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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미터 달리기
사춘기 후반부인 70년대 늦가을 체력장 검열.
그 대입 체력장에는 고3 학생 주•야간 여덟 반(학급당 60명)씩 총 16개 학급이 측정 대상인데 더벅머리 재수생이 200명 가까이 추가되었으니 감독관만 해도 100명이 넘는 대규모 행렬이었다. 오전에 턱걸이, 수류탄 던지기(원래 ‘공 던지기’였는데 ‘10월 유신’ 이후 명칭이 바뀌었음), 100미터, 왕복달리기, 윗몸굽히기 등 여덟 개 종목을 실시한 다음 ‘오래달리기’만 달랑 떼어내어 오후 타임 맨 마지막 종목으로 분류시켰다. 트랙을 돌다가 플라스틱 수류탄에 이마를 깨거나 100미터 달리기 주자와 대각선 충돌할까봐 단독종목으로 쪼갠 것이다. 라인기에서 쏟아내는 석회가루로 이등분 시킨 운동장 양쪽 모서리에 수험생 대기팀이 따로 출발점을 세운 다음 파란 쪼끼의 A팀과 노란 쪼끼의 B팀으로 구분해서 동시에 화약총을 쏘았다.
체력장 점수는 교실 당 만점짜리 서너 명부터 최하점까지 나래비 섰는데.
이해득실에 따라 수험생들의 표정도 각각 달랐다. 강철근육 경석이는 오래달리기를 뺀 오전 측정만으로도 이미 만점을 확보한 채 빈들빈들 놀기만 하면 되므로 소풍처럼 한가로웠고 키다리 창욱이 역시 오후 점수만 대충 때워도 만점이 확보되는 널널한 표정이었다. 나머지는 저마다 입장이 달랐는데 약골일수록 혼신으로 이삭 줍듯 아등바등 점수를 지켜야 했다.
나는 20점 만점 달랑 14점을 따는 게 목표인 가련한 수험생이었으니.
아마도 주간 수험생 480명을 점수별로 세우면 마름모꼴 끄트머리 꼭지점 근방인 475등 이후에나 해당될 것이다. 원서만 접수시키면 일단 20점 만점에서 무조건 10점을 주었으니, 소아마비를 비롯한 장애우들 몇몇이 거기에 해당되었고, 그 다음 점수대가 바로 나다. 측정에 참가만 하면 최하점을 받더라도 5급 12점으로 기본점수를 주었는데, 그럴 경우 체력장의 특급과는 총 8점 차이가 난다. 내가 수모를 무릅쓰고 참가하는 이유는 기본점수 바로 위 차상점인 딱 2점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혹시 운이 좋으면 턱걸이나 윗몸일으키기에서 만점을 받아(상체 힘은 좋았음) 14점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럴 경우 만점과의 격차를 6점 차로 좁힐 수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수험생 1000여 명 중 밑에서 10명 안에나 겨우 드는 바닥 점수이다.
특히 오래달리기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측정 시간이 유독 길었기 때문이다. 던지기와 멀리뛰기는 순식간에 결판되었으니 포기도 쉬웠고 턱걸이나 왕복달리기도 몇 십초만 흐르면 고통이 끝났지만 오래달리기는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망망벌판을 돌고 또 돈 다음 그만큼의 빈혈상태로 절망해야 했다. 그 체력장의 행적들이 숫자화 되면서 입시 점수를 쌍동쌍동 잘라내니, 그게 ‘눈 뜨고 코 베이기’이지만 건강체 벗들에겐 어리둥절한 얘기일 수도 있다..
솔직히 나로서는 체력장보다 단체 기합이 훨씬 수월했다.
기합이건 체력장이건 둘 다 멀쩡한 몸을 학대하는 시스템이지만 단체 기합은 성적표와 무관하므로 강한 놈이건 약골이건 똑같이 고통의 시간만 때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입시에 직결되는 체력장은 다르다. 게다가 수험생 중 허약 체질만 골라 손가락 몇 개 잘라낸 채 시험대에 서란 얘기가 말이나 되는가. 못생긴 인물만 골라내어 ‘돌멩이 매달고 경주에 참석하라’는 게 소위 제도권의 입시법칙이다. 아무튼 나는 14번이었으므로 1번 대의 반대 방향인 두 번째 라인에서 출발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1000미터 달리기 등수를 미리 밝히면.
고1 때는 15명 중 14등으로 딱 한 명을 제키며 고2 때는 10명 중 10등이 되어 꼴찌였는데 웬일인지 고3 마지막 체력장에서는 두 명을 제켜 10명 중 8등으로 수직 상승했다. 관절이 약한 내가 당연히 꼴찌인 줄 알고 포기했었는데 심장이 가쁜 벗과 비만증 벗 두 명이 막판에 나에게 순위를 빼앗긴 것이다.
고1때 나보다 더 못 뛴 사춘기는 충구가 유일하다.
나는 꼴찌를 작정했으므로 화약총 소리가 들리자마자 뒤로 쳐졌다. 열네 명(그때는 15명이 뛰었음)의 등허리가 울렁울렁 실루엣처럼 울렁울렁 땀방울에 섞여 흔들릴 뿐이다. 눈꺼풀을 덮으면서 나머지 네 바퀴 운동장 라인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중간쯤에서 뛰던 충구가 얼굴이 하얘진 채 뒤로 홱 쳐지더니 마침내 나한테도 떨어지는 것이다. 14등과 15등이 바뀌는 아주 짧은 순간 충구의 숨소리는 금세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내가 4분 30초로 14등이었는데) 4분 50초로 꼴찌 골인한 충구는 라인에 쓰러지자마자 꾸역꾸역 라면가락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양호실에 데려가려고 우르르 달려들어 번쩍 들어 올리자 그는 꼬약꼬약 악을 쓰며 거부했다. 푹신푹신한 양호실 침대보다 운동장 구석에 쓰러져있는 게 편안했던 것이다. 학급 꼴찌에 왕따였던 그의 체질상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던 게 발악의 이유이고.
“승부는 아름답지 앉지만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은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문장조차 충구에게는 ‘머나먼 당신’처럼 격리된 채 살아만 왔단다. 격언이 문장으로 디자인되면서 진정성 대신 이미지만 각인시키려는 언어의 속성이 대개 그렇듯 그들끼리만 고답적이다. 아무리 순수한 체력 구호도 수험표 점수로 환산되는 순간 새빨간 거짓이 되었고.
달리기의 첫 기억은 다섯 살 때이니 5.16 직후 재건시대였는데.
아랫집 혹부리 할아버지네 감자밭 한 바퀴 돌아오는 싱그러운 사연이 될 뻔도 했던 유년의 경주에서부터 시작된다. 달리는 도중 밭두렁 모서리 가지나무에서 설익은 놈 한 개를 낚아채서 깨물곤 했는데, ‘첫 입 떼기’ 풋가지의 살콤한 기운이 베물수록 비릿한 냄새로 점차 스며들었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흘리개들은 뱀딸기보다 맛이 훨씬 떨어지는 풋가지로 달리기 공복을 채우곤 했고 혹부리 할아버지는 악동들을 소리쳐 쫓아냈으나 빗자루로 경을 치거나 쌍욕을 던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 명의 주자 중에서 내 생일이 제일 빠르니까 당연히 선두여야 하는데 자꾸만 몸이 세 번째로 밀리는 것이다. 그래봤자 40미터 밭두렁 경주에서 두어 발자국 쳐지는 정도였는데 그게 최초로 느낀 달리기 불안감의 시초가 된 것이다. 동시에 나는 꼴찌 탈출을 위해 비겁한 요령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출발 직전 양쪽 팔을 뒤로 확 뻗어 좌우 친구들이 주춤 밀리는 사이에 간신히 스타트를 선점했고 감자밭 모퉁이를 돌 때마다 등을 흔드는 진로방해 작전으로 꼴찌보다 반 발자국 먼저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왠지 이 변칙 스타일이 마이너 인생의 단초가 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 엄습하기도 했고.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왜 하필 달리기만을 필수종목으로 지정했을까.
부석면 전체의 그 마을 축제 날짜가 다가올수록 내 등에 얹힌 불안의 무게 또한 그물망처럼 덮쳐왔다. 그랬다. 노루발 친구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그 가을 운동회가 거북이 유년들에게는 단두대에 끌려가는 포승줄처럼 조마조마 짓눌리는 것이다. 특히 달리기에는 지혜나 협동심, 기발한 승리 작전도 전혀 필요 없었으니 오로지 타고난 체질 하나로 스피드 서열을 먹여 승자와 패자로 나눠질 뿐이다.
기실 저학년 시절에는 중간 이하 정도의 실력이었던 것 같다. 한 줄에 일곱 명씩 뛰었는데 1등에겐 공책 세 권을 주었고 2등은 두 권, 3등은 한 권이었는데, 소년은 그 공책 상품에 목숨이라도 걸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었다. 그래도 6년 동안 딱 두 차례 3등을 먹어서 초등학교 통산 총 두 권의 공책을 받았으니 아주 한심한 케이스는 아닌 셈이다. 1학년 때는 7명 중 6등, 2학년은 7명 중 3등, 3학년 역시 7명 중 3등이었으니, 나에게 달리기의 기억과 수치는 그렇게 2인3각 매듭처럼 한 묶음으로 끌려갔다. 장원이는 5년 연속 2등과 한 차례 1등으로 도합 13권을 받았으며, 얼룩말 주회는 6년 내내 1등을 도맡아서 18권의 공책을 받았고 5,6학년 때는 백군 계주대표로 출전하여 해마다 세 권씩 3년 내내 플러스 되었으니 달리기 상품으로만 공책 값을 해결하고도 몇 권이 남아돌았다.
“상품을 연필로 바꿔주면 안 되나? ……공책은 너무 넘쳐.”
남은 공책을 당연히 남에게 주지 않았으므로 표정을 침통하게 지켜나 보다가 언제부터였나, 남몰래 주먹 쥐며 ‘우이-씨 나도 한 번 필살기를 만들겠노라’ 깜짝 뒤집기를 와신상담 노린 적도 있었다.
하여, 신새벽 바닷가에서 달리기 연습에 돌입한 것이다. ‘나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란 나폴레옹의 설(舌)을 가슴에 새기는 용맹한 소년이 되어 맨발로 해당화 덤풀도 뛰어 넘었다. 역경을 딛고 성공한 교과서 인물들을 오려내어 롤모델로 달달 외우며 ‘하면 된다’를 가슴 깊이 품는 의지의 소년상이 되려 했다. 미국의 짐하이슨은 어렸을 때의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마침내 올림픽 100미터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낙제생 처칠은 부진아의 오명을 딛고 영국 수상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었단다. 특히 나는 헬렌켈러의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겠다.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리라.’라는 문장에 감동받아 그미의 영혼을 가슴 깊이 새기는 중이었다.
그러나 4학년 때 구루마 바퀴에 정강이를 치이면서 또 절망에 빠졌다. 그 후유증으로 5,6학년 내내 꼴찌 레벨로 분류되면서 나는 속도 단축 의지를 영원히 포기하게 되었다. 소년은 달리기를 미워한 적이 없는데 ‘달리기의 운명’은 소년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달리기를 짝사랑해도 발 빠른 근육들은 저만치 도망가서 킬킬대며 즈이끼리만의 행복에 쌓여있었고.
고2 때 처음 맛본 ‘첫 바퀴만의 환희’.
1000미터 달리기를 100미터처럼 착각한 데서 비롯되었고 그만큼 벼랑 끝이 아찔했다. 나는 첫 바퀴에서 느릿느릿 속도를 늦추는 친구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스타트에서 선두를 잡아 끝까지 지치지 않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데 왜 바보처럼 초장부터 엉거주춤하는가. 100미터야 스피드 게임이니까 실력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1000미터에는 초장의 스피드를 다섯 바퀴까지 밀고가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기백으로 화약 소리가 터지자마자 전속력으로 질주했으니 일단은 기백 충만이다. 왼발이 내려오자마자 오른발을 올리고 오른발이 내려오자마자 재빨리 왼발을 올리리라.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지더라도 초장에 치고 나온 속도를 늦추지 않으리라, 자신만만 스타트를 시도한 것이다. 덕분에 첫 바퀴까지는 2등과 근소한 차이나마 1등으로 달렸으니.
‘와 – 하늘로 훨훨 나는 오리궁뎅이. 홧팅.’
그 칭찬과 함께 하늘이 반쪽으로 쪼개지면서 빵빠레가 터지는 것이다. 벗들의 환호성이 나를 업(up)시키면서 몸이 1미터 가량 공중부양된 황홀함은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그러나 역시 하느님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두 바퀴 초입부터 숨이 막히면서 나머지 네 바퀴 내내 화사했던 첫 끝발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악으로 뛰면 된다.’
그 다짐도 찰나에 거품이 된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멈출 수 없다며 마비된 다리를 연신 앞쪽으로 옮겨내긴 했다.
“힘 내, 백일장에서는 너 혼자 펄펄 날았잖아.”
B조에서 뛰던 대형이가 어느새 반 바퀴를 추월하면서 등허리를 툭툭 밀어주더니 저 혼자 저만치 사라졌다. 그리하여 아, 나는 꼴찌를 몸통 깊이 인정하는 18세 사춘기가 되었다.
마침내 고3, 대입 체력장 그리고 오래달리기 8등의 기적.
출발부터 아예 꼴찌를 선택했는데, 어렵쇼 ‘악화로 양화를 구축 시키려는’ 그 작전이 얼떨결에 먹힌 것이다, 원래는 다섯 바퀴 내내 숨통이 끊어지는 고통만은 제발 피해보겠다는 심사였는데, 이상하다. 세 바퀴째에서 한 명을 제켰고 마지막 다섯 바퀴째에서 또 하나를 넘겨서 마침내 8등으로 우뚝 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달리기 세상에서 나만 남고 이 세상 모든 종아리들이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후에 또 보았다. 내가 천하를 얻은 듯 팔팔 뛰다가 뒤에 쳐진 두 친구의 아프게 토하는 가뿐 스크린을 만난 것이다.
‘두발자유 데모’를 벌일 때 중심에 섰던 석춘이가 9등이었는데.
스승님들의 위압에서도 전혀 피하지 않던 고집불통 우등생이었으므로 고딩주먹들도 아예 건드리지 않던 범생이다.
“어른과 학생의 구분이 안 가잖아. 느네들은 스포즈머리로 어른 흉내 내며 담배나 피우며 여학생 팔짱 끼고 술집이나 다니겠다는 심뽀야.”
고삐리 머리카락에 고속도로 내는 작업이 소위 잠재적 범죄자에 대한 예비검속 표시라고 주입시킨 것이다. 하지만 석춘이는 우리들 모두 고개 숙였을 때 홀로 서서 한사코 거부했다.
“머리 5센티가 그렇게 불량스러운 건 가요?”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교련님까지 어이없다는 듯 피식피식 넘어가 주었던 건 그의 최상위권 성적표가 가장 큰 이유였고 다음으로 국립대 교수님의 아들답게 범생이 표준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글자 수를 맞추기에 파묻히는 책벌레였고, 표정도 변하지 않는 제자를 스승님들도 쉽게 두들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가 달리기 종목에서 나한테도 밀리는 불쌍한 제물이 된 것이다. 석춘이가 훈육실에 끌려갔을 때. 그리고 측정이 끝나자마자 영어단어장에 묻히는 표정도 순식간에 두 얼굴의 사내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이 정도 점수는 지필고사로 충분히 커버가 되는 거야. 충분해.”
허약한 수험생만 찍어내어 한사코 점수를 삭감하는 체력장 제도의 잔혹성을 이해해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는 거기서도 그와 달랐다. 나와 석춘이는 모의고사 점수표에서만큼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므로 놓친 점수를 필기시험에서 만회하기가 너무 벅찬 것이다. 다만 ‘마라톤의 낙오자는 인생의 낙오자다’라고 주입 시킨 스승님의 정신을 거부하는 점만 같았다.
나한테 밀린 또 하나의 벗 용식이는 비만증 19세다.
163센티에 90킬로인 엄지손가락 체형인 그가 숨을 껄떡일 때마다 사춘기 구경꾼들은 우헤헤헷 미친 듯이 웃어대었다. 순둥이 그도 역시 독특한 캐릭터였다. 2학년 등굣길 교문에서 3학년 규율부들에게 눈동자를 보였다가 박살 소문이 있었으니.
“명찰이 찢어졌잖아. 이새끼,”
매부리코 규율부의 마른 장작 펀치가 날아오자 등굣길 우리들은 ‘빨리 피하자’ 며 바싹 얼어붙은 채 지나치려는 중인데.
“이따가 꿰맬 건데요.”
그가 울멍이며 가방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매부리가 홱 낚아채며.
“가로 세로가 똑같은 괴물 몸뚱이에 바느질 케이스까지 가지고 다니네. 짐승 몸집에 계집애 감성이라니. 조잡스러운 놈.”
용식이가 뜨악하니 글썽글썽 쳐다보자.
“노려보긴 싸가지 없는 놈.”
소나기 싸대기로 팥죽이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혼자 남아 바닥에 팽개쳐진 반짓고리를 주섬주섬 챙겼고, 그날 점심시간에 아주 정성을 들여 한 땀 한 땀 명찰을 꿰맸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명찰을 달았던 용식이도 아, 지금은 운동장에 쓰러진 채 비곗살 들먹이며 깔딱이는 중이다.
그날 밤 자취방에서 나 홀로 된꿈 회오리에 시달렸다.
이상하다. 꼴찌끼리 모여 붙박이로 등을 돌린 채 저마다의 작업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석춘이는 ‘마라톤의 낙오자는 인생의 낙오자’라는 스승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평상심을 되찾아 수학문제풀이에만 매달리는 중이었다. 용식이의 포즈도 아주 슬프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토끼는 달리기로 경주하지만 거북이는 헤엄치기로 경주하는’ 거라는 생뚱 철학을 중얼거려서 나를 화들짝 감동시켰다. 가장 안쓰러운 건 충구였다. 그는 여전히 운동장 후미진 모퉁이 토악질한 라면가락 옆에서 ‘나만의 무엇’도 없이 쓸쓸히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러니까 꼴찌 4인방인 우리 모두 따로국밥처럼 따로따로의 방향에서 서로 등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갑자기 다급해져서.
‘꼴찌들끼리 울타리를 만들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
몸을 팔아서라도 벗들에게 더운밥을 지어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눈길이 모아지지 않아서 내가 먼저 옷을 벗고 울멍울멍 소리쳤다.
‘못난 놈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정겹잖아. 시발.’
벗들이 석고처럼 움직이지 않아서 맨살로 악을 쓰다가 화들짝 눈을 뜬 신새벽.
아랫도리 맨살에서 처음으로 몽정의 흔적을 발견했던, 담벼락 너머로 낙엽이 꽃비처럼 쏟아지는 늦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