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와 열반이 비록 상대적이지만 생사도 의지하지 않고 열반도 의지하지 않고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중도는 둘이 아니고 또한 하나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둘은 내버리고 하나를 다시 취하면, 즉 양변을 여의고 그 뒤에 중도하는 것을 두게 되면 하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 아닌 것이 상대가 되어 둘을 이루니 차별의 변견에 떨어집니다. ‘둘이 아니다’하는 것은 양변을 여의어 양변 자체도 찾아볼 수 없고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밖에 다시 중도가 서게 되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둘이 아닌 것〔不二〕이 아닙니다. 열반을 증득했다고 열반에 머무르면 열반이 아니고 성불했다고 부처에 집착하면 부처가 아닙니다.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양변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不有〕은 가(假)를 파하는 것’이란 중생들은 색을 집착하나 색이 본래 공해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유견(有見)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없지 아니하다는 것〔不無〕은 공(空)은 파한다는 것’이란 중생들이 색의 자성이 공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 공에 집착하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공에 집착하는 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니, 유(有)도 파하고 무(無)도 파하여 색도 파하고 공도 파하면 거기에 마땅히 중도가 있으나 그러나 그 중도도 또한 공입니다.
‘명과 무명의 성품이 둘이 아니다’함은 무명 그대로가 실성이고 환화공신 그대로가 법신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변견 때문에 명과 무명을 둘로 보는 것이지 정견으로 보게 되면 그 성품이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로서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며,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중도는 이미 양변에 공(空)하나 이 공도 또한 공(空)하므로 비고, 비고 또 빈 것입니다. 전체가 비었다는 그 병도 다 떨어져서 중도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름도 얻을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공입니다. 이 공은 변견의 공이 아니라 자재무애한 불가득공입니다. 이것은 일승원교가 공문(空門)에 나아가서 십법계를 두루하고도 남는 원리를 설하는 데서 불이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가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또한 양변이 통합니다. 즉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로서 둘이 아니며, 조(照)가 적(寂)이고 적이조(寂而照)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둘아닌 법문이고 일승원교입니다. 법화경의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이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의 넓은 문〔普門〕은 실제로 이러한 중도관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설하되 설하지 않음’이란 아무리 설해도 설함이 없다는 뜻이니 문수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써 불이문(不二門)으로 삼고, 정명(淨名)의 말없음은 공도 아니고 유(有) 아닌 문이다.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는 것도 변견에 따른 정(正)과 사(邪)가 아니라, 정과 사를 완전히 성취하게 되며, 따라서 넓은 문〔普門〕의 뜻이 성립됩니다. ‘마음이 법계에 노님이 허공과 같다’에서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광대불변한 것을 비유하며, ‘법계에 노닌다’는 것은 활동하는 지혜자체를 말합니다. 허공을 먼데서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지만 이것은 또한 무한한 활동 능력이 있으므로 공하면서도 또한 있다는 문〔亦空亦有門〕입니다.
첫댓글 불이중도(不二中道)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도리를 말하고,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란, 대립하는 두 존재가 본질적으로 볼 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함인가?
무외 장로님께 여쭈어 봐야겠다.
좀 어려운 교설이 中道입니다. 먼저 緣起 → 無自性 → (空)空性 → 假有 → 中道( 不二 不異)
非有非無 不一不異
있다 없다(존재론적 이분법) 같다
다르다(인식론적 이분법)
대승불교의 중심사상이 空(空性)인데 이것은 中道의 삶을 사는 논리적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이 크게 中觀學派와 唯識學派로 나뉘는데 양학파가 서로 보완적으로 空과 中道를 설합니다. 용수보살의 '中論'과 세친의 唯識三十頌을 보면 緣起 無自性 空 假 中을 꿰 뚫을 수 있을겁니다. 中論이 어려워서 근 천년간 동북아 불교에서는 법맥이 끊겼고 티벳불교에서 발전 되었습니다. 不二의 大義는 同體大慈悲 등 四無量心의 보살행입니다🙏
진달래의 지성 장로님, 깊은 가르침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