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다 못해 시커먼 빛깔의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숲길 사이로 알록달록한 색상의 경주용 차들이 엄청난 굉음과 흙먼지를 쏟아내며 시속 200㎞로 질주한다. 도로에서 2~3m 떨어진 곳에 진을 친 수천 명의 관객 앞에 나타난 경주차량은 사람들에게 모래와 자갈을 퍼붓고는 총알처럼 숲 저편으로 사라진다. 관객석에서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탄성과 신음이 터져나온다.
지난주까지 태풍 피해로 차갑게 가라앉았던 일본열도가 3일부터 5일까지 열리는 세계 최대의 험로자동차경주인 ‘세계랠리선수권대회(WRC·World Rally Championship)’로 한껏 달아올랐다. 이날 홋카이도 오비히로(帶廣)에서 막을 올린 ‘WRC 재팬’은 32년 WRC 역사상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대회. 그리스·터키·스웨덴·핀란드·뉴질랜드·호주 등의 세계적인 비경(秘境)을 돌며 1년에 총 16차례 열리는 WRC 대회 가운데, 11번째 자리를 올해 처음으로 일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삿포로에서 동남쪽으로 200㎞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비히로는 관광·산업면에서 별로 내세울 게 없는 한적한 소도시. 그러나 이날 오전 오비히로 시내에서 50㎞쯤 떨어진 리쿠베쓰(陸別)에 조성된 총 1000㎞ 길이의 WRC코스는 각국에서 온 수백 명의 취재진과 1만명이 넘는 일본·외국 자동차팬들이 몰려들어 마치 휴일 유원지처럼 붐볐다.
WRC의 하이라이트인 월드랠리팀 경주에서는 스바루, 푸조, 시트로앵, 포드 등 4개팀 총 8대의 차량이 출전해 세계 최고의 험로주행 실력을 가린다. 일반 시판차량을 완전개조해 사흘 동안 오비히로 주변 험로와 산길을 하루 400~500㎞씩 최고 시속 200Km의 초고속으로 달리게 된다.
자동차기업들의 힘겨루기나 다름없는 월드랠리팀 경기와 달리, WRC 재팬에는 개인자격으로 경기에 참가한 아마추어들도 90여개 팀 800여명이나 된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차가 좋아 매년 랠리에 출전하는 이들이다. 도요타의 소형차 비츠를 개조해 개인부문에 출전한 아마노 도모유키(36·회사원)씨는 “1년 동안 저금한 돈을 대회출전에 쏟아부었지만 너무 즐겁다”며 “매년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출전차량들이 집결해 있는 서비스파크에는 월드랠리팀 외에 소규모 팀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하듯 경기 출전을 즐기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일본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WRC는 경제적 부수효과도 크다. 주최측은 경기를 보러 온 타지인들에게 얻는 관광수입, WRC차량의 양산형 모델(출전차량은 모두 시판 중) 매출, 입장권 및 캐릭터상품 판매, TV방영권 등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총 1000억원의 수입을 예상한다고 했다. 이번 WRC 포드팀의 홍보담당인 마키노 에미(33)씨는 “이번 WRC는 10만명이 넘는 팬들이 참관하는 데다 전국에 경기가 방영되기 때문에 일본 내의 포드 이미지를 높일 절호의 기회”라며 흥분했다.
WRC재팬 대회장을 맡은 사이토 아키라 마이니치신문사 회장은 “교통·도로법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일본에서 홋카이도 관계기관과 경찰·지역주민들 협조로 WRC재팬을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세계 6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면서도 이렇다 할 세계적 자동차대회 하나 갖지 못한 한국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