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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의 보고 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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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재의 보고 안동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은 옛부터 전통과 학문을 중시하여 수많은 유적과 큰 인물을 배출한 한국최고의 명문도시이다.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하여 서애 류성용 등 수많은 명현의 고장 안동이어서 충효사상이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또한 지정문화재도 전국최다인 곳이 안동이다. 전국 거의 모든 곳이 단 몇개의 문화재만 보유하고 있지만 안동은 무려 300 여개 가까운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안동은 가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란 말이 딱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안동은 국보 4점, 보물 34점, 사적 2점, 천연기념물 7점, 중요무형문화재 2점, 민속자료 25점,경북기념물 17점, 경북무형문화재 5점, 경북유형문화재 64점, 경북민속자료 45점, 경북문화재자료 74점, 등록문화재 1점 등 정말로 안동은 통째 박물관이라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몇 곳을 소개한다.
1.봉정사 극락전
종 목 국보 제1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시 대 고려시대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는 고려시대의 건물로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 목 국보 제1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법흥동 8-1 시 대 통일신라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이 탑은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종 목 국보 제121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시 대 고려시대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과 그 이웃인 병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이 밖에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병산탈로는 2개가 남아 있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김해 허씨가 살았고, 광주 안씨 집안이 들어온 후, 풍산 류씨가 조선 전기에 살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대체로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종 목 보물 제18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법흥동 20 시 대 조선시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임청각 서쪽에 있는 본채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총 50칸이 넘는 큰 규모의 집이다.
종 목 보물 제2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시 대; 조선시대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종 목 보물 제30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 대 조선시대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종 목 보물 제30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24 시 대 조선시대
입암 류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류중영은 류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1687∼1761)의 아호에서 따 온 것이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종 목 보물 제414호 지 정 일 1964.11.14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56 시 대 조선시대
류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9.안동 의성김씨 종택
종 목 보물 제450호 지 정 일 1967.06.23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 시 대 조선시대
김성일(1538∼1593) 선생이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고 형태는 一자 형이다.
건물은 간략한 양식으로 지었지만 보기드문 주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민가 건축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종 목 보물 제553호 지 정 일 1971.08.3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하리 1리 189 시 대 조선시대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이 집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하고 변형도 되었으나 나직한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풍산평야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상류주택과는 달리 소박하고 서민적인 민가 성격이 강하다.
종 목 사적 제170호 지 정 일 1969.05.28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시 대 조선시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종 목 사적 제260호 지 정 일 1978.03.3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시 대 조선시대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류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62년에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13.만운동 모선루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80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881-2 시 대 조선시대
선생의 인품과 깨끗하던 지조를 기려서 재사에 ‘모선루’란 현판을 달았다.
마을 골 안으로 접어드는 길목의 오른쪽 높은 곳에 누마루를 앞면으로 하고 있으며, 건물 아래쪽에는 개울이 흐르고 뒷쪽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 대 조선시대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류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김해 허씨, 광주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 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76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419 시 대 조선시대
0여 호 되는 작은 마을 북쪽에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권보는 일생동안 검소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본채의 사랑채 지붕을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한 것도 그의 소박함을 기리기 위함이다.
안채와 사랑채, 중문간채와 별당채 그리고 대문간채가 두루 갖추어진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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