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7월 1일, 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해하며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섬을 부조하여 상사(喪事)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사람)수 1백 명을 보내 주었다.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내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의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민가를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였다.
위의 기록은 김인문에 관련된 기록이라 생각된다.
즉 금산원에 장사지낸 것은 김인문이었다.
대중(大中) 11년(서기 857) 8월 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대왕은 애통해하며 서발한을 추증하고, 부의와 장사를 모두 김유신의 전례에 따랐다.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 곁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