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는 말]
선과 정토의 이체는 본래 둘이 없지만, 만약 사수事修를 논하면 하늘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선은 철저히 자성을 깨닫지 못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인광대사께서는 언제나 오조 계인戒忍선사가 세상에 태어나 소동파가 되었고, 초당草堂 청淸 선사가 세상에 태어나 노공이 되셨다고 예를 드셨다. 정토법문은 「신信. 원願. 행行」 삼자량三資糧을 구비하기만 하면 곧 업을 지닌 채 왕생할 수 있다.
왕생할 수 있으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난다. 인광대사께서는 특별히 영명연수 선사의 《사료간四料簡》에서 “선은 없고 정토만 있으면 만 사람이 닦으면 만 사람이 모두 가니,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기만 하면 어찌 깨닫지 못할까 근심하리오(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若得見彌陀 何愁不開悟)” 라는 게송을 강조하셨다.
[제 239칙] 참선과 정토의 이체는 본래 둘이 없지만, 만약 사수를 논하면 그 모습은 하늘땅만큼 다르다
참선과 정토의 이체는 본래 둘이 없지만, 만약 사수를 논하면 그 상은 하늘땅만큼 다르다.
참선으로는 (이치를) 철저히 깨닫고 (사상을) 철저히 증득하지 못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위산선사께서 말씀하시길, “가령 정인불성正因佛性을 단박에 깨달을지라도(頓悟) 그 수행경로는 곧 세속을 벗어나 계위를 따라 점차 나아가, 세세생생 물러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계위에 오를 수 있음을 기약할 수 있다.” 또한 말씀하시길, “처음 발심하여 수행 할 때 각자 만나는 인연이 다름에 따라 비록 자성을 단박에 깨달을지라도 여전히 무시광겁 이래 누적된 번뇌. 습기가 있어 단박에 깨달을 때 바로 남김없이 끊을 수 없어, 모름지기 그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무명업식 가운데 현행하는 갖가지 망상. 분별. 집착(現業流識)을 철저히 없애라고 가르쳐야 한다.” 홍병선사께서 말씀하시길, “자성을 단박에 깨달아 부처님과 동등할 지라도 여전히 무시이래 누적된 번뇌. 습기가 있어 단박에 깨달을 때 바로 남김없이 끊을 수 없어 모름지기 실제 수행하는 가운데 대치하는 법문을 빌어 성덕에 수순하여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이는 어떤 이가 밥을 먹을 때 한 입에 곧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장사잠 선사께서 말씀하시길, “천하의 선지식도 과위상의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부가 아직 여러 성자와 동등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연고이다.”
그래서 오조 계인 선사는 다시 태어나 또한 소동파가 되었고, 초당 청 조사는 다시 태어나 노공이 되었다. 고금의 수많은 선종의 조사는(이치를) 철저히 깨달았지만 (사상을) 철저히 증득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 이와 같다. 진실로 그들은 단지 자력에만 의지하고 불력의 가피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혹업을 다 끊어 없애지 못하고 생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정토법문은 신. 원. 행 삼자량을 구비하기만 하면 업을 지닌 채 왕생할 수 있다.
일단 왕생하면 영원히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 (이치를) 깨닫고 (사상을) 증득한 보살은 단박에 일생보처에 오르고,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도 아비발취를 증득할 수 있다.
그래서 화장해중 보살들께서는 모두 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한다.
종문宗門과 교종의 일체 선지식들도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길 발원한다.
(그 성공의 비결은) 진실로 불력에 온전히 의지하여 아울러 자신이 진성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까닭에 감응도교를 얻어서 재빨리 정각을 이룸에 있다.
현재 채택하여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당신은 반드시 선종어록의 공안을 내려놓고 정업淨業을 전심으로 수지하여 티끌 하나에도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만덕홍명萬德洪名의 거룩한 명호를 집지하되, 소리를 내든지 묵념하든지 「뒤섞임이 없어야 하고, 잠시 끊어짐도 없어야 한다.」 반드시 마음에 염을 일으키고 소리를 귀에 들어가게 하여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도록 한마디 한마디 산란하지 않도록 하여 오래 지속하면 저절로 공부가 한 덩어리(片段)를 이룰 것이다. 일심불란의 염불삼매를 몸소 증득하면 저절로 서방정토의 선종 도풍을 알게 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의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의 공부로써 대세지보살의 도섭육근都攝六根 정념상계淨念相繼의 정업을 수지할 수 있음은 곧 정토법문 그대로 선종을 수지함이니, 어느 현묘함이 이를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역주】 “세세생생 물러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계위에 오를 수 있음을 기약할 수 있다(生生若能不退 佛階決定可期).” 이는 반드시 선종에서는 자력으로 사과의 초과에 이르도록 닦아야 비로소 위불퇴位不退, 즉 원교의 상사즉불相似卽佛 초신위初信位를 얻는다. 오조 계인, 초당 청 등 선사의 후세後世 공안은 인광대사께서 문초에서 여러 차례 인용하시는데, 그 후세는 대부분 퇴락이 있음을 말한다. 이로써 선정을 닦아 상사위를 증득하지 못하고 대부분 관행위에 머무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광대사 《문초》에 따르면 말법시대의 선종에서는 마음을 밝혀 견성할지라도 대부분 명자위 사람이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갖춤으로 인해 무시이래 염습染習의 복단伏斷을 닦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울지라도 대부분 관행위를 증입할 수 있다.
이러한 수증修證 공부를 임종시 염불법문으로 바꾸어 닦고 자력과 타력에 의지해 삼계를 횡으로 벗어나 모두 결정코 왕생하고 자재왕생할 수 있다.
가로로 삼계를 벗어나야 업을 지닌 채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모두 생사를 요탈하여 후유後有(윤회하는 몸)를 받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오조 계 조사와 초당 청 선사는 후유를 받았다. 인광대사께서 관세음보살의 반문문자성으로 선정쌍수禪淨雙修하여 선을 닦는 사람을 접인하는 것은 쌍수를 제창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보충】 “(염불법문의)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역용은 천경만론에서 일찍이 설한 적이 없다. 참선법문과 비교하면, 참선으로 정인불성을 단박에 깨달을지라도 그 수행경로는 겨우 세속을 벗어나 계위를 따라 점차 나아가, 세세생생 물러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계위에 오름을 기약할 수 있거늘 어찌 같은 말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종문과 교종의 정사들은 어찌 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如斯力用, 乃千經萬論所未曾有, 較彼頓悟正因, 僅爲出塵階漸, 生生不退, 始可期於佛階者, 不可同日語矣. 宗敎之士, 如何勿思).”
이는 역용을 비교함이다. 문에는 두 절이 있으니, 처음은 교종과 비교함이고 둘은 종문과 비교함이다. 천경만론은 오시五時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시에는 오직 화엄. 법화만이 일생성불一生成佛을 밝힌다. 화엄성불은 뒤 문장을 보면 절로 알게 되고, 법화는 곧 용녀 한 사람이다. 정토법문은 곧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일찍이 설한 적이 없다.” 말씀하신다.
“정인불성을 단박에 깨닫는다(較彼頓悟正因)함”이란 종문과 비교함이다.
위산선사께서 말씀하시길, “가령 정인불성을 단박에 깨달을지라도 그 수행경로는 곧 벗어나 계위를 따라 점차 나아가 세세생생 물러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계위에 오를 수 있음을 기약할 수 있다(可中頓悟正因 便是出塵階漸 生生若能不退 佛階決定可期).”
위 문구는 상삼토上三土(방편유여토. 실보장엄토. 상적광토)에 태어날 수 없음을 밝히고, 아래 문구는 삼불퇴三不退(위불퇴. 행불퇴. 염불퇴)를 원만히 증득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대저 돈오頓悟이지 점차 깨닫는 점오漸悟가 아니고, 정인正因이지 그릇된 사인邪因이 아니다. 참선법문으로 점차 깨닫는 사람조차 드물거늘, 하물며 단박에 깨닫는 사람이겠는가? 또한 하물며 참선으로 정인불성을 단박에 깨달았을지라도 그 수행경로는 겨우 세속을 벗어나 처음 명자위(名字位; 문자상으로만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갖추었다는 것을 아는 정도의 깨달음)로 들어가서 점차 나아가거늘 어떻게 염불하여 횡으로 극락사토(極樂四土; 동거토, 방편유여토, 실보장엄토, 상적광정토)에 왕생함과 같겠는가?
“세세생생 물러나지 않고 끊임없이 닦는다(生生不退).” 함이란 단지 금생에 물러나지 않음이 아니라 보임하여 세세생생 물러나지 않아 관행위觀行位(문자상으로 아는 것과 실제의 지혜관조가 일치하는 정도의 수행위)를 거쳐 상사위相似位(관행의 정도가 진무루眞無漏에 비슷한 정도에 이른 수행위)를 지나 분증위分證位를 증득하여야 성불을 기약할 수 있거늘, 어떻게 염불하여 혹은 7일에 공부성편을 이루어 정토에 태어나 곧 삼불퇴를 원만히 증득함과 같겠는가? ㅡ달묵법사, 《불설아미타경요해편몽초》
[보충] 뒤섞임(來雜)도 없고 잠시 끊어짐(間斷)도 없어야 한다
염불 이외에 두 번째 생각, 뒤섞임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렵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예컨대 확철대오를 구하거나 대총지를 얻는 등등이다.
발원은 두 번째 생각도 아니고 뒤섞임도 아니다. 반드시 정토법문은 「신원행」 삼법을 종지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行」은 수레를 끄는 소와 같고, 「원願」은 수레를 모는 사람과 같으며, 「신信」은 앞에서 인도함과 같다. 앞에서 인도함과 수레를 모는 사람은 바로 이 우차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부처님을 향해 왕생을 발원하여야 한다. 또한 염불하지 않을 때에도 신경 쓰거나 고집해서는 안 된다.
설사 일념의 마음속에 만년의 세월을 남김없이 섭수(一念萬年)하여 시간 장단의 분별을 멀리 여읠지라도 날마다 시작함과 끝맺음이 있어도 괜찬다. 만약 염불하지 않을 때가 있고 발원할 때가 있다고 여긴다면 잠시 끊어짐과 뒤섞임이 되어 곧 왕생의 대사를 이루기 어렵다.
묻건대, 일심으로 염불할 때 색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손을 들고 발을 내딛는 등등의 행위가 있는가, 없는가? 만약 있다면 일심으로 염불함과 손을 들고 발을 내딛는 행동 양자는 이미 잠시 그침과 뒤섞임을 생성시킬 수 없거늘, 어떻게 일심으로 염불함과 왕생을 발원함 양자는 잠시 그침과 뒤섞임을 생성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 일심으로 염불할 때 색을 보고 소리를 듣지 않으며 손을 들거나 다리를 내딛는 등의 행동이 없다면 법신대사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공부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법신대사는 한 곳에 단정히 머물러도 미진찰토의 무량한 세계에 몸을 나타낼 수 있다. (그대의 견해에 비추어보면) 그 가운데 잠시 그침과 뒤섞임을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ㅡ《인광대사 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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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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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왕생하면 영원히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 (이치를) 깨닫고 (사상을) 증득한 보살은 단박에 일생보처에 오르고,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도 아비발취를 증득할 수 있다.
그래서 화장해중 보살들께서는 모두 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한다.....반야심보살님! 수고하셨습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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