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 더위가 유난하게 느껴지는 하루다. 게으름에 미뤄놨던 몇 가지 일처리를 끝내고 과천으로 자리를 옮긴다. 작년에 이어 다시 시작한 오체투지가 벌써 100일을 넘겼다. 오늘이 101일째, 몸 성한 곳 없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찾아가는 발길이 무겁다. 우선순위에 밀려 있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세 분의 성직자가 고행을 시작했다. 티벳의 순례자들이 성지를 향해 가는 수행의 하나인 오체투지의 길을 나선 것이다. 지리산에서 시작해서 계룡산으로, 다시 계룡산에서 벌써 서울의 문턱에 다다랐다. 지난 번 고속도로로 달려가며 이 먼 곳을 언제 올라오시나 했던 것이 겨우 20여일 전, 기어서 그 거리를 올라왔다. 생각만 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만나서는 웃지만 그분들을 보는 마음은 그렇게 안타깝고 죄송하다. 그래서 씁쓸하다.
이 시대에 성직자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선지자적 목소리를 드러내는 성직자가 없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수도사적, 제사장적 성직자도 쉬이 만날 수가 없다. 세상에 난교가 판을 치는 것, 옳은 종교적 역할을 감당하는 정교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만나고 세상을 짝하고,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그 권력의 맛에 놀아나는 종교지도자가 드러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기도하는 성직자들, 길 위에서 기도하는 성직자들이 그들이다. 수경, 문규현, 전종훈, 세 분의 땅 위의 기도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땅을 기고 땅 냄새를 맡고 땅으로 낮아지고 마지막 인간의 분해 물질 땅과 벗하며, 기도하는 중에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 그렇게 나를 수양하는 중에 얻어지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를 붙들고 싶어 한다. 세 분은 그렇게 자신을 바꾼다. 이게 수도사적 성직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을 향해 옳은 소리를 쏟아내는 선지자적 목소리가 필요하다. 교회가 권력을 탐하고 사찰이 권력에 맹복하며, 종교가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선지자이다. 이 목소리는 함께 함을 통해 얻어진다. 기도를 통해 얻는 것은 삶이다. 삶이 변하지 않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다. 한 번 함께 길을 걸어보자고 말이다. 함께 길을 기어보자고 말이다. 그렇게 얻은 소리는 삶으로 외침이 된다. 필요한 자리에 정정당당하게 설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 약 3.5km를 기는 동안 많은 땀을 흘렀다. 수경 스님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무릎을, 그 통증을 얼음찜질로 겨우 이겨나간다. 전종훈 신부님은 손목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얼음찜질 대열에 합류했다. 다행히도 문규현 신부님은 잘 버티고 계신다. 연세도 가장 많으신 분이라 그렇게 버텨주시는 게 한없이 고맙다.
(순례단의 깃발과 서울로 향하는 교통표지 )
오체투지순례단 깃발 옆으로 과천 사당 표지가 보인다. 14, 15일 과천을 거쳐 16일 남태령을 넘어 서울로 들어간다. 출발지에서 시작하여 약 300km에 이르는 거리이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길, 너무 가팔라 먹은 것이 거꾸로 올라오는 고통 때문에 굶으며 시작한 걸음이 벌써 100일 300km를 넘어섰다. 추워서 앉아 쉴 수조차 없었던 시간, 더위로 온 몸의 땀을 짜내면서 기어온 길들, 쏟아지는 빗줄기가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웠던 날들, 이런 날들이 모여 100일이 되고 300km가 되었다. 참 징한 분들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인덕원사거리 출발선에 섰다. 이 선이 묘한 감상을 일으킨다. 출발선인지 정지선인지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혼자 상상하는 중에 선을 넘어섰다. 그렇게 걷고 긴다. 그들은 기도하고 있지만 내게는 소리가 들린다. 때로는 잔잔한 기도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선동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분명한 사실, 그들은 내게 세상을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분명히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부끄러운 사람들에겐 꾸짖음이다.
순례가 끝나고 이동하는 버스 안이다. 이곳이 세 분의 잠자리이기도 하다. 오늘 밤도 성당주차장의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게 될 것이다. 때론 차갑고 때론 뜨거운 때론 젖은 길 위를 걷는 것, 초라한 잠자리를 굳이 고집하는 것, 그분들의 선택과 고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 종교지도자와 식자들에겐 준엄한 꾸짖음을 주는 것이 아닐까? 민초들에겐 일어나 함께 가자고 외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괜찮다. 내가 하지 못할 때 길을 나선 분들이 고맙다. 그분들을 생각할 때 맺히는 안구의 이슬은 이미 그분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말이다. 5월 16일, 서울로 넘어오는 길에 많은 분들이 세 분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