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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려오는 신앙인격
본문 : 마태복음 5:7-10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강론
오늘은 산상수훈 8복 중 5-8번째 복을 상고하겠습니다. 1-4번째 복의 제목을 “올라가는 신앙인격”이라고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8복 중 1-4번째 복은 마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시내 산으로 올라가는 모세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함”이란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단계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하)하십니다.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하게 하시는” 정상(頂上)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5-8복의 제목을 무엇이라 정하면 좋겠습니까? “내려오는 신앙인격”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5-8번째 복은 하나님과 교제한 모세가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내려오는 단계와 같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배부름을 받은 자”는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점에서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의 변화 산의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면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 17:15-16)한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가 배부름을 받은 자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442장)
찬송가 가사 대로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⑤ 이런 맥락에서 다섯 번째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7상)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자”이겠습니까? “심령의 가난함을 깨닫고 애통하고 온유해지며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가 배부름을 얻은 자”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입은 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발 씻음을 받은 자만이 다른 사람들의 누추한 발을 씻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하)하십니다. 우리가 “배부름을 얻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엡 1:6)인 것입니다. “은혜로, 사랑으로, 긍휼로, 자비로” 배부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란, 한마디로 표현하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 8)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18:32-33). 만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고 경고하십니다.
변화산상의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17:4)하고 거기 머물기를 원하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명하십니다. 그리하여 “긍휼히 여기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⑥ 여섯 번째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8상)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청결한 자이겠습니까? “심령의 가난함,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맛본 자만이 “마음이 청결한 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청결 의식”을 유난히 중요시했습니다. 그 한 예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고 비난한 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2, 11)고, “마음”이 문제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란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이었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이 되어 이기적(利己的)인 욕심에서 떠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빌 2:5)의 마음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령은 맑고 잔잔한 호수와 같아서 얼굴이 물에 비취게 마련입니다.
㉠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하)하십니다. 로마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합니다. 어찌하여 불신자들이 우주의 광대함과 오묘한 질서를 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합니까? 한마디로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통해서 주님을 볼 수만 있다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하심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같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롬 8:22)하는 소리도 듣게 될 것이요, 야고보처럼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우는 소리도”(약 5:4) 들을 수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⑦ 일곱 번째 복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9상)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자이겠습니까? “심령의 가난함,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 마음 청결함”을 입은 자라면 필연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이런 사랑, 은혜, 긍휼을 입은 자라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화평(和平)하게 하는 자 곧 Peace maker입니다.
㉠ “화평”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하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3-24)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란 복음 복음전도의 사명인 것입니다. 전도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서 화목시키는 사역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화평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따르게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하)하신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화평”하게 하는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천국”(天國)하면 “왕과 백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왕은 바로 “네 아버지”시라는 뜻이 됩니다.
누구의 아버지란 말씀인가? “화평하게 하는 자”의 아버지이십니다. 산상설교 중에는 하나님을 “너희(네)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14번 이상이나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다시 상기시킵니다만 8복의 사람은 여덟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 이루어져가는 신앙인격인 것입니다.
5:44-45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하십니다.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⑧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10상)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를 위하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하신 말씀과 결부되는 “의”인 것입니다.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하신 주님은, 11절에서는 “나를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면”하고, 의를 자신과 동의어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하신 하늘의 시민권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8복의 사람을 세상이 환영할 것인가? 아닙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하면서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벧전 4:3-4)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고 말씀합니다. 즉 신분과 소속과 영이 다르기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핍박이 없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8복의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로 시작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로 마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고도 주목해야 할 요점입니다. 왜냐하면 “심령의 가난한”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당당한 군사로 성장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10하)하십니다. 8복은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하십니다.
이 말씀을 독립된 복으로 보아 9복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여덟 번째 복의 설명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마지막에 이르러 “선지자”(先知者)를 언급하심으로 8복의 사람이 특히 목회자들에게 요청되는 신앙인격임을 나타내신 다는 점입니다. 목회자의 신앙인격이 8복의 사람이 되어 주님을 닮기만 하다면 성도들도 주님을 닮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고 “박해를 받느냐? 칭찬을 받느냐?”라는 두 방면을 말씀한다는 점을 주목해야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시금석인양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 목회자들이 투옥을 당하고 순교를 당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너는 설교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사람 앞에 서 있는 양”하고 있느냐? 아니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한 신전신앙의 자세로 하고 있느냐. 이 둘 중 어느 편에 기울어져 있느냐에 따라 “참 목회자냐, 거짓 목회자냐”가 판가름이 난다는 뜻입니다.
이제 8복의 말씀을 마쳐야 하겠습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신앙인격 속에는 8복의 신앙인격이 어느 부분 형성되어 있다 하겠니다. 문제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엡 4:13) 사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8복의 사이클은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제도 심령이 가난하고, 그래서 계속적으로 애통하고, 그러므로 이제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 헐떡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인격이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바울의 진술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고전 9:26-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