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반 일리치의 죽음』
1) 죽음의 의식(Consciousness of Death)
「세 죽음」과 『카자크 사람들』에 등장하는 자연 및 ‘자연화된’ 사람들이 문명화된 삶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의식’(정신, 영혼)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순리, 조화 같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인간적인 선택, 의식, 추구, 노력이 합쳐지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톨스토이는 『인생론』, 『인생의 길』 등 일련의 교훈적이고 사상적인 저술에서 ‘이성적인 의식’의 개념을 강조한다. 그에게 의식이란 선을 향한 추구, 각성, 도덕, 윤리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의식은 톨스토이가 가까스로 도달한 일종의 결론,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문명과 자연의 대립에서 그가 도달한 하나의 결론이다.
톨스토이가 1886년에 발표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 잠정적 결론을 보여주는 중편이다. 「세 죽음」에서처럼 여기서도 상류층에 속한 주인공의 질병과 죽음이 주된 사건이며 여기서도 문명화된 삶과 자연에 가까운 삶은 대립한다. 그러나 「세 죽음」과는 달리 이 작품은 자연의 죽음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또 『카자크 사람들』에서처럼 여기서도 문명화된 삶에 내포된 거짓을 의식한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서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올레닌이 막연하게, 거의 낭만적으로 추구한 도덕이 여기서는 죽어가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의 문명화된 삶에 대립하는 것은 ‘자연에 가까운 삶’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자연, 혹은 자연과 가까운 생활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내면에 있는 선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톨스토이의 답은 ‘죽음의 의식’이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내면의 선을 회복한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삶의 본질이 아닌 것들로부터 눈길을 돌릴 수 있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 『인생의 길』에서 톨스토이는 여러 차례 “죽음을 의식하는 삶”과 선한 삶의 인과 관계를 강조한다.
선행으로 일관된 삶을 살고 싶다면 얼마 안 가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을 되도록 자주 떠올려야 한다.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상하기만 해도 교활한 행동도, 속임수도, 거짓말도 비난도 욕설도 증오도 강탈도 할 수 없을 것이다. (ÿÿ) 죽음보다도, 죽음이 모든 사람을 찾아온다는 사실보다도 확실한 것은 없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오직 하나이다. 바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톨스토이 2017: 430)
문명화된 삶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의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고 그 이유에서 선을 회복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만년의 톨스토이에게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초기와는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이제 자연은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계라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 본성, 순리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 된다.
2) 우리 모두인 이반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이름에서부터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반’이란 이름은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서방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반은 어느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처럼 유한한 인간 일반이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것도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 해석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평생 동안 자기를 사로잡아온 죽음의 문제를 이제 가장 보편적인 차원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반은 유복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판사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너무나도 순탄하게 잘 살아왔지만 45세경에 불치병에 걸린다. 불치병에 걸린 시점부터 몇 달 동안 그는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일생을 반추한다. 결국 임종의 순간에 그는 깨달음을 얻고 저세상으로 간다. 스토리 자체만으로 보면 대단히 단순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 스토리는 구성의 측면에서 볼 때 상당히 복잡하고 흥미롭다. 소설은 이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신문에 이반 일리치의 부고가 실리고 유가족은 추모식을 준비하며 법원 동료들은 문상을 간다. 타인의 시각에서 이반의 죽음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이반의 삶이 묘사된다. 화자에 의해 전기적 사실 위주로 그의 일생이 묘사되다가 그가 중병에 걸린 시점부터는 그의 시각에서 반추가 이루어진다. 이반이 자신의 눈으로 돌이켜보는 그의 인생, 타인과의 관계, 삶과 죽음의 문제가 그려지다가 마지막에는 이반의 임종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구성적으로 볼 때 소설은 ‘죽음—삶—죽음’의 구도를 갖는다.
이러한 3중 구도는 겉으로 드러난 삶과 내면의 삶이라고 하는 삶의 이중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의도를 보여주는 데 매우 효율적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반은 잘 살다가 점점 죽음을 향해서 하향 곡선을 그리면서 나아간 것처럼 여겨진다. 즉, 삶에서 죽음으로 내리막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반이 성찰을 시작하면서, 즉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남은 시간은 죽음으로부터 삶을 향해 올라가는 상향 곡선을 그리게 된다. 이반이 살았던 그 삶, 남 보기에는 좋았던 삶, 순탄하고 괜찮았던 그 삶이 사실은 죽음같이 끔찍한 삶,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삶이었다. 이반의 성찰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이반은 그 죽음에서 삶을 향해 나아간다. 생물학적으로는 생명체가 죽음을 향해 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생명의 주체가 죽음에서 벗어나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소설 구성의 본질이다.
3) 자리와 액수
제2장의 서두에서 화자는 이반의 삶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Прошедшая история жизни Ивана Ильича была самая простая и обыкновенная и самая ужасная.”
“이반 일리치의 지나간 삶은 대단히 단순하고 평범했고 그래서 대단히 끔찍했다.” (Ⅲ: 119)
이 문장은 진정 명문장이다. 이 한 문장에 이 소설의 모든 것,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러시아어의 접속사 “i”는 “그리고”, “그래서”, 등 다양한 뜻을 가진다. 이 문장에서는 앞뒤의 인과 관계를 강조하는 “그래서”로 읽힌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대단히 단순하고 순탄하고 평범했다, ‘그러나’ 끔찍했다가 아니라 ‘그래서’ 끔찍했다, 이것이 핵심이다. 단순하고 순탄한 것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끔찍한 것이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단순하고 평범하고 순탄하고 유복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그 삶은 사실상 엄청나게 끔찍한 것이었다라는 역설에 소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이 역설의 의미가 밝혀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반은 평범한 인간, 우리 모두이다. 그의 삶은 교양 있고 유복하고 행복한 삶, 한마디로 ‘문명화된 삶’이었다. 문명화된 세계에서 이반의 삶과 죽음은 근본적으로 자리와 액수로 설명된다. 이반 자체, 살아 있는 인간,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이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반의 사망이 알려지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설명하는 제1장에서 “자리”(mesto)라는 단어는 도저히 가볍게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여러 번 언급된다.
이반 일리치는 방 안에 모인 신사들의 동료였고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는 벌써 몇 주째 와병 중이었는데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고 했다. 그의 자리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가 사망할 경우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를 승계하고 알렉세예프의 자리는 빈니코프나 슈타벨이 승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집무실에 모인 신사들의 머리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 또는 자신이 아는 이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었다. (Ⅲ: 106)
‘자리’는 특정 액수의 돈과 함께 언급된다.
‘이제 슈타벨이나 빈니코프의 자리는 아마 내 차지가 되겠지. 이미 오래전에 내정된 거니까. 이 승진은 내게 근사한 집무실 외에도 연간 800루블의 수입 증가를 가져다줄 거야’ 표도르 바실리예비치가 생각했다. (Ⅲ: 106)
대학 졸업 후 약 20여 년간의 이반 일리치의 삶도 역시 일련의 자리로 설명된다. 그는 법대를 졸업한 후 지방 모처에서 ‘자리’를 얻었고 몇 년 후에는 예심판사의 ‘자리’ 제안을 받았고 새로운 ‘자리’로 이동했으며 또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자 더 좋은 ‘자리’를 기대했으며 자신이 기대했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자 좌절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목표는 5000루블의 수입이 보장되는 자리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리를 남기고 다른 자리로 떠나자 다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결국 그 덕분에 이반 일리치는 법무부에서 확실한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5000루블의 봉급에 3000루블의 이사비까지 받게 되었다. 이 유리한 자리의 획득이 그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그는 훌륭한 저택(생활의 자리)으로 이사했고 권태기에 들어갔던 아내와의 관계도 회복했다.
이렇게 자리에 의해 존재감이 증명되는 이반은 죽어서도 자리로 그 가치가 입증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동묘지에 있는 자리’(mesto v kladbishche), 즉 묏자리로 가야 하고 그 자리 역시 액수로 결정된다. 미망인이 문상 온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에서 집사인 소콜로프가 묏자리에 관해 보고한다.
소콜로프는 미망인이 점찍은 묏자리는 200루블이 든다고 보고했다. 미망인은 울음을 그치고 희생하는 표정으로 표트르 이바노비치를 힐끗 본 후 자신의 처지가 매우 어렵다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ÿÿ) 그녀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하고는 소콜로프와 묏자리 가격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표트르 이바노비치의 귀에 미망인이 묏자리와 가격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물어보다가 결국 알맞은 가격의 자리로 결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Ⅲ:114)
한 인간이 세상에 나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와 관련된 중요한 것, 남은 것이라고는 액수로 평가되는 ‘자리’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톨스토이가 ‘고발’하는 것은 생명에 대해, 삶의 존엄에 대해 자리가 갖는 그 상대성이다. 자리와 액수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간의 가치라 생각해온 사랑, 우정, 공감, 연민을 밟고 들어서서 그 자체가 가치가 되어버린다. 이게 톨스토이가 생각한 문명화된 삶의 정체성이다.
4)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Ⅱ
앞에서 「세 죽음」을 설명할 때도 지적했듯이 톨스토이에게 삶의 모든 문제와 모순과 부도덕은 죽음의 회피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죽음을 의식할 때만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해지고 세계를 존재하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 무한 앞에서의 겸손이 삶의 다채로운 미와 풍요와 의의를 드러내주듯이 죽음의 의식은 삶의 의의를 드러내준다(Wasiolek 1978: 176). 죽음의 의식을 회피한다면, 즉 오로지 필멸에 대한 자각만이 제기할 수 있는 삶의 도덕적이고 영성적인 문제들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코 삶의 의미를 알 수 없다(Jackson 1997: 13).
문명화된 삶은 죽음을 거부한다. 최고의 안락함, 편안함을 확보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는 사회에는 고통, 그리고 고통의 정점인 죽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모든 가치가 전도된다. 죽음의 의식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며 모든 결속의 모델이다(Wasiolek 1978: 179). 즉 죽음의 의식을 공유할 수 없을 때, 죽음을 끝까지 회피하고 거부할 때, 결속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려 할 때 진정한 소통도, 사랑도, 연민도, 인간적인 접촉도 불가능하다. 아니 관계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반 일리치가 겪는 고통은 바로 거기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반의 병과 관련하여 그 누구도 고통과 죽음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은 금지된 단어다. 이반이 자신의 병이 어느 정도 위중한가를 묻자 의사는 답을 회피한다. 생사의 문제는 그에게 부적절한 질문이다. “의사는 이 부적절한 질문을 무시했다.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건 논의할 가치도 없었다. 의사는 이반 일리치의 목숨에 관한 질문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신하수증과 맹장염 중 어느 것인지 밝히는 문제에만 매달렸다”(Ⅲ: 145).
죽음의 회피는 가족과 동료들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반 일리치가 병에 걸린 이후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연민의 부재였다. “거짓 이외에, 아니면 거짓의 결과로 인해, 이반 일리치가 가장 심한 고통을 느꼈던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처럼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Ⅲ:172).
죽음의 의식을 거부하는 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들은 그의 고통을 알고 싶지도 않고 그의 고통에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가급적 고통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다. 문명이 가르치는 것은 사회적인 규범, 예절, 개인의 이익 등, 모두 표면적인 것들이다(Pachmus 1961: 75). 그것을 학습하고 난 뒤 인간이 자신의 동료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예절뿐이다. 그의 가족과 동료들은 그에게 위장된 연민과 동정과 사랑, 그리고 예의 바른 관심만을 보인다. 그들은 그의 고통을 무시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든다’(trivialize). 그리고 그것마저 잘 안되자 그를 비난한다(Wasiolek 1978: 174). 그가 약을 잘 안 먹어서, 잘 안 쉬어서, 의사의 말을 잘 안 들어서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의 고통이나 죽음과 상관없이 살고 싶어 한다. 그의 고통과 죽음이 자기들의 삶으로 침범해 들어오자 그들은 분노하고 그를 미워한다. “까다로운 남편 탓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확신하자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남편이 미워졌다”(Ⅲ: 144). 딸도 자신의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는 아빠가 밉다. “아빠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세요?”(Ⅲ: 193). 이반은 이반대로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가족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이반의 가족은 증오로 똘똘 뭉친, 증오의 연대를 결성한다.
톨스토이는 소외도 죽음의 문제와 연관된다고 본다. 죽음을 회피할 때 개인은 흩어진다. 공감도 연민도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개인은 각자 자신만의 삶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반이 병에 들린 후 가장 힘들게 느꼈던 것도 고독이다. “등받이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소파에 누워 보낸 최근의 고독했던 시간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지인들과 가족들 가운데서 느꼈던 고독, 깊은 바닷속 바닥은 물론 땅속 깊은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절대 고독, 이렇게 처절한 고독을 이반 일리치는 최근에 오로지 과거에 대한 상념들에 의지하며 이겨냈다”(Ⅲ: 190). 이렇게 모든 사람이 증오와 소외의 거대한 순환 고리 속에 갇혀 버둥거린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반의 병으로 인해 새로 생겨난 관계가 아니다. 이반의 병을 계기로 그들 간의 억눌렸던 진짜 관계가 위선의 수면 위로 솟아오른 것이다.
5) 죽음의 직시
이반을 고통스럽게 하는 주변 사람들의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태도는 사실상 모두 이반이 그동안 타인들에게 취해왔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이반은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남아 있는 시간을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또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는 키제베터의 논리학에서 배운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카이사르도 죽는다’는 유명한 삼단논법은 카이사르에게나 적용되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Ⅲ: 161).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차단해주던 예전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은폐하며 파괴하던 예전의 그 모든 게 이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반의 눈에 그것들은 부질없고 추악한 것으로 비춰진다. “최종 결과가 지금의 자기 자신인 회상이 시작되자 당시 기쁨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이제 그의 눈앞에서 녹아내려 부질없는 것으로 그리고 종종 추한 것으로 변했다”(Ⅲ: 187). 이것들은 죽음을 덮어주고, 죽음의 공포를 가리고, 죽음의 의식을 지연시키는 진통제에 불과했기 때문에 죽음의 의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 거짓 기쁨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동료들이 느끼는 모종의 기쁨에서 복제된다. 동료들은 이반이 살아생전에 그러했듯이 자리 이동과 승진에 대한 생각으로 기뻐한다. 동료들은 또한 이반 일리치가 살아생전에 그러했듯이 빨리 문상을 끝내고 식사를 하고 브리지 게임을 할 생각으로 기뻐한다. 그들의 기쁨을 톨스토이는 이렇게 기술한다.
동료의 죽음이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자리 이동이나 직위 변경에 대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비록 친한 동료가 죽었지만 막상 사망 소식을 접하자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자기가 아니라 그가 죽은 데 대해 ‘기쁨의 느낌’(чувство радости, sense of joy)을 경험했다. (Ⅲ: 107)
이 기쁨은 생의 기쁨이 아니다. 운 좋게, 가까스로, 죽음을 피해간 것에 대한 기쁨,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서 오는 기쁨이다. 잭슨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생을 향한 자유가 아닌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축하하는 것”이다(Jackson 1997: 16). 그래서 그것은 심지어 기쁨조차도 아니고 그냥 ‘기쁨의 느낌’인 것이다. 병이 깊어지면서 그동안 기쁨의 느낌을 가능하게 해주던 모든 것들이 작동을 멈추자 그는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그는 똑바로 누워 자신의 인생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집사, 이어서 아내, 이어서 딸, 그리고 의사를 보았을 때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그들의 말 하나하나는 그에게 간밤에 모습을 드러낸 끔찍한 진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 자신의 삶이 지향하던 모든 것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기만이라는 걸 똑똑히 보았다. 이 깨달음은 자꾸만 커져갔고 육체적인 고통을 열 배로 가중시켰다. (Ⅲ: 195)
그토록 평탄하고 순조로웠던 그의 일생이 왜 그토록 끔찍한 삶이었는가가 비로소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거대한 기만이었다. 자신의 삶도 기만이었고 타인의 삶도 기만이었다. 그들은 모두 공범자들이었다. 이반은 절규한다. “이게 아니야, 네가 살아오면서 추구한 것은 죄다 거짓이고 사기야. 그게 네 눈을 가려 삶과 죽음을 못 보게 한 거야”(Ⅲ: 197).
7) 필멸에 대한 공감
이 거짓된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은 하인 게라심이다. 그는 이반의 배설물을 버리기 위해 간병인 자격으로 투입된 인물로 깨끗하게 옷을 입은 건강하고 활기차고 명랑한 농부다. 게라심은 두 가지 점에서 문명화된 삶의 대척점에 서 있다. 첫째, 그는 이반의 동료들이 경험하는 죽음을 모면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을 만끽한다. 그것은 자리와 멋진 집과 맛있는 음식과 브리지 게임과 허영심의 충족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살아 있음에서 오는 기쁨이다. 소설 전체를 통해 유일하게 그는 진짜 기쁨, ‘찬란한 생명의 기쁨’을 향유한다. “싱싱하고 선하며 순박하고 젊은” 그는 환자에게 모욕을 줄까 봐 그 기쁨을 애써 억누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반 일리치는 다른 건강한 사람들—동료, 아내 등등—을 보면서 느꼈던 분노와 증오와 슬픔과 모욕감을 느끼는 대신 게라심의 건강, 힘, 활력을 보면서는 평온함을 느낀다. 게라심의 기쁨은 거짓 기쁨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본질적으로 있는 기쁨, 내면에 있는 기쁨,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그 본질적인 기쁨이기 때문이다.
둘째, 게라심은 이반이 그토록 받고 싶어 했던 연민을 줄 수 있다.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린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는 고백하는 게 지독하게 창피했지만 누군가 자기를 병든 어린애처럼 불쌍히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는 누군가 살살 어린애를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져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요직에 있고 수염이 하얗게 세는 나이이기 때문에 그런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대접을 받고 싶었다. (Ⅲ: 172)
게라심은 배운 것 없는 농부이지만 이반이 원하는 바로 그것, “어린애처럼 불쌍히 생각해주는 것”을 실행한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죽음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반이 그에게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니 수고 좀 못할 이유도 없지요”(Ⅲ: 172). 죽음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게라심은 거짓을 말하지 않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반과 그 사이에는 신뢰가 조성된다. 필멸의 인간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불쌍한 마음 덕분에 게라심은 다른 사람들은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환자의 요구를 “쉽게 기꺼이 간단하게 그리고 착한 마음으로” 들어준다. 그래서 이반은 게라심과 있을 때만 마음이 편했다. 게라심의 태도는 톨스토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게라심은 죽음을 기피할 대상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죽음을 삶과 자연의 일부로 바라볼 수 있다(Jackson 1997: 16).
8) “그게 아닌 것”
죽음의 의식은 이반을 삶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러운 추구로 몰고 간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해보지만 그걸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난 제대로 했는데 어떻게 바르지 않을 수가 있어?”(Ⅲ: 188).
그는 도저히 자신의 삶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가 없으므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그 생각을 떨쳐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생 전부가 ‘그게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그에게 들러붙는다. 이반의 최후는 의심과 합리화 사이의 끈질긴 투쟁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변해간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삶이 옳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맞아 전부 그게 아니었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잘하면, 잘하면 ‘그’걸 할 수 있어. 근데 ‘그’게 뭐지?” 그는 자신에게 묻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Ⅲ: 198)
(Да, все было не то,-- сказал он себе,-- но это ничего. Можно, можно сделать “то”. Что ж “то”? -- спросил он себя и вдруг затих).
여기서 이반은 올레닌과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 삶은 “그게 아닌 것”(ne to)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할 수가 있다면 삶은 의미가 있게 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카자크 사람들』(1863)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9)에 이르는 27년 동안 거장이 추구했던 것을 완성시켜주는 ‘그것’은 무엇인가.
9) ‘그것’
이반은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체득한다. 자칫 멜로드라마적일 수 있는 임종 장면은 톨스토이의 문학적 천재가 부여한 어떤 엄정함 덕분에 의미심장한 인지의 순간으로 전이된다. 질병과 고통이 그에게 선사한 죽음의 의식은 마침내 삶의 의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반은 항상 중학생 아들을 가엾이 여겼다. 그의 시선에 담긴 안쓰러운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이 세상에서 게라심을 빼고는 아들 바실리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에 이반은 그 아들을 통해 ‘그것’에 대한 답을 얻는다.
중학생 아들이 아버지에게 조심조심 다가갔다. 죽어가는 이는 연신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두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의 손이 아들의 머리를 툭 쳤다. 아들은 그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갖다 대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Ⅲ: 199)
아들의 눈물을 계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이야말로 톨스토이의 메시지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아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부터 이반은 세계를 다르게 경험한다. 그는 이기적이고 표피적인 삶, 피상적이고 의례적인 삶에서 타인을 위한 삶, 자신을 내어주는 삶으로 건너간다.
바로 이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서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다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들이 가여워졌다. (Ⅲ: 199)
이 대목에서 톨스토이가 사용하는 동사, 즉, 보다, 듣다. 느끼다는 모두 감각과 관련된 동사이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각성으로 이어진다. “이반 일리치는 무엇보다도 접촉, 듣기, 느낌, 시선의 교환,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의 바라보기를 통해 세계를 체험한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톨스토이에게 깊이 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톨스토이에게 윤리적 행위다”(Jackson 1997: 17). 바라봄의 윤리적 의미는 아내와의 대면에서 극대화된다.
아내가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눈물은 그녀의 코와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Ⅲ: 199)
그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바라본 적이 없는 아내를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본다. 아내도 그를 본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눈에는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의 얼굴에서 연민을 보고 그것을 본 그의 내부에서는 아내를 향한 연민이 생긴다. 그는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을 하고 눈빛으로나마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시선의 교환이 연민의 교감으로 전이되고 연민의 교감은 최종적인 화해, 즉 주변 사람들과의 회해, 세계와의 화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의 화해로 이어진다. 결국 그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그것’은 연민, 화해, 용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사랑이었다.
10) 단순하고 좋은 것
마지막 대목에서 드러나는 톨스토이의 천재성은 그 무슨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렵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반의 임종은 한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세상과 화해를 하고 떠난다는 설정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멜로드라마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멜로드라마적이지 않다. 톨스토이의 문학적인 위력은 거의 무덤덤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담백하고 평범한 언어에서 폭포처럼 솟구쳐 나온다.
이반이 겪는 심리적인 과정은 문자 그대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는 아들의 눈물을 보았고 아들의 손길을 느꼈고 아내의 절망을 보았고 그들을 용서했고 그들에게 용서를 청했다. 이게 다다. 그는 해방된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나오지 않던 모든 것이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힘들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주고 나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Ⅲ: 200)
여기서 핵심은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이다. 이 “얼마나 좋아”(kak khorosho, 카크 하라쇼)와 “얼마나 단순해”(kak prosto, 카크 프로스토)는 사실상 삶에 대한 모든 것이다. 보고 만지고 느끼고, 아파해주고 용서하는 것, 이것이 뭐가 그토록 어렵고 복잡해서 못한단 말인가. 그것만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이토록 좋은데. 결국 그는 인간의 내면에 있지만 상실되었던 ‘그것’, 본성이자 선이자 자연이자 순리인 ‘그것’을 찾았고 그것을 찾자 모든 것이 해결된다. “얼마나 좋아”와 “얼마나 단순해”는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발음하는 것조차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말을 통해 말과 내용은 하나가 된다.
단순하고 좋은 “그것”은 앞에 나왔던 이반의 삶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킨다.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끔찍한 삶”에서 나왔던 그 단어 “단순한”이 이반의 죽음 앞에서 다시 나오면서 이번에는 “좋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톨스토이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된다. 이반이 살아생전에 그토록 집착했던 가치가 전복되고 언어도 전복되면서 본래의 가치, 그리고 본래의 언어가 가지고 있던 그 ‘좋은 단순함’이 복구된다.
소설은 철학서나 자기계발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텍스트다. 마지막 장면을 인과율이나 논리로써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혹자는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돈과 명예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공감과 연민이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라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의도가 과연 그것일까? 그가 과연 연민의 중요함을 전하려고 소설을 썼을까?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산 사람은 여전히 돈과 명예만을 좇으며 사는데’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반 일리치의 깨달음이 무척 훌륭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질병과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일리가 있지만 핵심이 아니다.
톨스토이의 의도는 그런 것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을 더 읽어보자.
어디에 있는 거지? 죽음이라니? 그게 뭔데?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아 기쁘다’(‘kakaya radost’)! 한순간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죽음은 끝났어”라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없어.” 그는 숨을 한 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Ⅲ: 200-201)
이반의 일생은, 즉 인간의 일생은 삶과의 사투이자 죽음과의 사투이기도 하다. 이반의 생물학적인 존재가 끝나는 것은 생명의 끝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끝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종교적인 영혼 불멸의 관념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이 끝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죽음이 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그리고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선이 죽음을 끝낸다. ‘끝난 죽음’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다.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의 힘은 그가 초월, 신비, 영원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초월성을 이야기한다는 데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이반의 삶도 죽음도 인과율이나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만일 그랬더라면 소설은 이반의 삶이 나쁜 삶이어서 그가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개과천선하여 평화로이 죽음을 맞는다는 우화로 읽혔을 것이다. 위에서 인용했던 대목을 다시 보자.
‘아 기쁘다’(‘kakaya radost’)! 한순간 이 모든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는 이후 결코 바뀌지 않았다.
이 기쁨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한 자유에서 오는 기쁨(Jackson 1997: 20)이다. 이반이 투병 생활 중에 돌이켜 보았던 그 모든 가짜 기쁨들, 유족들과 동료들이 복제하는 ‘기쁨의 느낌’들, 그런 것들이 아닌 진짜 기쁨—이것이 삶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필요한 시간은 한순간이 될 수도 있고 영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시점은 청춘 시절일 수도 있고 눈 감기 직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쁨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반 일리치는 도덕적이고 영성적인 모종의 고상한 변모 속에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Jackson 1997: 19).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는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불변의 장엄함이 있다. 그 장엄함은 이반 일리치의 심오한 각성이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의, 도덕과 자연의 장엄한 조화에서 오는 것이다.
에필로그
우리는 다시 톨스토이의 무덤으로 돌아왔다. 톨스토이의 주인공들에게 죽음은 항상 무언가를 해결해준다(Emerson 1985: 74). 그러나 톨스토이의 무덤은 무언가를 해결해주기보다는 자꾸만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톨스토이는 회심 이후 농부 옷을 입고 직접 밭을 갈고 직접 장화를 만들면서 도덕적인 삶을 가르치려 했다. 어떤 연구자는 톨스토이의 그런 태도가 “지상낙원으로 가려고 뚫은 비극적인 지름길”이라 했다(Trahan 1990: 43). 톨스토이의 행동에서 인생의 답을 얻고자 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무덤은 같은 의미에서 비극적이다. 그의 농부 옷이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주지 못했듯이 그의 소박한 무덤은 죽음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모든 허례와 허식을 거부했다고 해서, 문명을 거부했다고 해서, 죽음까지 거부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상기시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필자는 그 소박한 무덤을 앞에 두고 죽음을 향한 거장의 분노를 기억했고, 죽음으로써 무언가를 해결했던 그의 인물들을 기억했고, 이반 일리치의 삶과 고통과 사투를 기억했다. 귓전에서 ‘얼마나 단순한가, 얼마나 좋은가’가 후렴처럼 맴돌았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으로 했던 ‘아 기쁘다’라는 말도 맴돌았다. 도덕과 자연의 합일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있었다. 톨스토이는 일체의 기념비를 거부했지만 풀만 무성한 봉분에 거장의 작품이 겹쳐지자 그것은 거대한 기념비가 되어 우뚝 솟아올랐다. 거기 불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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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1 이하 번역본 작품 인용은 작가정신 간 전 3권 톨스토이 『중단편선』에 준하며 로마 숫자로 권수를, 아라비아 숫자로 면수를 표기한다.
주2 이하 톨스토이 전집 인용은 PSS에 준하며 아라비아 숫자로 권수와 면수를 표기한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