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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쎄레모니 요일4:7-8
주신 말씀 요일4:7-8절 창3:21, 출20:2, 룻기말씀을 중심으로[사랑의 쎄레모니]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축구 선수들이 골을 넣으면 반지키스 기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거나 코너깃발에 복싱을 하거나 발차기를 하거나 여러 가지 쎄레모니를 합니다.
요즘 일반인사이에서 사랑한다는 세레모니는 눈웃음을 가득 머금고 양팔을 머리에 올려 핫트를 날려 러브콜을 하는 것이 대세인가 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쎄레모니를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흔히 우리가 고전13장을 사랑장이라 하지요. 사랑의 실천편입니다.
사랑의 원리는 요일4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원리는 사랑의 맥 즉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고 계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쎄레모니를 찾아가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쎄레모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쎄레모니를 성경에 어떻게 나타내셨나요?
첫째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창3:21)
우리는 흔히 창3: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동정녀탄생과 악한 마귀사탄을 이기시고 만민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을 중심으로 한 불의한 세력과 예수님을중심으로한 의로운 세력간의 영적 싸움에서 의로운 예수님의 세력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3일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와 버금가는 말씀이 바로 창 3장21절 말씀으로 사랑의 원리의 출발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 즉 카테노트 (כתֽנ֭וֹת옷들) 오르(עֻוׄר가죽)는 카테노트가 코트를 말하는 것으로 몸의 일부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인간의 몸 전체를 가려주는 것을 말하고 복수로써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즉 아담와 하와가 무화가 나뭇잎으로 생식기만 겨우 가렸다면 하나님께서는 수치뿐만 아니라 추위와 찔림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카테노트 즉 롱코트를 한 벌이 아니라 두벌 이상을 주셔서 덮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덮어 준다는 것은 속죄를 말하고 덮어 주시므로 그 안에서 새로운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하얀털이 솟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가죽옷은 양의 털이든 소의 털이든 짐승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즉 인생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 사람을 대신 해 죽어줄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고 구약시대는 동물이 희생을 대신하여 피 흘려 죽음으로 속죄를 대신했으나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오고 오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하나님 값으로 갚아주시어 우리를 예수님 소유 삼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의 은혜 즉 사랑의 시작 사랑의 쎄레모니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쎄레모니를 성경에 어떻게 나타내셨나요?
둘째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출20:2)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인도하여낸(호체티카חוצאתיך)는 앞서가다, 나가버리다, 는 뜻인 야차(יצא ) 에서 유래한 말로 올라오다, 끄집어내다, 분리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의 역사가 전적으로 창조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의지와 수고에 의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노예로 전락하여 아무런 힘도 없었던 이스라엘을 먼저 찾아가시어 그들의 손을 잡고 절망의 땅 애굽에서 건져 올리시고 , 끄집어내시되 pay the price 곧 값을 지불하시고 사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문명시대라는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부족들은 [다우리]라 해서 총각이 아내를 데려올 때 돼지 한 마리 값을 장인에게 주고 데려온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소나 돼지 값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값으로 사주신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애굽에게 열가지 재앙을 통해 천지만물이 바로(세상의 왕)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분명한 멧세지를 남겼을 뿐 아니라, 열 번째 재앙을 통해 모든 첫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분명한 표식(싸인)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일조를 자기 나름대로 조정하거나 감사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도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 값으로 우리를 사셨고 특히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님 값으로 우리를 사시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Kingdom of the God)로 인도해 내신 줄 믿습니다.
사43:1“...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라고 창조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난날 죄와 허물로 죽어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고 우리의 손을 잡아 영원한 멸망에서 끄집어내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줄 믿고, 더 이상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창조주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복인 줄 믿고 감사해야 될 줄 믿습니다.(창1:26-29)
하나님의 사랑의 쎄레모니를 성경에 어떻게 나타내셨나요?
셋째로 기업을 무르셨습니다.(룻기)
룻4:10“...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을 그의 형제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
룻4:14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
기업부를자 (גאל꼬엘)은 후손이 없어 영원히 그 가문의 이름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여호와로 인해 기업 무를 자가 생겨 그 가문을 다시 회복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룻기서를 통해 기업무를 책임이 있었던 더 가까운 친족은 아무여라 불림을 받은 것은 그가 형제의 불행을 보고도 욕심에 치우쳐 말씀을 저버렸기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것을 봅니다.
그에 반해 보아스는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그의 아내로 맞이하고 말론의 땅을 사서 룻에게 주고 룻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보아스의 자식이 아니라 말론의 자식이 되어 말론의 가문을 잇게 하는 것 그것이 [기업무름]인데 모든 손실을 감수하고 이를 시행하였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통해 낳은 그 아들이 오벳으로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입니다.
룻4:18“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하며 베레스가 구속사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친족중 가까운 친족 순으로 기업무를 의무와 책임 그리고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손익계산하고 사리사욕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직 심판 날에 멸망을 받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국민일보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을 믿는 사람이 60%대로 추락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교인들 중에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도 믿지 않은 채 마음의 양식 좋은 말씀 축복의 말씀만 들으려고 출입하는 사람이 40%를 육박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온 교회 성도 여러분은 100% 하나님의 창조와 재림을 믿으시죠? 아멘
그렇다면 자기희생을 전제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곧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기업무를 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기에 보아스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된줄 믿습니다.
성도는 사람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행하는 삶을 살게되면 하나님께서 기업 무른 보아스에게 주신 놀라운 복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룻이 그 시모 나오미의 신앙을 본받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이스라엘로 왔고 그가 시모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시모를 봉양하기에 정성을 다하니 이를 의롭게 보시고 룻을 이스라엘을 세운 라헬과 레아같게 하시는 여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영예와 복을 주신 줄 믿습니다.
성도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믿음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여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를 기억하시고 놀라운 복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쎄레모니를 성경에 어떻게 나타내셨나요?
넷째로 사랑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일4:7-8)
요일4:7절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는 하나님의 참사랑에 근거하여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놀라운 이적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즉 이미 빛가운데 속한 자나 거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리 사랑 즉 종적인 사랑은 여기에서(ή άγάπη 해 아가페 )는 특정한 사랑 즉 신적 기원을 지닌 사랑으로 죄인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남녀간의 육체적이고 성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έʹρως)나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Φιλία)와 달리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무조건적인 신적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속한 참된 성도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종적인 사랑을 받는 자래야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는자요 , 하나님께 속한 자로써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 그곳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성도는 믿음의 순종을 보일 때 이 둘이 만나는 곳에서 놀라운 이적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4:7절에서 주의해야 할 단어는 나서(게겐내타이γεγέννηται)는 부모가 자녀를 출산하는 것과 불신자를 복음으로 거듭나게 하여 양육시키는 것 모두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진실된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자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알고(γινώσκει)라는 단어로 아주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관계적인 데서 오는 지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며 깊이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기에 사랑하는 자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함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그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형제를 사랑하는구체적인 사랑으로 보여 드려야 합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사랑의 표현인줄 알면 철든 것이지요.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심정을 알 수 있듯이 형제를 사랑하는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쎄레모니를 성경에 어떻게 나타내셨나요?
첫째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창3:21)
둘째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출20:2)
셋째로 기업을 무르셨습니다.(룻기)
넷째로 사랑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일4:7-8)
젖먹이에게 가죽옷을 덮어 주시고, 청소년에게 손을 잡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행함으로 기업무름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십자가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여 주신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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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귀하신 분들께서 은혜 충만하시기 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