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을 끌어당기는 힘을 자기력이라 한다. 자기력이 있는 천연광석을 자철석이라 한다. 강철을 인공적으로 자기화하여 자석을 만든다. 자석은 철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가진 물체이다.
숱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놀라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처음 들어와 손바느질이 기계바느질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 재봉틀을 구매할 때, 군청이 소재한 대처의 판매상이 당시 목탄(숯)차인 버스로 신작로를 낀 정거장까지 운반했다. 기별을 받은 아버지가 정거장에서 집까지 지게로 지고 왔다. 함께 따라온 판매상이 기계의 구조와 사용법을 간단히 알려주고 돌아갔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재봉털 구경을 하려고 몰려와 박음질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서툰 솜씨고 실을 연결하여 박음질하다가 그만 어머니 검지 손톱이 재봉틀 바늘에 찔리고 말았다. 바늘귀가 있는 바로 위쪽이 부러져 손톱에 박혔다. 어머니는 딱딱한 손톱에 바늘을 뽑지 못해 피가 흐르는 검지를 쥐고 고통에 신음했다.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빨리 바늘을 뽑지 않으면 혈관을 따라 온몸을 돌아다녀 몸이 여위고 결국 죽고 만다는 등,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떠들었다.
당시 면 소재지에 현지의사가 있었지만, 바늘을 뽑는 의술이 없다고 했다. 마을 이장이 어느 집에서 지남철을 봤다고 했다.
지남철은 쇠를 당기는 힘이 있어 박힌 바늘을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부리나케 뛰어가 지남철을 빌려왔다. 어머니 검지 손톱에 지남철을 갖다 붙이자, 신기하게도 부러진 바늘이 뾰족이 올라왔다. 올라온 바늘을 족집게로 뽑자, 둘러선 사람들이 환호했다. 쇳독이 있으니 머큐로크롬액으로 소독을 해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온 마을을 수소문하여 소독약을 얻어와 바늘 뽑아 올린 곳을 소독했다. 다행히 왼손이라 물에 손을 넣지 않고 며칠 만에 치유할 수 있었다.
자석과 소독약 덕을 톡톡히 본 고마움에 어머니는 재봉틀 바느질로 후하게 보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아버지는 군청 소재 읍내에서 자석과 머큐로크롬을 가정 필수용품으로 구매하여 이웃 사람들이 성처가 나면 소독약을 발라주었다.
자석은 10cm 정도의 쇠막대 절반을 나누어 청색과 적색으로 색칠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 쇠붙이를 보물처럼 귀히 여겼다. 몰래 가지고 나가 개울가 모래더미에 굴리면 흑색 철분이 까맣게 달라붙었다. 자석은 흥미로운 장난감이었다. 종이를 덮고 쇳가루를 뿌리면 타원형의 자기력선이 생겼다. 자석을 움직이면 쇳가루가 누웠다 섰다 하는 것이 요술 같았다. 마을 아이들은 신기한 광경을 보고 나를 요술쟁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에 본 고모는 시집갈 때 가져갈 혼수용으로 베갯모와 이불에 쓸 비단에 수를 놓았다. 마을을 찾아다니는 방물장수가 오면 머리핀, 수실과 바늘을 구매했다. 낮에는 밭에서 들일을 하고 밤이면 호롱불 곁에서 수를 놓았다. 어쩌다 방안에서 바늘을 잃으면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찾기가 힘들었다. 당시에는 방바닥에 고초와 무말랭이도 널어놓고 말렸다. 가늘고 짧은 바늘이 음식물에 섞여 들어가 사람 목숨을 빼앗는 일도 있었다. 우리는 자석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다.
주택을 신축하면서 양질의 건축자재로 짓기 위해 자재를 직접 공급하기로 했다. 목수들이 못 가방에 못을 가득 넣고 질질 흘리고 다니면 거북하였다. 주의하라고 한마디 하면 건축주가 잔소리 많다고 인부들끼리 투덜거려 조심스러웠다. 그들이 퇴근하고 나면 자재들과 톱밥, 대팻밥이 흩어진 곳을 다니면서 자석으로 떨어진 못을 찾아 못 가방에 담아 주었다. 쩨쩨하다고 수군거렸지만 괘념치 않았다.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막대자석은 작은 쇠붙이만 붙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과학적 소양을 길러주는 중요한 도구가 됐다.
자연 속의 자철광 암석에서 자기력이 작용하는 두 극은 음양의 조화로 생명체의 연속성을 이뤘다는, 검증되지 않은 나만의 단견을 가지고 있다. 두 극이 지닌 자기력은 평형을 이루지만 생명체는 좀 다르다. 한정된 골간에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 공급원은 한정되어 있기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남녀 간에 밀고 당기는 힘의 기울기도 비슷하지 싶다.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우세하려고 든다.
젊은 시절에 나는 남존여비 풍조에 은연중 얹혀살았다.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도 달라져 이제는 가히 여존남비가 되었다. 이제 꼰대가 되고 보니 아이들이 모두 어미 진영으로 몰려가고 말았다. 아비 짓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고립무원이 되었다. 그래도 젊을 때는 내 진영도 튼튼했으니 후회는 없다.
막대자석, 말굽자석 자침의 N, S극, 그 사이 인력과 척력은 늘 동등한 자기력을 지닌다. 나와 아내도 그렇지 싶다. 작은 것에서 부터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남존여비, 여존남비도 세월이 더 흐르면 없어지고 남녀평등이 되어 여성가족부의 존폐 시비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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