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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履 虎尾, 不咥人, 亨.’ |
[10履]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지극히 밝은 것이다.
· 위 괘사의 원 문장은 ‘履, (履)虎尾’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괘사에서는 중복되는 ‘(履)’를 생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주역에서 범[‘虎’]은 이곳 ① 이괘(履卦)와 ② ‘택화(澤火) 혁(革)’ 두 군데서 나온다. 범의 주역코드는 태괘(兌卦, ☱)이다. 그러므로 범의 꼬리는 태괘의 삼효[陰]이다. 이괘(履卦)의 하괘가 태괘(兌卦)이다. · ‘不咥人’에서 ‘咥’(질)은 ‘물다’이므로 ‘不咥人’은 ‘사람을 물지 않는다.’
* [강 설(講說)] ————
‘履’(이)는 ‘조화롭게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범의 꼬리를 밟는다’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을 정도로 조화롭게 하라’는 뜻이다. ‘이괘(履卦)는 육삼(六三)이 일으키는 문제와 비판에 부딪혀 진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고 일을 추진하도록 깨우친다. 여기에서 ‘亨’(형)은 ‘밝은 마음으로 임하라’는 뜻이다. 그 근거는 공자의 단(彖)에서도 이를 ‘光明’(광명)으로 풀었기 때문이다.
정이천의『역전』에서 말했다. “履는 사람이 행하는 道이다. 하늘[☰]은 위에 있고 못[☱]은 아래에 처하였으니,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에게 밟히고 깔려서 상하가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는 바, 일에 지극히 順한 것이요, 이치에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사람의 履行이 이와 같으면 비록 지극히 위험한 곳을 행하더라도 또한 해로운 바가 없다. 그러므로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물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밝은 것이다.”
[傳] 履는 人所履之道也라 天在上而澤處下하니 以柔履藉於剛하여 上下各得其義하니 事之至順이요 理之至當也라 人之履行이 如此면 雖履至危之地나 亦无所害라 故履虎尾而不見咥嚙하니 所以能亨也라.
*— [이괘(履卦)에 대한 해석의 근거 ①] ☞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조화롭게 이행하라”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하> (제7장)에서는 ‘우환(憂患)이 생겼을 때 대처하는 아홉 가지 지혜(智慧)’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9가지 지혜가 바로 이(履), 겸(謙), 복(復), 항(恒), 손(損), 익(益), 곤(困), 정(井), 손(巽) 등의 괘(卦)에 담겨 있다. 여기에서 이(履)는 ‘덕을 실천하는 기본이 되는 것(履 德之基也)’이라 하고 그 지혜로 풀기를 ‘이괘(履卦)는 조화를 이루어 지극하다(履 和而至)’고 했으며, 그리고 또 ‘이괘(履卦)로써 조화롭게 행동하라(履以和行)’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괘는 단순히 ‘이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이행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 ‘조화(調和)의 지극함’은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는 상태이니, ‘조심조심’ 이행하여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밝은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사전 원문] 易之興也는 其於中古乎인저. 作易者는 其有憂患乎인저.
是故로 履는 德之基也요 謙은 德之柄也요 復은 德之本也요 恒은 德之固也요 損은 德之修也요 益은 德之裕也요 困은 德之辨也요 井은 德之地也요 巽은 德之制也라.
履는 和而至하고 謙은 尊而光하고 復은 小而辨於物하고 恒은 雜而不厭하고 損은 先難而後易하고 益은 長裕而不設하고 困은 窮而通하고 井은 居其所而遷하고 巽은 稱而隱하니라.
履以和行하고 謙以制禮하고 復以自知하고 恒以一德하고 損以遠害하고 益以興利하고 困以寡怨하고 井以辨義하고 巽以行權하나니라. —『周易』<繫辭傳·下>(제7장)
역(易)이 생겨난 것은 중고(中古) 때인가! 역(易)을 만든 사람은 우환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괘(履卦)는 덕을 실천하는 기본이 되는 것이고, 겸괘(謙卦)는 덕을 실천하는 손잡이이며, 복괘(復卦)는 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고, 항괘(恒卦)는 덕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손괘(損卦)는 덕을 닦는 것이고 익괘(益卦)는 덕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다. 곤괘(困卦)는 덕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고, 정괘(井卦)는 덕을 다지는 것이며, 손괘(巽卦)는 덕을 제어하는 방법이다.
이괘(履卦)의 지시를 따르면 조화롭게 되어 진리에 이르고, 겸괘(謙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존귀해져서 빛나게 된다. 복괘(復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작은 일이라 하더라고 다른 것과 구별되고, 항괘(恒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복잡해져도 염증이 나지 않는다. 손괘(損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처음을 어렵지만 나중에는 쉽고, 익괘(益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오랫동안 넉넉하여 꾸미지 않는다. 곤괘(困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곤궁하다가 통하고 정괘(井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자기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모두를 좋은 방향으로 옮기며, 손괘(巽卦)의 지시를 실천하면 자기의 역할을 잘 하지만 외부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 [주역 이괘(履卦)와 관련한 사서(四書)의 구절] ☞ [맹자(孟子)] “操則存 舍則亡”
『맹자(孟子)』의 <고자장구·상>(제8장)에서 공자(孔子)께서 ‘조심(操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08-02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 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03 故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04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02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에게 있는 것인들 어찌 어질고 의로운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 양심을 놓아버리는 것이 또한 도끼가 나무에게 아침마다 가서 베는 것과 같으니, 그러고서도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 그 낮과 밤이 양심을 불어나게 하는 것과 새벽에 기운에 있어서도,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서로 비슷한 것(여기서는 양심 또는 본마음을 뜻함)이 거의 드문데, 그 아침과 낮에 하는 소행이 이를 꽁꽁 묶어 없애버리니 꽁꽁 묶어서 없애는 것을 반복하면 야기(夜氣)도 양심(良心)을 보전할 수가 없다. 야기(夜氣)가 보존할 수 없으면 금수(禽獸)와 다름이 멀지 않다. 사람들은 그 금수(禽獸) 같은 모습만 보고서 일찍이 좋은 재질(才質)이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의 모습이겠는가?
03 그러므로 진실로 그 기르는 기회를 얻으면 자라지 않는 것이 없고, 진실로 그 기르는 기회를 잃으면 소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 04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붙잡으면 보존되고 놓아두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일정한 때가 없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마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셨다.”
*—— [주역(周易)의 삶] ☞ 이괘(履卦)에서 얻은 삶의 지혜
① 모든 일을 조화(調和)롭게 행해야 한다. ← [履]
② 매사 조심조심 행하되 밝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 ← [虎尾, 不咥人, 亨]
*—— [천택리(天澤履)의 단전(彖傳)] ——*
[10履] ‘彖曰,“履”柔履剛也, 說而應乎乾, 是以“履虎尾,不咥人,亨”
剛中正, 履帝位而不疚, 光明也.’
단(彖)에서 말했다. “리(履)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밟고 있는 것이다. 기쁜 상태에서 강건한 것에 응하고 있다. 이 때문에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밝은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굳센 것이 핵심이면서 바른 자리[中正]를 차지하여 임금의 자리[九五]에 올라 폐단이 없으면 광명해질 것이다.”
· ‘說而應乎乾’에서 ‘說’(열)은 ‘열(悅)’과 통용된다. ‘기뻐하다’.
· ‘剛中正’은 구오(九五)를 두고 하는 말이다.
· ‘光明’(광명)은 괘사의 '亨'에 대한 해석이다.
'光明'의 주역 코드는 이괘(離卦, ☲)이다. 이괘((履卦)의 내호괘가 이괘(離卦)이다.
* [강 설(講說)] ————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밟고 있다’는 것은 육삼(六三)이 초구(初九)와 구이(九二)의 위에 있다는 것이다. ‘기쁘면서도 강건한 것에 응한다’는 것은 기쁨으로 이해되는 아래의 태괘(兌卦, ☱)가 위의 건괘(乾卦, ☰)에 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으로 기쁨이 들어있는 상황이고 밖으로는 건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추진해도 기본적으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리고 전체의 핵심인 구오(九五)는 굳센 양(陽)의 입장에서 바른 자리[正]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꺼리지 않고 수행한다면 전체가 광명해질 것이다.
순(舜)임금처럼 겸손한 사람도 악인들을 제거할 때는 과감하게 추진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해야 한다. 주저하거나 사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역(易)이 가르쳐 주는 지혜이다. 나서지 않아야 할 때 나서고, 나서야 할 때 나서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잘못되고 말 것이다.
*—— [천택리(天澤履)의 상전(象傳)] ——*
[10履] ‘象曰, 上天下澤,“履”, 君子以 辯上下, 定民志.’
상(象)에서 말했다. “위가 하늘이고 아래가 못이 리(履)니 군자가 이 괘의 이치를 살펴
위와 아래를 변별하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킨다.”
· ‘辯上下, 定民志’에서 ‘辯’(변)은 ‘변론하다, 바로 잡다’ 혹은 ‘辨’(변)과 통용, ‘변별하다’의 뜻. ‘上’은 ‘하늘의 이치’를 뜻하고 ‘下’는 ‘땅의 역할’를 의미한다. 결국 ‘辯上下, 定民志’는 ‘하늘의 이치와 땅의 역할을 변별하여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킨다’는 뜻이니 조화롭게 이행하는 지혜이다.『중용(中庸)』제1장에서 말하는 ‘致中和면 天地位焉하고 萬物育焉이니라’가 여기에 해당한다.
* [강 설(講說)] ————
위는 강건하고[☰] 아래는 기쁨[☱]이니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편안한 상황이다. 이괘(履卦)의 상황에 처한 군자(君子)는 겁을 먹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위아래의 질서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安定)시켜야 한다. 지도자가 복잡한 일이 있을 때 결단·이행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면 민심이 안정되기 어렵다. 과감하게 이행해야 할 때 이행(履行)하는 것이 괘의 가르침이다.
*—— [천택리(天澤履)의 효사(爻辭)] ——*
‘上九, 視履考祥, 其旋元吉.’ ‘九五, 夬履, 貞厲.’ ‘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 ‘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咥人, 凶, 武人爲于大君.’ ‘九二, 履道坦坦, 幽人貞吉.’ ‘初九, 素履, 往无咎’ |
* [이괘(履卦) 초구(初九)의 효사] ————
[10履] ‘初九, 素履, 往无咎.
象曰,“素履之往”, 獨行願也.
초구(初九)는 소박하게 이행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나서면 허물이 없다. 상에서 말했다. “소박하게 이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은 홀로 원하는 것을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강 설(講說)] ————
초구(初九)는 조화롭게 이행하고 전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어리고 순수하다. 그래서 소박한 마음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 탈이 없다. 초구가 굳세게 나아가면 육삼(六三)의 비난과 유혹이 있다. 그리고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초구(初九)는 순수해야 한다. 일편단심으로 전념해야 한다. 초구(初九)는 양(陽)이지만 음(陰)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소박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상에서 홀로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역전』에서 말했다. “가고 머물지 않는 것은 行의 뜻이다. 初九는 지극히 낮은 곳에 처했으니 본래 아래에 있는 자이나, 陽剛의 재질로 위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만약 卑下한 신분을 편안히 여기고 가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賢者는 그 본분을 편안히 행하여 그 처함에 즐겁고 그 나아감은 장차 훌륭한 일을 하려 해서이다. 그러므로 그 나아감을 얻으면 훌륭한 일을 함이 있어서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바로 그 평소의 행함을 지키는 것이다.”
[傳] 履不處者는 行之義라 初處至下하니 素在下者也로되 而陽剛之才로 可以上進하니 若安其卑下之素而往이면 則无咎矣라.… 賢者則安履其素하여 其處也樂하고 其進也將有爲也라 故得其進이면 則有爲而无不善하니 乃守其素履者也라.
* [이괘(履卦) 구이(九二)의 효사] ————
[10履] ‘九二, 履道坦坦, 幽人貞吉.
象曰,“幽人貞吉”, 中不自亂也.
구이(九二)는 가는 길이 탄탄하다. 유인(幽人)처럼 바르고 부드럽게 하면 길하다. 상에서 말했다. “유인(幽人)이라고 바르고 부드럽게 하면 길하다는 것은 중심(中心)에 있으면서 저절로 어지러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 ‘履道坦坦’(이도탄탄)에서 ‘坦坦’은 ‘평탄하다’. '탄탄대로'의 주역 코드는 태괘(兌卦, ☱)이다.
· ‘幽人貞吉’에서 ‘幽人’(유인)은 ‘은거하는 선비’이다. ‘貞’은 구이가 양(陽)이지만 음(陰)의 자리에 있으므로 ‘부드럽고 겸손한 자세로 임하는 것’을 말한다. 퇴계 선생은 도산에 은거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기르기 위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그 앞에 사립문을 내었는데 이름하여 ‘幽貞門’(유정문)이라 했다. 주역의 이괘(履卦) 구이(九二)의 효사에서 취한 것이다.
* [강 설(講說)] ————
구이(九二)는 조화롭게 이행해 나가는 상황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다. 초구(初九)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육삼(六三)이 유혹할 수 있지만 구이(九二)는 이제 궤도에 올라섰다. 이제 중심(中心)의 자리에서 모두에게 주목을 받고 있고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구이(九二)는 걱정하지 말고 일을 추진·이행하면 된다. 그래서 ‘가는 길이 탄탄(坦坦)하다’고 했다.
만약 육삼(六三)이 반발하는 일이 있더라도 바르게 참고 견디며 자기 일만 하고 있으면, 구오(九五)가 부를 것이다. 그래서 ‘유인(幽人)이라도 바르고 굳세게 하면 길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幽人’(유인)은 ① ‘유배를 가는 사람’(이기동) ② ‘유연히 은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손기원)로 해석한다. ①의 뜻으로 보면, ‘가는 길이 탄탄하여 유배를 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길하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걱정이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 말이다. 안동 <도산서원>의 ‘도산서당’ 사립문을, 퇴계 선생은 그 사립문을 ‘幽貞門’(유정문)이라 명명하였는데, 이괘 구이의 효사에서 ②의 뜻을 취한 것이다. ‘조용히 은거하여 바르게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수양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결국 구이의 메시지는 ‘나아가는 길이 탄탄대로라 할지라도 조용히 은거하여 인격을 수양하는 현자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상황에 맞는 도리이고 스스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역전』에서 말했다. “九二는 부드러움에 거하여 寬裕함을 얻었으니, 그 行하는 道가 탄탄하고 평이한 길이다. 비록 행하는 바가 평이한 길을 얻었으나 또한 반드시 그윽하고 고요하고 편안할 사람이 처하여야 바르고 길할 것이다. 九二는 陽의 뜻이 위로 올라가므로 幽人의 경계가 있는 것이다.”
[傳] 九二居柔하여 寬裕得中하니 其所履 坦坦然平易之道也라 雖所履 得坦易之道나 亦必幽靜安恬之人處之라야 則能貞固而吉也라 九二는 陽志上進이라 故有幽人之戒라.
* [이괘(履卦) 육삼(六三)의 효사] ————
[10履] ‘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咥人, 凶, 武人爲于大君.
象曰,“眇能視”,不足以有明也,“跛能履”不足以與行也,
“咥人之凶”位不當也, “武人爲於大君”志剛也.
육삼(六三)은 애꾸눈이라도 잘 볼 수 있고 절름발이라도 잘 걸을 수 있으나 범의 꼬리를 밟으면 사람을 물기 때문에 흉하다. 무인(武人)이라면 대군(大君)에게 직접 당한다.
상(上)에서 말했다. “애꾸눈이라도 능히 볼 수 있을 정도라도 족히 눈 밝을 수 없고 절름발이라도 잘 걸을 수 있을 정도라도 족히 걸을 수 없다. 사람을 물어서 흉하다는 것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 [주역, 상의 코드(CODE)의 비밀] ——* ‘묘능시 파능리(眇能視, 跛能履)’에 대하여
‘眇能視, 跛能履’에서 ‘眇’(묘)는 ‘사시(斜視)’이거나 ‘애꾸눈’이요, ‘跛’(파)는 ‘절름발이’이다. 손기원 선생에 의하면, ‘斜視[애꾸눈]’의 주역 코드는, 이괘의 내호괘[☲]와 하층부 태괘[☱]에 근거하고 있다. 내호괘는 눈동자[2효]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태괘는 눈동자[3효]가 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니 그 내호괘와 태괘를 조합해 보면 두 개의 괘상이 '斜視'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절름발이[跛]’의 주역 코드는, 다리인 하층부의 태괘(兌卦, ☱)에 근거한다. 그런데 태괘의 2효가 음의 자리에 있는 것이므로 그 속성인 음(陰)으로 보면 진괘(震卦, ☳)가 되니, 이렇게 태괘와 진괘를 두 다리로 보면 불균형한 상태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름발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 ‘武人爲于大君’는 두 가지로 해석한다. ① ‘무인이 대군이 되는 격이다.’ ② ‘무인이 대군에게 대적한다.’ 무인은 육삼(六三)을 가리키고 대군은 중정의 실권자인 구오(九五)를 가리킨다. 육삼(六三)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志剛也] 하더라도 강양인 구오(九五)에 대항하거나 반발하면 아주 위험하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호랑이 꼬리를 밟으면 사람을 물게 되니 흉하다고 한 것이다.
· ‘位不當也’는 ‘위치가 마땅하지 않다’는 뜻. 음(飮)인 육삼(六三)이 양(陽)의 자리에 있음을 말한다.
* [강 설(講說)] ————
육삼(六三)은 이괘(履卦)의 유일한 음(陰)이다. 그래서 양(陽)들의 약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래서 ‘애꾸눈이라도 잘 볼 수 있고 절름발이라도 잘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하층부에 중심에 있지도 않고 바른 자리도 아니며[不中不正], 상층부에 진입한 상태도 아니다. 그런데도 유일한 음(陰)으로서 능력이 탁월하다. 육삼(六三)의 입장에서 보면 양(陽)들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손해를 보면서도 의리를 지키고, 일을 할 때에도 치밀하지 못하다. 육삼(六三)에게는 그런 양들이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이 불만이다. 그래서 반발하기 쉽다.
그러나 양(陽)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은 좋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계속 그들의 발목을 잡으면 양들은 육삼(六三)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범의 꼬리를 밟으면 물린다’고 한 것이다.
만일 육삼(六三)이 무력을 가진 무인(武人)이라면, 무력으로 상층부에 대항하게 되면 실권자인 구오(九五)가 육삼(六三)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직접 제거할 것이다. 그래서 ‘무인(武人)이라면 대군(大君)에게 직접 당한다’고 했다. 육삼(六三)이 양(陽)의 자리에 있으므로 속성이 뜻이 굳세기 때문이다.
애꾸눈이라도 잘 볼 수 있을 것이 한 것은 제대로 눈을 가진 경우에는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육삼(六三)의 위치는 마음이 왜곡되기 때문에 아무리 눈이 밝아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고 아무리 다리가 튼튼해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다. 그래서 상(象)에서 ‘족히 눈 밝을 수 없고, 족히 걸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정이천의『역전』에서 말했다. “육삼(六三)은 陰으로서 陽位에 거하여 뜻은 剛하고자 하나 體는 본래 陰柔이니, 어찌 그 行하는 바를 굳데 지키겠는가. 그러므로 장님과 애꾸눈이 보는 것과 같아서 그 봄이 밝지 못하고, 절름발이가 걷는 것과 같아서 그 가는 것이 멀지 못한 것이다. 재질이 이미 부족하고 또 처함이 中을 얻지 못했으며 행함이 正道가 아니고 柔로서 剛을 힘쓰니, 행함이 이와 같으면 이는 위험한 것을 밟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의 꼬리를 밟는다’고 말한 것이요, 잘 행하지 못하는 재질로 위험한 곳을 밟으니 반드시 禍難이 미칠 것이므로 ‘사람을 물어 凶하다’고 말한 것이다. ‘武人爲于大君’은 무력을 행사하는 포악한 사람이 사람들의 위에 거하여 그 조금함과 경솔함을 부릴 것이요, 순순히 행하여 멀리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닌 것과 같다.”
[傳] 三은 以陰居陽하여 志欲剛而體本陰柔하니 安能堅其所履리오 故如盲眇之視하여 其見不明하고 跛躄之履하여 其行不遠이라 才旣不足而又處不得中하고 履非其正이며 以柔而務[一作勝]剛하니 其履如此면 是는 履於危地라 故曰履虎尾요 以不善履로 履危地하니 必及禍患이라 故曰咥人凶이라 武人爲于大君은 如武暴之人而居人上하여 肆其躁率而已요 非能順履而遠到也라 不中正而志剛하여 乃爲群陽所[一有不字]與라 是以로 剛躁蹈危而得凶也라.
* [이괘(履卦) 구사(九四)의 효사] ————
[10履] ‘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
象曰,“愬愬終吉”志行也.’
구사(九四)는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조심조심하면 마침내는 길할 것이다.
상에서 말했다. “조심조심하면 마침내는 길한 것은 뜻대로 되기 때문이다.”
· ‘愬愬’(색색)은 ‘두려워하여 조심조심하는 모습’이다. 구사(九四)는 양이지만 음(陰)의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음(陰)의 기운을 쓰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조심하면 끝내 길하다.
* [강 설(講說)] ————
구사(九四)는 이행하는 상황에서 막 상층부에 진입하여 하층부를 직접 통솔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실권이 없다. 그래서 육삼(六三)을 직접 제어할 능력이 없다. 육삼(六三)의 저항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육삼(六三)과 정면으로 대립하면 다칠 수 있다. 오히려 육삼(六三)의 저항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아, 조심조심하여 반성하며 내공(內攻)을 쌓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결국 육삼(六三)이 제지를 당하고 구사(九四)에게는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 그래서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조심조심하면 마침내는 길할 것이다’라고 했다. 갓 부임한 선생님이 학생들로부터 실력 없다고 비판을 받을 때의 상황이다.
정이천의『역전』에서 말했다. “九四는 陽剛이고 乾體이니, 비록 陰의 자리에 거했으나 降이 우세한 자이다. 군주와 가까워 두려움이 많은 자리에 있어서 서로 맞는 義가 없고, 九五가 다시 剛決함이 過하므로 범의 꼬리를 밟음이 된다. ‘愬愬’(색색)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니, 만일 두려워하면 종국에는 吉할 것이다. 九가 비록 剛이나 뜻이 柔順하고 四가 비록 가까우나 머물지 않으므로, 능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마침내 위태로움을 면하여 吉함을 얻는 것이다.
[傳] 九四陽剛而乾體니 雖居四나 剛勝者也라 在近君多懼之地하여 无相得之義하고 五復剛決之過라 故爲履虎尾라 愬愬은 畏懼之貌니 若能畏懼則當終吉이라 蓋九雖剛而志柔하고 四雖近而不處라 故能兢愼畏懼면 則終免於危而獲吉也라
* [이괘(履卦) 구오(九五)의 효사] ————
[10履] ‘九五, 夬履, 貞厲.
象曰,“夬履貞厲”位正當也.
구오(九五)는 과감하게 실천해야 한다. 가만있으면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 상에서 말했다. “과감하게 실천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만있으면 큰 아픔이 있다는 그 자리가 바르고 마땅하기 때문이다.”
· ‘夬履’(쾌리)의 ‘夬’는 ‘결(決)’ 통용, ‘결단력을 가지고 과감하게 추진한다’는 뜻이다
· ‘貞厲’(정려)에서 ‘貞’은 여기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① ‘바르다’(『역전』) ② ‘굳세다’(손기원) ③ ‘참고 견디다’(『주역강설』)의 뜻이다. ①로 보면 ‘貞厲’는 ‘바름을 얻더라도 오히려 위태롭다’의 뜻이고, ②로 보면 ‘貞厲’는 ‘(결행을 하되) 굳세게 하면 위태롭다’는 것이므로 ①과 ②는 ‘부드럽게 이행하라’는 의미이고, ③으로 보면 ‘참고 가만히 있으면 뼈를 깎는 아픔이 있다’로 해석된다. ①과 ②는 결행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고, ③는 결행을 촉구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강 설(講說)] ————
구오(九五)는 전체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고 중정의 자리에 있으므로 리더로서 결단하여 이행해야 한다. 육삼(六三)의 반발로 인해 일이 잘 진전되지 못하고 주춤해 있는 상태에서, 구오(九五)에게는 전체를 위하여 일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하는 총책임이 있다. 만약 우유부단하면 전체가 침체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육삼(六三) 때문에 많은 양(陽)들이 다치게 되는데 양(陽)들이 다치는 것은 마치 자기의 피붙이가 다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자기의 살을 깎아내는 위태로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단(決斷)을 내려 과감하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 상(象)에서 그 근거를 말한다. 구오(九五)는 당당한 중정(中正)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역전』에서 말했다. “夬는 剛하게 결단함이다. 九五는 剛陽이고 乾體로서 지극히 높은 지위에 거하여 剛決에 맡겨 행하는 자이니, 이렇게 하면 비록 바름을 얻더라도 오히려 위태롭다. … 剛明한 재주가 있더라도 만일 自任하기를 오로지하면 오히려 위험한 방도가 되는데, 하물며 剛明이 부족한 자에 있어서랴. 周易 가운데 ‘貞厲’라고 이른 것은 뜻이 각기 같지 않으니, 괘에 따라 보아야 한다.”『本義』에서 말했다. “夬履를 경계한 것은 바로 尊位에 당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은 지위에 거하고 능히 오로지 할 수 있는 권세를 점거하여 剛決함을 自任하고 다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비록 가령 正을 얻었다 하더라도 위험한 방도이다.
[傳] 夬는 剛決也라 五以陽剛乾體로 居至尊之位하여 任其剛決而行者也니 如此則雖得正이나 猶危厲也라 … 有剛明之才라도 苟專自任이면 猶爲危道어든 況剛明不足者乎아 易中云貞厲는 義各不同하니 隨卦可見이라. [本義] 戒夬履者는 以其正當尊位也라 據至尊之位하고 據能專之勢하여 而自任剛決하고 不復畏懼면 雖使得正이나 亦危道也라.
*[이괘(履卦) 상구(上九)의 효사] ————
[10履] ‘上九, 視履考祥, 其旋元吉.
象曰, 元吉在上, 大有慶也.’
상구(上九)는 이행해야 하는 상황을 살펴보고 그 상서로운 것을 가려서 선회하면 크게 길할 것이다. 상에서 말했다. “크게 길한 것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크게 경사가 있는 경우이다.”
· ‘其旋元吉’에서 ‘旋’(선)은 ① ‘선회하다’(『주역강설』) ② ‘주선하다’(『역전』)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其旋元吉’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그 상서로움을 살펴서, 마음을 돌려 큰마음으로 하면 길하다’로 해석한다. 전체를 생각하는 원로의 역할을 말한 것이다.
· ‘大有慶也’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① ‘크게 경사로운 일이 있다.’’(『역전』) ② ‘큰마음으로 하면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손기원)
* [강 설(講說)] ————
상구(上九)는 조화롭게 이행하는 상황에서 집단의 최고 원로이다. 그런데 이괘(履卦)의 상구(上九)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냥 뒷방 늙은이가 아니다. 특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육삼(六三)은 정응관계인 상구(上九)가 달랠 수 있다. 지금 육삼(六三)의 문제는 심각하다. 상구(上九)는 이를 파악하고 발걸음을 돌려 적극적으로 육삼(六三)을 달래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전체가 발전하는 일에 동참하여야 한다. 그런 만큼 그를 달래서 제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윗자리에 있으면서 크게 경사가 있다’고 한 것이다.
『역전』에서 말했다. “상구(上九)는 履卦의 끝에 처했으니, 그 終末에서 行한 것을 살펴보아 善惡과 禍福을 詳考하되 만일 그 周旋함이 완벽하면 善하고 또한 길할 것이다. 琁은 周旋함을 완비하여 지극하지 않음이 없음을 이른다. 사람이 행한 것은 그 종말을 상고하여 보아서 만일 終과 始가 두루하고 완벽하여 瑕疵가 없다면 선이 지극한 것이다.”
[傳] 上處履之終하니 於其終에 視其所履行하여 以考其善惡禍福호되 若其旋이면 則善且吉也라 旋은 謂周旋完備하여 无不至也라 人之所履 考視其終하여 若終始周完无疚면 善之至也라.
¶ [복습 정리] 주역 [10] 이괘(天澤 履)의 효사
‘上九, 視履考祥, 其旋元吉.’
‘九五, 夬履, 貞厲.’
‘九四, 履虎尾, 愬愬, 終吉.’
‘六三,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咥人, 凶, 武人爲于大君.’
‘九二, 履道坦坦, 幽人貞吉.’
‘初九, 素履, 往无咎’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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