율이 일어나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더 잘 살도록
소리없는 부추김이 됩니다.
적어도 피해주지 않는 삶은 누구나 합니다.
'적어도 신자라면~' 하는 바램이 올라온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살펴봅시다.
"남보다 잘하는 것은 빼지말고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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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랑은
완전합니다.
완전하신
아버지를 향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아름답게
또 완전케 합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온전해지고
우리가 모든 걸
맡기면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완전함이란
우리의 가난함과
약함 결핍까지도
아우르는 사랑의
그 완전함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줍니다.
완전함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사랑의 놀라운
힘은 완전합니다.
아버지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우리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진심어린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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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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