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鄭勳, 창씨명 圃勳, ?∼?
◆ 1915년 제27기 일본육사 졸업. 1930년대 말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
해방 후 일본으로 '귀향'한 조선인 장교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일제의 군대에서 복무하던 많은 장교들이 해외에서 돌아오거나 군복을 갈아 입게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이응준, 김석원, 원용덕, 정일권, 박정희, 채병덕, 이용문, 김정렬, 이형근, 정래혁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장교로서 복무하던 그들이 어떠한 행적을 남겼던지, 생각이 어떠하였던지간에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단 처벌의 대상이었다. 만약 1947년 3월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 제출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 조례 초안'이나 그 '수정안'이 통과되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 '초안'과 '수정안'에는 일본군에 '자원 종군한 자'와 '일본군에 종군하여 동포 또는 연합국민을 박해한 자'를 전범으로 규정하고 처벌조항을 마련하고 있었다. 일제 시대 조선인 일본군 장교들이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가 장교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 '자원 종군자' 조항에 해당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전범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공민권을 박탈당하며, 3년 이상의 유기형 또는 무기형이나 사형을 당하게 될 처지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특별법의 '재수정안'과 '최종안'에서는 '전범'조항이 빠져 버리게 되었다.
조선인 일본 장교들은 다시 일본 대신 '점령자'로 등장한 미군정의 동반자가 되어 군대의 핵심 장교로서 튼튼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열에 끼지 못한 조선인 일본 장교가 있었다. 일본육사 27기생 가바 중좌, 즉 정훈이 바로 그였다. 해방 직후 친일파 문제를 거론할 때 이상하게 조선인 일본군 출신 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으며,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에서도 전범 조항은 사라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정훈은 해방된 조국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그가 양자로 입적했던 가바 가(家), 양부의 나라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전시하의 언론을 감시·통제하는 데 탁월한 능력 발휘
정훈은 일본육사 1년 선배인 26기 홍사익이나 동기인 김석원과도 달랐다. 홍사익은 조선인 중에서는 영친왕과 함께 최고위 계급인 일본군 중장까지 올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에 의해 1946년 9월 마닐라에서 전범으로 처단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동기인 김석원은 「김부대장 분전기」, 「김석원 부대 격전기」, 「전진여담」(戰塵餘談) 따위가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만주와 중국, 시베리아에서 일본 군대를 이끌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학병 격려에 앞장 서기도했다. 그는 뒤에 국군에 참여하여 제1시단장을 거쳐 1956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런데 정훈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행한 친일 반민족행위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었다는 사실과 그를 낳아 준 나라보다 길러 준 나라인 일본이 그에게는 더 친근했음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정훈은 1913년 중앙유년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사관후보생으로서 6개월간 일본 내의 각 실무 부대에서 근무하였다. 다시 육사에 진학하여 1915년 5월에 제27기로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조선인 중에는 중도에 탈락한 인물들이 많아 20명만이 졸업했는데, 정훈은 27기생 가운데 서울 출생으로 제10사단 20연대에 배속되었다.
일본육사 26·27기생들은 1920년대 중반에 대위로, 다시 1933∼34년경에는 소좌로 진급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질 무렵 정훈이 소속했던 부대는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회령)였다.
중일전쟁은 40대 후반에 들어선 그의 동료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지만, 정훈 중좌는 선전과 회유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군살여부 보도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보도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제 동포를 사지로 몰아 넣는 지원병·징병·학병제도의 홍보와 언론통제에 단단히 한몫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인이라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데다 그가 맡은 임무가 정보계통이었기에 행적이 겉으로 많이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1938년 2월 23일 육군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되자 육군소좌 정훈은 『매일신보』에 전보를 보내 '충량한 신민'이 수행할 영예로운 국방의 임무를 질 수 있게 된 것을 경축하였다. 그 뒤 3월 10일에는 조선군 보도반 육군보병 소좌 정훈의 이름으로 지원병제를 찬양하고 제국신민의 자세를 바로 가질 것을 권유하는 글을 『매일신보』에 또 발표하였다. 지원병제가 실시됨으로써 병합 후 30여 년 만에 비로소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국신민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국민 모두가 경하할 만한 지원병제가 실시된 만큼 일본인이나 조선인 모두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버리는 일이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강조한 것이다. 4월 3일부터 지원병제가 시행되자 그는 지원병 모집에 앞장섰다. 1939년 7월에는 『매일신보』에 주조선 일본군사령부 보도부장 정훈의 이름으로 '조선인 부인에게 고함'이라는 담화문을 싣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의 행적과 생각을 좀더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이 담화문은 '강한 군인은 강한 어머니가 만든다'는 견지에서 지원병, 징병 등과 관련하여 '황국 어머니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일본 부인들과 반도(조선) 부인들의 장점과 단점을 늘어 놓는다. 일본 부인들이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하등 불평도 말하지 않고 부지런하고 묵묵히 봉사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비해, 반도 부인들은 자녀들에게 "괴롭지, 가엾다!"하면서 일시적 애련의 정에 끌리는 경향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나약한 자세에서 벗어나 자녀들을 지원병으로 참여시키면, 자기가 "여러분의 자제를 속히 일본정신의 시련의 분위기에 넣어 황국신민으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끝에서 그는 "반도 동포가 황국신민이 되는 길은 자기의 신명을 천황폐하에게 바침에 있는데, 내 자식을 사랑하여 장래의 광명과 행복을 원하다면 일본정신의 실현장이고 실천장인 병영으로 보내는 것이 모친의 진정한 사랑이요, 반도 동포의 행복"이라고 하면서 일제의 지원병으로 참가하는 데 어머니들이 앞장 서기를 다시 한 번 강요하고 있다.
그는 지원병·징병 권유뿐만 아니라 일찍이 도쿄 헌병사령부에서도 근무한 경험을 살려 전시하의 조선인 신문·잡지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군인으로서 직접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러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해방 후 조국에 붙어 있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일본으로 간 뒤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박준성(성균관대 강사·한국사,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정훈, 「조선부인에게 고함」, 『매일신보』, 193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