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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시편54편1~7절
제목 :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윗의 저작으로 시기는 표제에서 밝힌 대로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즉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우리 곳에 숨었다고 고발한 때입니다.
사울은 도액으로 하여금 제사장 85명을 죽입니다(삼상22:18).
*삼상22:18 “[18]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19]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유일하게 아비아달이 도망하여 다윗에게 옵니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온 후(삼상22:20),
*삼상22: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불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치자 다윗이 그 군사 600명(그때는 이미 600명이 되었음-삼상23:13)을 거느리고 가서 그일라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일라의 배신자가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다윗은 다시 피하여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삼상23:14).
그때 요나단이 수풀에 들어가서 격려하고 돌아갔습니다(삼상23:16~18).
그러나 또다시 십 사람들이 기브아로 가서 다윗이 자기들 가운데 숨었다고 고발하였으니 본편이 그때의 저작입니다.
십 사람들이 다윗의 숨은 것을 사울에게 두 번 고자질하였습니다.
*삼상23:19절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26:1절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본편은 그 첫 번째 고했을 때의 일로서 표제의 설명이 그때의 말과 일치합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우리와 함께····숨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였고,
두 번째는 “우리와 함께”라는 말이 없고 장소만 지적하면서 “숨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였는데,
본편의 표제는 분명히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여 첫 번째 말한 것과 일치합니다.
이 고(告)함을 다윗이 알았음인지 곧 하길라 요새를 떠나 마온 황무지로 갔다가 사울의 3,000 정예병에게 꼼짝 못하고 잡힐 뻔하였는데 마침 블레셋 사람들의 침략을 알려 왔으므로 사울이 포위병을 풀고 돌아가므로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삼상23:24~28).
*삼상23:24~28절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이 시편은 대적들에게서 구원을 간구하는 전형적인 개인 탄식시로,
배경은 사무엘상23:19의 사건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대적들에게서 하나님의 보호와 보응을 신뢰하며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1~3절은 기도이고, 4~5절은 위안이며, 6~7절은 서원입니다.
1. 기도(1~3절)
1) 구원하시고 변호하소서(1절)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사람들이란 누구나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빠지게 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나는 정말 죽을 죄인입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권력을 남용하여 나를 죽이려 한다면 이것은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 후자라면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악인은 심판하시고 그의 굴레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건져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기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왜요? 위기 때에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진정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에 훼손됨이 없도록 구원하여 주셔서 자기가 옳은 것을 판단하여 나타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의 이름”은 바로 앞에서 부른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리킵니다.
이 이름은 창조하신 능력신으로서 그 창조물을 통치(섭리)하고 계시는 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통치하심에도 창조의 능력을 그대로 발휘하셔서(롬4:17)
만물을 마음대로 처치하시기도, 가꾸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요15:2)
악한 자를 처벌하시고 의로운 자를 보호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이름에 손상됨이 없도록 나를 구원하여 달라고 할 때에는
자기가 바른 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윗에게 허물이 있음이 아니고
사울이 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삼상20:31, 23:17),
악하게 구는 것임을 그 아들도 입증하였습니다.(삼상19:1~5, 20:32)
*삼상20:32절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고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의 이 악한 손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으로 하나님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를 붙드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라고 합니다.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함은 하나님의 그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하셔서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을 심판하여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단순히 구원해 주시기만 구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여 자신으로 의롭게 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구시가 사울에게 다윗을 악하게 말하였을 때에도
시편7:8절에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하였고,
언약궤를 다윗 성 시온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안치한 후(대상15:1, 16:1)
얼마 안 되었을 때에도 시편26: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다윗는 양치는 소년시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자와 곰도 죽였고(삼상17:34~37),
블레셋 대장 골리앗도 쳤으니(삼상17:45~49),
이 피난길에서야 얼마나 더 하나님만 의지하였겠습니까?
이를 드러내 달라는 기도이니,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를 보호하시는 의로우신 분이심을 드러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 자신의 의로움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어서
이렇게 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한 과부의 호소를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 교회의 기도의 내용이라고 포세트는 말하였는데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눅18:3)라고 한 말이
헬라 원어로는 “내 원수로부터 나를 의롭게 하옵소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기도가 될 때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어서
-원수 마귀 앞에 의로운 자로 드러나게 하여 달라는 것이 되겠습니다.
2) 기도를 응답하소서(2절)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 39:12과 55:1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며, 본질적 의미상으로는 1절의 반복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의미상의 반복을 통하여
(1)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탄원이 반드시 받아들여 지기를 소원하며,
(2) 자신이 대단히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간절히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기도를 응답하여 달라고 하는 간구이니
하나님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의 기도는 으레 들어주시기 마련입니다.
기도 할 때마다 가까이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다 응답하십니다.
*신4:7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
*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145:18절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22:24절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시91:15절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사58:9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렘29:12~13절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응답 시기의 이르고 늦음은 있겠으나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사65:24절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단9:21절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늦음은(눅18:1~7)=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주님께서도 마7:11, 눅11:13절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으니 어찌 구하고 얻지 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마7:7~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약4:2~3절 말씀에“[2]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잘못 구하는 것은 안 됩니다.
3) 기도 들으실 이유(3절)
“[3]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기도 응답을 하여 주셔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찾아 죽이려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므로 그들에게서 속히 구원해 주셔야 하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낯선 자들”은 다윗의 구해 준 은혜도 저버리고 배신한 십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짐승도 저를 길러 주는 주인을 아는 법입니다.(사1:3)
*사1: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더욱이 이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피난 중 위험을 무릅쓰고(삼상23:3),
같은 지파 사람이라고 그일라를(수15:44)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였는데,
그일라 사람들이 도리어 다윗을 사울에게 붙이러 하므로(삼상23:12),
부득이 그곳을 피하여 가까운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땅
십 사람들에게로 피신하였는데,
그들 역시 같은 지파 사람이면서 다윗을 돕지 못하고 사울에게 고했으니
믿고 간 다윗에게는 배신감이 크지 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그 후 같은 지파 사람인 나발에게도(삼상25:2~3) 배신을 당했으니(삼상25:10~11) 얼마나 분했으면 후일 “나발”이라는 시를 짓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시편14:1, 53:1절의 “어리석은 자”라는 말이 “나발”입니다.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포악한 자들”은 사울과 그 도당들을 가리킨 것입니다(삼상23:15).
*삼상23:15절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생명을 수색함”은 죽이려고 찾는 것을 뜻함이니 강포한 자들의 잔인성을 알 만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은 하나님 없이 행동하는 자들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는 다윗을 해하려고 애썼던 외인, 곧 강포한 자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며 특히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아니했었음을 뜻합니다.
사실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자신에게서 떠난 후 악령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삼상 16:14;18:10, 11).
반면에 다윗은 주를 자기 앞에 모시는 삶을 살아갔었습니다(16:8).
*시편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2. 위안 (4~5절)
1) 하나님께서 돕는 자가 되심(4절).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절 머리에 지시 분사 “힌네”(보아라)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돕는 자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였습니다.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자들이 하나 둘도 아니요 3,000정예병이,
그것도 왕과 함께 왕권으로 수색하고 있는데(3절),
그들을 향하여 “보아라”나늘 돕는자가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하나님을 당하겠느냐 하는 뜻이니
이 어찌 보통 신앙의 사람으로서 가능하겠습니까?
그 도우신 분이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오(시121:1),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시는 분이시므로(시121:4),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영혼을 지키신다고(시121: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생명을 뉘 능히 해칠 수 있겠습니까?
시편118:6절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라고 하였고,
사도행전18:10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는 분이심을 보고,
금방이라도 잡혀 죽을 위험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기를 돕는 자이심을 보라고 합니다.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니이다”라고 함은 많은 붙드는 자 중의 한 분이 시라는 뜻이 아니고, “붙드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상반절에 “돕는 자시라”는 말을 붙든다는 다른 말로 중복하여 강조한 것입니다.
2)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심(5절)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의인의 위안이 여기에 있으니 곧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의인을 구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10절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자기도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신 갚으심이 나타날 때에
성도들이 참고 믿음 지켰던 위로를 받습니다.
“악으로 갚으시리니”의 “갚는다”는 말이 “돌아가다”, 돌아오다, 돌리다, 돌이키다의 뜻을 가진 말로서 악인이 행한 악이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그 죽음이 그 나온 사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즉 다윗에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어도(삼상24:3~4, 26:7~8) 다윗이 죽이지 아니하니 종국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여
자기 손으로 제 생명을 죽였습니다.(삼상31:4),
*삼상31:4절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라고 하였습니다.
그 죽음이 자기에게로 돌아가되, 성경에서 다섯 사람의 자살자 중에 하나가 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창9:6) 살인자까지 된 것입니다.
“주의 성실하심”은 언약을 신실되이 이행하시는 신실성을 말합니다.
의인은 구원하시되 악인은 징벌하시는 상선벌악하심이 변함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악을 행한 자의 악이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7:16절에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 “돌아가고”라고 한 말이 본절의 “갚으시리니”라고 한 말과 같은 말입니다.
악인이 발한 악도 그 악인에게로 돌아가게하신 하나님은,
선한 것도 선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며,
그것이 그 성실하신 심판 원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마10:12~3절에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받아지면 같은 선인이라 서로 나누어 성도를 얻게 되고,
받아지지 않으면 그대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니,
선만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남을 위한 자기의 기도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로 돌아왔다고 하였고(시35:13),
또 남을 핍박하고 죽이려 한 자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 저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니(시109:16~17)
다윗은 이 사실을 친히 겪고 당했던 것이요 그 결과도 다 보았던 것입니다.
3. 서원(6~7절)
1) 낙헌제 드리겠다고 함(6절)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이 서원은 다윗의 확신이 나타나 있습니다.
구원하여 주실 것을 확신함에서 낙헌제를 드리고 감사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낙헌제”는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낙헌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자기 자신을 드려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불치병에서 치유를 받게 되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이제 남은 생애를 오직 주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낙헌제입니다.
사실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낙헌제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의 낙헌제는 감사제로 드리는 낙헌제이니 악인에게서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하여 드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앞에 부른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신실되이 이행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이름입니다(레26:44)
그러므로 “이름에 감사함”은 언약하신 대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하여 주실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 찬송하겠다는 귀한 신앙입니다.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는 감사 찬송하는 이유입니다.
“여호와”만 이름이 선하므로 그 선하신 이름에 감사 찬송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선하다 함은 이름에 계시된 대로 신실되이 언약을 이루어 주심 곧 구원하여 주심을 인하여 감사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2) 낙헌제 드릴 이유(7절)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본절이 전절 끝에서 말한 주의 이름이 선하신 이유 설명인 동시에 전절 전체의 이유 설명입니다.
곧 그 이름이 선하신 이유가 그 이름에 계시된 대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나로 목도하게 하신 까닭이란 것이요,
그러므로 그 선하신 이름에 감사 찬송하면서 낙헌제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건지시고”와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가 모두 과거 완료로서 벌써 하나님의 이름의 선하심을 다 보았다는 것이니 그 만큼 확신에 확립된 신앙입니다.
다윗만 아니라 우리도 반드시 목도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1,4,7절).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만 도움을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하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각박해져 살아갈 힘을 잃어갈 때, 이 모든 상황에서 나늘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2)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5,7절).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영광과 존귀로,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와 심판으로 각각 보응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얼마나 신실한 분인지 보이십니다.
진리가 사라져가고 불의가 득세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눈앞에 계속 펼쳐질지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도 힘차게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인생에 하나님이 없을 때, 죄악 된 삶이 시작 됩니다(3절).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대적자들이 하나님을 자신 앞에 두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곧 이들은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악행을 서슴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내 중심에,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2)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6,7절).
시인은 포악한 자들에게서 생명을 위협받는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시인은 포악한 자들에게서 생명을 위협받는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을 조여 오는 문제들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문제들을 해결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 고통을 해결해주실 것을 확실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문제가 나를 가로막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혹시 문제에만 매달려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때일수록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리 높여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