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의성김 원동파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갈암집을 보다가 금옹 선생에 대한 편지 글을 올립니다. 장달수
김학배(金學培)1628년(인조 6, 무진)∼1673년(현종 14, 계축)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
고조부는 운암(雲巖). 조부는 시경(是㯳). 아버지는 할옹(豁翁) 암(黯).
표은(瓢隱) 김시온의 문인.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예학에 조예가 깊은 송준길(宋浚吉)이 유학을 강론할 때 이를 듣고 명쾌한 견식을 펴서 송준길의 칭찬을 크게 받은 바 있다.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되어 전적. 예조좌랑을 지내고. 1668년 성균관 안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이 새로 설치되자 이단하(李端夏)·김만중(金萬重)·박신(朴紳)·홍도(洪覩) 등과 함께 교정관에 임명되었다.
1671년 固城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며 청빈한 관료로 칭송을 받았다.
경절사(景節祠)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금옹문집》이 있다. 「墓碣銘」(權瑎 撰)
갈암이 금옹을 두고 “학문이 정심하여 유림의 영수가 될 만하다.”라고 칭찬했다.
갈암선생의 맏자부 의성 김씨가 금옹의 종매(從妹)이다.
존재 이휘일이 동생 갈암에게 보낸 편지에 어진 자부와 좋은 벗(금옹)을 만났다고 했다.
갈암집 제1권
김천휴(金天休) 학배(學培) 에 대한 만사 2수
반생토록 허둥지둥 길은 아득히 먼데 / 冥行半世路遙遙
해 저물녘 나루에서 내 벗을 불렀었지 / 日暮津頭我友招
비루한 나 외람되게 산석으로 쓰이는데 / 吾陋猥當山石用
어진 공은 흙담에 아로새겨 주려 했지 / 公仁便欲土牆雕
법문에 천도는 끝내 믿을 수 없지만 / 法門天道終無賴
맑은 절개 세상에 조금도 근심할 게 없지 / 淸節人間不少憀
지난해 선형과 막역한 교분 맺었으니 / 往歲先兄交莫逆
구원 그 어드메서 다시 서로 만나실는지 / 九原何處更相邀
만년에 정을 나눌 벗이 필요했는데 / 末路交情有所須
그대는 세인들과 달리 나를 좋아했지 / 惟君不世獨憐愚
천 갈래 갈림길에서 서로 찾고자 했고 / 千差岐路要相討
백년 평생 흉금의 기약 변치 말자 했지 / 百載襟期誓莫渝
참으로 금리의 우호를 이루려나 했더니 / 準疑眞成錦里好
낙연의 부름 저버릴 줄을 어이 알았으랴 / 那知虛負落淵呼
마음 아파라 어디에서 다시 만나 볼꼬 / 傷心底處重承晤
이 몸 죽지 않으면 훗날 고자를 어루만지리 / 遲死他年儻撫孤
[주1]해 …… 불렀었지 : 김학배와 벗으로 지내면서 서로 반가이 만나곤 했다는 뜻이다. 《시경》 〈포유고엽(匏有苦葉)〉에, “손짓하며 부르는 뱃사공에게 남들은 건너도 나는 건너지 않노라. 남은 건너도 나는 건너지 않음은, 나는 내 짝을 기다려서이다.〔招招舟子 人涉卬否 卬須我友〕” 하였다.
[주2]비루한 …… 했지 : 돌처럼 어리석은 나는 외람되게 조정에 등용되었는데, 어진 그대가 나를 좋게 보아 주어 벗으로 잘 대했다는 뜻이다. ‘흙담에 아로새긴다’는 것은, 재여(宰予)란 제자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고 거름 흙으로 만든 담장은 흙손질할 수 없다.〔朽木 不可雕也 糞土之牆 不可杇也〕” 하였던 《논어》〈공야장(公冶長)〉의 구절을 차용하였다.
[주3]법문(法門) : 법도가 있는 가문이란 뜻으로, 《맹자》에 보이는 법가(法家)와 같다.
[주4]천 갈래 …… 했고 : 서로 헤어져 있어도 언제나 찾아가 만나려 했다는 뜻이다.
[주5]금리(錦里) : 경상북도 안동(安東)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으로 갈암이 금리라고 개명하였다.
[주6]낙연(落淵) : 경상북도 안동 임하면 수몰 지역에 있던 폭포로 경치가 좋아 유람 장소로 유명하였다.
[주7]이 몸 …… 어루만지리 : 김학배가 보고 싶으면 훗날 그의 아들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겠다는 것이다.
서(書)
김천휴(金天休) 학배(學培) 에게 보냄 정미년(1667)
현일은 궁벽한 산골에서 두문불출하며 세상의 정세를 알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마침 탐라(耽羅)의 소식을 들었는데 당황스럽고 놀라워서 꿈인가 의심하였습니다. 처음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 의리는 인심에 누구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식자들 또한 똑같이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명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300년 동안 사방의 오랑캐를 신하로 삼고 만방의 부모국이 되었으니, 모든 이 천지간의 살아서 기운이 있는 자라면 누군들 존모하고 친히 하여 떠받들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우리 동방은 다른 번국(藩國)들과 특별히 달라서 대의(大義)는 논할 것도 없고 끝없이 깊은 은혜를 입어, 비록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만 번을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라는 말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변경에 들어온 상선(商船)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계책이 있어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뜻밖에 만나서 이런 기우(奇遇)가 이루어졌으니, 이 일로 인하여 우리의 뜻을 표하여 우리의 원통해하는 정성을 펴야 할 것이고, 만일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또한 그들의 가는 길을 터주고 그들의 부족한 것을 제공하여 지난날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삼가 듣건대 조정에서의 논의가 화복(禍福)과 이해(利害)의 설로 인해 감히 요행으로 구차히 면할 계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먼 밖에서 전해 듣고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아파 차라리 살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초라한 곳에 사는 저 같은 천한 사람이야 애당초 말할 것도 없지만, 노형(老兄)은 대대로 충정(忠貞)한 집안이고 이름이 책서(策書)에까지 올라 있으면서 어찌하여 성상의 구언(求言)하는 하교로 인하여 한마디 말을 해서 성상이 마음을 열고 깨우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마침 서로 어긋나 다만 편지로 이런 거칠고 망녕된 말씀을 올리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與金天休 學培 ○丁未
玄逸杜門窮峽。不復知世間爻象久矣。此來適聞耽羅信息。怳忽驚惋。疑若夢寐。初聞涕下。悲不自勝。以義理人心之所同然。竊計海內有識。亦同此懷耳。明有天下三百年。臣妾四夷。父母萬邦。凡此覆載之間。含生負氣之類。孰不尊親而願戴。顧惟吾東特異諸藩。毋論大義。罔極恩深。雖以草茅螻蟻之賤。未嘗不歎息流涕於宣祖大王萬折必東之語也。今茲商舶之涉吾邊地者。雖未知爲某事行某策。而適然邂逅。成此奇遇。正宜因此導達。以伸我含冤負痛之誠可也。若不能然者。亦宜達其行李。供其乏困。以示毋忘昔日之恩可也。竊聞朝著之間。有以禍福利害之說。敢爲僥倖苟免之計。遠外傳聞。痛心疾首。如欲無生。如僕衡茅之賤。固不足道。老兄世篤忠貞。名著策書。曷不因聖上求言之敎。一言以冀開悟乎。塗中聞此。意欲面陳。適此乖違。聊以尺牘。獻此狂妄之言。悚仄悚仄。
김천휴에게 답함 기유년(1669, 현종10)
이번 참혹한 수재(水災)는 수십 년 이래 없던 것이라 걱정되고 답답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그리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이가 돌아오면서 보내신 편지를 가지고 왔기에 급히 뜯어 읽어 보니 매우 감격스럽고 위안이 됩니다. 다만 고생하시는 병이 한 달이 다 되도록 회복되지 않고 있다니 매우 염려됩니다. 조섭하는 방도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되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진중하시어 병을 조심하라는 성인(聖人)의 경계를 저버리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형이 거상(居喪)하느라 수척해진 몸으로 갑자기 병에 걸려, 처음 위독할 때에는 거의 지탱할 수 없을 듯하였으나 다행히 약의 효험으로 지난달 10일경부터 조금 안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집안의 다행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거처와 음식은 비록 부형(父兄)의 뜻에 따라 대략 임시로 조처하고 있으나, 끝내 거상에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서 “의리에 당연한 것이라는 말로 권면하라.”라고 간곡히 말씀하셨으니, 감히 조용히 일깨워서 사람을 덕으로 사랑하는 군자의 뜻을 전달하지 않겠습니까. 들으니 못가에 아주 빼어난 당(堂)을 마련하여 항상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사이를 떠나지 않고 지내신다고 하던데, 비록 가서 그 즐거움을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상상만으로도 감탄이 나오고 맑은 기운이 몸에 와 닿는 것을 느낍니다. 기문(記文)을 지어 보내라고 하셨는데, 스스로 제 분수를 돌아보면 애당초 감히 받들 수 없지만 간곡하신 뜻을 끝내 사양할 수 없기에, 우선 다음 인편을 기다려 삼가 써 올리겠습니다. 장독이나 덮는 것을 면하지 못할 줄은 알지만, 그저 이것으로 성의(盛意)에 답하겠습니다. 이만 줄이고, 삼복 더위에 더욱 조섭하시기 바랍니다.
答金天休 己酉
水沴之慘。數十年中所無有。煩鬱無聊。尤不任懷想之苦。兒子歸來。奉手札之惠。急坼疾讀。感慰交幷。但承所苦彌月。久未痊復。奉慮殊切。將息之道。不可少緩。過意珍衛。無負聖人謹疾之戒。千萬之望也。家兄柴毀之餘。遽罹疾病。初間危劇。殆不能支保。幸賴醫藥有效。自去月旬間。略有安意。私家之幸。如何可言。居處飮食之節。雖以父兄之意。略從權制。然終以不得盡乎人心爲恨。辱書勤懇。責以義理之當然。敢不從容開譬。以達君子愛人以德之意乎。聞葺治池堂。體制殊勝。使杖屨行止常不離天光雲影之中。雖不得往同其樂。而想像欽歎。便覺淸氣逼人矣。需及記文。自顧己分。本不敢承當。而荷意之勤。不容終辭。且待後便。謹寫呈上。雖知不免爲覆瓿之資。聊以仰酬盛意之辱耳。餘祝庚炎。將護加衛。
김천휴(金天休) 학배(學培) 에게 보냄 기유년(1669, 현종10)
지난해 낙성(洛城)에서의 만남은 시일이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 총총히 이별하느라 변변히 소회(所懷)를 토로하지 못하였기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아련하여 마치 꿈결처럼 느껴져 때때로 가슴속에 떠오르는 그리움을 풀 수 없었습니다. 이제 추리(秋里)의 인편을 통하여, 거마(車馬)가 바야흐로 천상(川上)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즉시 찾아뵙고 담소를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중춘(仲春)의 날씨가 막 따스해지는 즈음에 집안의 어른, 가솔들이 두루 평안하신지요? 현일은 가운(家運)이 불행하여 지난 11월에 가형(家兄)이 후사(後嗣)가 된 숙모(叔母)의 상(喪)을 당하여 몹시 비통한 와중에서도 가형이 병고를 겪은 몸으로 거상(居喪)을 견뎌낼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노형이 남쪽으로 오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저 심상(尋常)한 휴가입니까? 아니면 뜻밖의 체면(遞免)을 당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조정의 정황은 근자에 어떠합니까? 인편에 소식을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유현(儒賢)이 크게 건백(建白)하여 차제에 시행될 것이라 하니, 국가의 원기를 부지하고 보호할 조금의 기력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현일은 돌아오는 길에 용주 상공(龍洲相公)을 배알하였으니, 이번 길에는 그나마 이 일 하나에 의미를 둘 수 있을 뿐입니다. 서쪽으로 가시는 것은 언제쯤인지요? 그 전에 혹 한번 만날 수 있을지요? 몹시 바라고 있으나 기필할 수는 없군요. 멀리서 보고 싶어하며 그리움에 마음만 달려갈 뿐입니다.
김천휴에게 답함 임자년(1672, 현종13)
현일은 아룁니다. 가문이 불행하여 둘째 가형이 훌쩍 세상을 떠나니 찢어지는 아픔과 쓰라린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인자한 은혜로 굽어 위문해 주시어 애도하고 탄식하며 답답해하고 불쌍히 여기신 뜻이 말 속에 드러나니, 애통하고 목이 메어 억누를 수 없습니다. 기후가 어그러져 싸늘한 기운이 여름에 접어들었는데도 가시지 않고 있는데, 병환은 요즈음 어떠하신지요? 귀양 갔다 돌아오신 지 오래되었고 조섭도 올바르게 하시니 전보다 더 건강하시리라 생각됩니다. 현일은 조석으로 부모를 모시며 슬픔과 괴로움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데, 마음이 잡히지 않아 더 이상 세상에 정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노형(老兄)께서 선형(先兄)과의 정리를 생각하시어 저를 어리석다고 버리지 마시고 때때로 편달하시어 끝내 소인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저의 바람입니다. 또 생각건대, 선형의 뜻과 사업의 자취를 인멸하여 세상에 전해지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참으로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달에 장사의 일을 도모하면서 일부러 동생들과 형의 언행을 대략 기술하여 지문(誌文)을 내한(內翰) 홍공(洪公)에게 부탁하였고, 또 좌우께 간절히 청하여 애사(哀辭)를 얻어 제사 지내려 했는데, 노형께서 병을 조섭하고 계셨기 때문에 감히 부탁드리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본가의 우환 때문에 장사 지내는 일을 미루게 되었으니, 조만간 별도로 찾아뵙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찌 금년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붓을 잡으니 눈물이 떨어져 매우 애통스럽습니다. 부디 마음을 안정시키고 보중하시어 먼 곳에 있는 저의 정성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答金天休 壬子
玄逸白。家門不幸。二家兄奄忽喪逝。摧痛酸苦。不自堪忍。仰承仁恩俯垂慰問。悼歎悶惻。見於辭旨。哀痛哽咽。不能自已。運氣乖戾。凄寒入夏未祛。不審愆度近復何似。伏惟久離瘴土。攝理有方。比前計應加健矣。玄逸朝夕侍旁。哀苦度日。意緖忽忽。無復人世情況。奈何奈何。但願老兄幸以先兄之故。不棄其愚。時加鞭策。不使終爲小人之歸。則區區今日之望也。且念先兄志業之不可泯滅無傳。信乎如來敎所諭者。前月中方謀窀穸之事。故輒與諸弟略述其言行梗槩。求誌於內翰洪公。又將致懇左右。欲得哀辭以誄之。爲老兄方有將息之虞。未敢奉煩。竟以本家憂患。襄事不免遷就。近當別就請也。豈意今年有此況味邪。援筆淚落。痛哉痛哉。只祝過意加衛。以副遠誠。
김천휴에게 답함 임자년(1672 현종 13)
접때 오마(五馬)의 행차가 남쪽으로 돌아가신 뒤로 매양 한 통의 서찰로 안부를 여쭈려 하였으나 길이 너무도 멀어 생각만 품은 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추리(秋里)의 인편을 통해 군수(郡守)의 직임을 교대한 뒤로 숙환(宿患)이 부쩍 심해졌고 게다가 거주하시는 곳의 풍토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애모(愛慕)의 정이 깊은 나머지 매우 염려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이 답답한 사환(仕宦)의 조롱(鳥籠)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실 날이 머지않다는 소식을 들으니 구구한 저는 노형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후련합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전화위복 따위는 말할 것도 못 됩니다.
이제부터는 더욱 건강에 유의하시고 부디 매사에 기력을 절제하여 질병을 조심하라고 하신 성인의 경계를 따르시기를 천만 바라 마지않습니다. 현일은 그새 몇 해 동안 늘 우환을 겪느라 학문은 조금도 진전을 보지 못하여 정신과 안목이 쇠약하고 천근(淺近)하니, 후일에 서로 만나면 그저 예전의 기량 그대로일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날씨가 따스하고 바람이 가벼울 때를 기다려 곧바로 운장(雲莊)으로 찾아가 며칠 동안 정담을 나눌까 하는데, 그때에 함께 꽃과 버들을 구경하며 즐거이 놀 수 있으실는지요?
김천휴에게 답함 임자년
오랜 장마로 무더운 날씨에 시봉하시는 중 기거가 어떠하신지요? 신명의 가호가 있고 섭양(攝養)을 잘 하시어 예전보다 한결 건강해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현일은 다행히 보살펴 주신 덕분에 어버이를 모시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만 시절이 변천함에 따라 척령(鶺鴒)의 회포가 경물을 볼 때마다 더욱 절실하니, 이곳의 정황이야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장초(狀草)를 보여 달라고 하셨는데 문장이 짧고 얕아 높으신 안목 앞에 내놓을 것이 못 됩니다. 생각해 보면 좌우(左右)께서는 가형의 평생 벗으로, 그 언행과 지절(志節)에 대해 상세히 알고 계실 터라 한마디 뇌문(誄文)을 얻고자 하니, 행여 생각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본래 제가 직접 찾아뵙고 삼가 부탁드리려 했었는데 마침 질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대신 보내니 편지를 앞에 놓고 더욱 송구할 뿐입니다.
[주]척령(鶺鴒)의 회포 : 《시경》 〈상체(常棣)〉에, “척령이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을 구한다.〔脊令在原 兄弟急難〕” 한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여기서는 형제를 잃은 슬픔을 뜻한다.
김천휴에게 답함
며칠 동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시봉(侍奉)하시는 기거는 더욱 편안하신지요? 지난번 아이가 돌아오는 편에 삼가 보내신 답장을 받고 말씀하신 뜻을 잘 알았습니다. 다만 저의 간청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니 심히 답답합니다. 대체로 남에게 글을 청하는 데 있어서 각각 경우가 다르니, 가령 홍백원(洪百源)이나 김경겸(金景謙) 같은 경우는 선형(先兄)을 영광스럽게 하고 자손을 돌보아 주는 계책이 있고, 노형의 경우는 이와 달라서 선형의 마음과 사업을 말하는 데에는 노형이 아니면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삼가 전일의 청이 있었던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한 “일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것을 유념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제가 평소에 질병이 많은 데다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저도 모르게 실정을 토로했으니, 그 뜻이 또한 슬픕니다. 삼가 바라건대, 곡진히 불쌍히 여겨 주시어 몇 마디 말을 아끼지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수습하여 기다리라고 하시니 지극한 뜻에 깊이 감사드리며 감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병으로 신음하며 베개에 엎드려 대신 쓰게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答金天休
數日炎蒸。伏惟侍奉動止加勝。前日兒還。伏奉手翰還答。備悉指意。但區區微懇。不蒙矜納。深用介然。凡求人文字。亦有不同。如百源,景謙。固爲榮泉壤覆遺胤之計。若老兄則異於是。道先兄心若事。計非老兄決不能。故竊有前日之請。古人所謂事有無可奈何者。亦不可不念也。區區素多疾病。悲苦之餘。無復生意。不覺盡吐情實。其意亦可哀也。伏願曲垂矜愍。毋惜數語以敍之。千萬至願。收拾以待之敎。深感至意。敢不銘念。疾病呻吟。伏枕代草。千萬不宣。
김천휴에게 보냄
어제 함께 자면서 얘기를 하고 나니 수년간의 몹시 그리웠던 마음이 충분히 위안이 됩니다. 요즈음 날씨가 맑고 화창한데 삼가 조섭하시는 데 신의 가호가 있어 체력이 좋아지셨는지요? 현일은 시골집에 돌아왔으나 가친(家親)을 그리는 마음 간절하고 형제를 사별한 슬픔에 낙심이 되어 흥취가 전혀 없고 매우 괴롭습니다. 낙연(落淵)에서 만나자는 약속에 대해서는 지난번 사회(士晦)와 내달 16일에 만나기로 하였는데, 날짜를 꼽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보(杜甫)가 이른 바, “멀리서 섬계(剡溪)의 경치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네.〔遙聞剡溪好 欲罷不能忘〕”라는 말이 참으로 빈말이 아닙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존후(尊候)가 아직 완전히 쾌차되지 않았는데 그때에 가마를 마련하여 멀리 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초야의 거친 성격으로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데 익숙하니 좌우께서 함께 유람하시자면 심신이 수고로움을 면치 못하실 듯한데, 이것이 염려됩니다.
[주]두보(杜甫)가 …… 없네 : 두보의 〈장유(壯遊)〉 시에는 ‘요문섬계호(遙聞剡溪好)’가 ‘섬계온수이(剡溪蘊秀異)’로 되어 있는데, 잘못 기억했거나 다른 본을 본 듯하다
與金天休
昨承聯枕晤語之款。足慰數年飢渴之抱。比日淸和。伏惟攝理有相。體力佳勝。玄逸歸來村寓。望雲思切。鶺鴒懷惡。忽忽無興緖。苦事苦事。落淵之約。向與士晦期以來月旣望。計日以待。老杜所謂遙聞剡溪好。欲罷不能忘者。信非虛語也。但念尊候未盡康泰。未知此時。能辦藍輿遠臨否。麋鹿之性。慣却林野行走。恐左右俯同遊陟。不免勞費神觀。是可慮也。
김천휴(金天休)의 논이대유이기성정도설변(論李大柔理氣性情圖說辨)을 읽고
이대유(李大柔)의 〈이기성정도(理氣性情圖)〉에 ‘성리(性理)’ 자를 심(心) 자 위에 합쳐서 써 놓은 것에 대하여
변(辨)에 “성(性)은 곧 이(理)이니, 성리(性理) 두 자를 합쳐서 쓰는 것이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다만 성은 어떤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단지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덕(四德)이 순수하게 마음속에 있는 것일 따름이니, 만약 이 사덕을 떠나서 성을 말한다면 성은 모호하여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인의예지는 사방으로 나누어 배치해 두고 단지 성(性) 한 자만 외로이 심(心) 자 위에 붙여 두었으니, 아득하고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렵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하였다.
내가 이대유의 도(圖)를 보건대, 심(心) 자를 중앙에 위치해 두고 성리 두 자를 심 자 위에 합쳐 써 놓아 ‘성이 곧 이(理)이다’라는 뜻을 밝혔으니, 그 그릇됨이 심하다. 그런데 김천휴(金天休)의 변(辨)에서 그 잘못을 공척(攻斥)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듯하다. 저 이른바 ‘성은 곧 이(理)이다’라는 것은 ‘인(仁)이란 인(人)이다’라는 말과 같아서 애초에 피차의 구별이 없다. 이제 만약 성과 이(理)를 둘로 나누어 저마다 한 곳에 둔다면 될 법이나 하겠는가. 인의예지를 사시(四時)와 오행(五行)에 분속(分屬)한 것은 바로 선유(先儒)의 구설(舊說)이니, 이에 의거하여 사방에 분배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듯도 하다. 그렇지만 이미 성 자를 심 자 위에 두었고 또 인의예지를 동서남북에 배열해 둔 것은 도리어 성 밖에 인의예지가 따로 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그르다고 한 김천휴의 지적이 옳다. 다만 ‘아득하고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은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공정한 죄명(罪名)이 못 된다.
이대유의 도(圖)에서는 또 기(氣) 자를 이(理) 자 속에 빠뜨려 넣어 두고 있다.
변(辨)에 “이(理), 기(氣) 두 자를 합쳐서 쓴 것은 본래 연로(蓮老)에게서 나왔고 퇴계가 정정(訂正)한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이와 기는 두 물건이 아니요 또한 한 물건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마음속에 있을 때는 혼륜(渾淪)하여 분개(分開)할 수 없고 이미 발함에 미쳐서는 이(理)는 스스로 이이고 기(氣)는 스스로 기여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 하였다. 지금 이 도(圖)에서는 합쳐서 써 놓았으니, 이와 기가 뒤섞이는 병통이 있지 않은가.” 하였다.
이와 기는 비록 서로 분리된다고 할 수 없지만, 형이상하(形而上下)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와 기는 분명 두 가지 물건이니, 변에서 말한 ‘한 물건도 아니요 두 물건도 아니다’는 것은 분명치 못한 듯하다. 그리고 주자의 설(說)은 원문의 글 뜻을 매우 잘못 파악하고 인용하였으니, 그 ‘마음속에 있을 때는 혼륜하여 분개할 수 없고 이미 발함에 미쳐서는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여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지언(知言)》의 ‘동체이용(同體異用)’과 말뜻이 같다. 대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별은 그 근본으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니, 어찌 미발(未發) 상태에서는 천리와 인욕이 한곳에 뒤섞여 있다가 이미 발한 뒤에 이와 기가 비로소 나뉘어 서로 뒤섞이지 않는 것이겠는가.
이씨(李氏)의 설에 “명(命)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와 기가 이것이다. 기가 허공에 있으매 이가 추뉴(樞紐)가 된다. 따라서 오로지 이만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이 천명과 기질이 나뉘는 까닭이다.” 하였다.
변에 “천명(天命)은 하나이고 둘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명(命)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와 기가 이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하나의 명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이와 기를 합쳐야 비로소 하늘의 명이 되는 셈이니, 어찌 몹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는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함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면 이(理) 또한 여기에 부여된다.’ 하였으니, 이렇게 말해야 비로소 조금의 하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 할 것이다.” 하였다.
이대유는 선유(先儒)의 설에 이른바 기수(氣數)의 명(命)과 성명(性命)의 명이 있다는 이유로 ‘명에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주장을 만들어 냈으니, 너무도 어처구니 없다. 이른바 기수의 명이란 맹자가 이른바 “인(仁)이 부자(父子)에 있어서와……성인이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명(命)이다.”의 명과 같은 것이니, 어찌 이로써 자사(子思)가 말한 천명(天命)의 명 자에 비겨서 ‘명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여 천명과 기질의 구분을 둘 수 있으리오. 김천휴의 변(辨)이 옳다.
이씨의 설에 “명(命)은 능히 품부(稟賦)할 수 있으니 곧 주자가 말한 ‘고칙(誥勅)’이고, 심(心)은 모든 이치를 갖출 수 있으니 곧 주자가 말한 ‘인(人)’이다.” 하였다.
변에 “천명(天命)이란 물(物)을 명(命)하지 물에 명을 받지는 않는 것이다. 하늘의 입장에서 말하면 ‘부여(賦與)한다.’ 하고, 물의 입장에서 말하면 ‘품수(稟受)한다.’ 한다. 그런데 지금 ‘명은 능히 품부할 수 있다.’ 하였으니, 어느 곳에서 품(稟)하고 어느 곳에서 부(賦)한단 말인가. 심(心)이란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일에 응(應)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모든 이치를 포함하고 있다.’라고만 하였으니, 이는 체(體)는 있고 용(用)은 없는 것이어서 그 반을 얻고 반을 잃은 셈이다.” 하였다.
품(稟)ㆍ부(賦) 두 글자에 대해 논한 것이 매우 좋다. 다만 ‘심(心)이 모든 이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대목에 대한 변설(辨說)은 미진하다. 대개 이대유의 논의는 반은 얻고 반은 잃은 점이 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용한 ‘인(人)이다’라는 설이 주자의 본의(本意)와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문제이니, 김천휴의 변(辨)은 이대유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 듯하다. 주자가 “명(命)은 고칙(誥勅)과 같고 성(性)은 직사(職事)와 같고 정(情)은 시설(施設)과 같으니, 심(心)은 그 사람에 해당한다.” 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부여한 바가 명(命)이 되는 것이 임금에게 고칙이 있는 것과 같고, 성(性)이 사덕(四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사람에게 직사가 있는 것과 같으며, 정(情)이 발동(發動)을 위주하는 것이 사람에게 시설이 있는 것과 같고,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하여 주재하는 것이 고칙을 받고서 직사를 맡아 운용 시설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지금 ‘모든 이치를 포함한다’고 말하였으니 본뜻을 잃었다 하겠다.
이씨의 설에 “성(性)이 사물과 감촉한 것이 단(端)이고, 심(心)이 사려(思慮)에서 발한 것이 정(情)이다.” 하였다.
변에 “사단과 칠정은 모두 사물에 감촉하여 발동하는 것이다. 다만 사단은 순수하여 한결같이 바름에서 나오고, 칠정은 절도에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한다. 지금 사물에 감촉하는 것을 사단이라 하고 사려에서 발한 것을 칠정이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면 칠정은 성(性)을 말미암지 않고 단지 심(心)에서 발하고, 사단은 홀로 성에서 발하여 심의 통제를 받지 않는 셈이다. 성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자사(子思)가 어찌하여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라 하였겠으며, 심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맹자가 어찌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하였겠는가. 심이 사려에서 발하는 것은 의(意)라 해야지 정이라 해서는 안 될 듯하다.” 하였다.
이 단락에서 논한 바가 매우 좋으니, 사단ㆍ칠정과 심(心)ㆍ의(意)에 대해 분변한 말이 극히 조리 정연하다. 다만 사단ㆍ칠정이 사물에 감촉하여 발현하는 것을 논한 부분은 뜻이 완비되지 못한 듯하다.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므로 순수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므로 절도에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한다.”라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할 것이다.
이씨의 설에 “정(情)이 절도에 맞는 것은 본성으로부터 발하였기 때문에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물욕(物欲)에 감촉하여 움직여서 본성으로부터 발하지 않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 때문에 모두 성(性)에서 발하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변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은 단지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사이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한 절(節)을 살펴보면 정(情)이 절도에 맞는 것을 사단이라 하고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을 칠정이라 한 듯하니, 또한 거리가 멀지 않은가.” 하였다.
변의 설이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극진하다.
이씨의 설에 “단지 주리(主理)와 주기(主氣)가 각각 본체가 있다는 것으로써 말하였다.” 하였다.
변에 “‘본체’ 두 자가 꼭 들어맞지는 않은 듯하다.” 하였다.
이씨의 설은 말이 꼭 들어맞지 않을 뿐 아니라 뜻 또한 분명치 못하다.
이씨의 설에 “사단과 칠정은 맥락이 서로 이어져서 순전히 천리(天理)가 발한 것이니, 대저 이 둘을 모두 정(情)이라 한다. 그러나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되 이를 행하는 것은 기(氣)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되 발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다. 퇴도(退陶) 선생의 뜻은 이 말에 근본한 것인데 기씨(奇氏)는 주자의 설을 그르다 하였다. 내가 이 도(圖)를 지은 것은 선생을 위하여 편을 든 것이다.” 하였다.
변에 “이와 기가 서로 어우러져 있는 중에 나아가 기에 섞이지 않은 것을 가리켜서 말하면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 하고, 이와 기를 부여받은 중에 나아가 기질과 섞인 것을 가리켜 말하면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한다. 성(性)에 이미 본연과 기질의 다름이 있고 보면 정(情)에 있어서만 유독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없겠는가. 칠정은 치성(熾盛)하여서 방탕하기 쉬우니 기가 주가 되기 때문이고, 사단은 순수하면서 바르니 이가 주가 되기 때문이다. 기가 주가 되어 이가 기를 타고서 행(行)하고 이가 주가 되어 기가 이를 따라서 발한다. 그렇다면 이와 기는 과연 일물(一物)이며 사단과 칠정은 과연 분별이 없겠는가. 주자는 ‘허령(虛靈)ㆍ지각(知覺)은 하나일 따름이지만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구별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혹은 형기(形氣)의 삿됨에서 생겨나고 혹은 성명(性命)의 바름에 근원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미 ‘형기에서 생겨난다.’ 하였고 보면 이는 기에서 발하는 것이고 이미 ‘성명에 근원한다.’ 하였고 보면 이는 이(理)에서 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情)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심(心)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 인심도 이가 없지 않으나 기가 주가 되니 ‘형기에서 생겨난다.’ 하고, 도심도 기가 없지 않으나 이가 주가 되니 ‘성명에 근원한다.’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이와 기 둘이 마음속에 상대(相對)하고 있다가 이것을 발하고 또 저것을 발하는 것이리오. 게다가 천하의 의리는 무궁하고 사람들의 소견은 저마다 같지 않으니 반드시 내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또한 반드시 옛 책만 믿고 나의 마음에서 이치를 찾아보지 않아서도 안 된다. 고봉(高峯)의 사단ㆍ칠정에 대한 변설(辨說)은 비록 혹 이치에 어긋난 점이 없진 않으나 그의 마음은 사도(斯道)를 발명하고자 한 것일 뿐이지 주자를 이기고 싶어 한 것이 아니고 또 퇴계를 능가하고 싶어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견해가 우연히 이에 이르렀기 때문에 변론으로 드러내어서 사문(師門)에 질정(質正)한 것일 뿐이니, 어찌 허황된 견해를 가지고 상대방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생각이 있었겠는가. 선생이 자상하게 서신을 왕복하면서 마음속의 깊은 뜻을 다 기울여 보인 것은 역시 그의 설을 듣기를 좋아하여 그를 이끌어 올려서 함께 성현의 도에 들어가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지금 우리들의 소견으로는 그 울타리도 엿보지 못하거늘 감히 입을 열어서 의리를 논설하였으니, 이미 태재(汰哉)의 경계를 범하였다. 하물며 선배를 경시하고 뒤미처 흠을 찾아내어서 의론함으로써 후일의 폐단을 열어서야 되겠는가. 노선생(老先生)의 격언과 지론(至論)은 만 길 벼랑처럼 우뚝하니, 어찌 우리들이 편들어 준 뒤에 사람들이 믿어 주겠는가. 우리들의 자질구레한 설이 선생에게 무슨 영향을 줄 것이라고 자칭 선생을 위해 편을 든다고 한단 말인가. 이러한 말은 후학이 뜻을 공손히 가지고서 가르침을 구하는 도리가 아닌 듯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이 단락에서 논한 바는 소견이 적확(的確)하고 말이 통쾌하여, 사단 칠정의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분변에 있어 뜻을 밝혀낸 것이 깊고 적절하기가 마치 손바닥을 가리켜 보는 듯하니, 매우 좋고 좋다. 마지막 단락의 의론에 이르러서는 온후(溫厚)ㆍ화평(和平)하여 겸손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뜻이 있고, 선배를 경시하여 억지로 변설(辨說)하여 이기려고 하는 기상이 없으니, 참으로 탄복할 만하다. 게다가 이대유의 설은 혹 도리어 고봉(高峯)의 의론보다 수준이 낮으면서도 이로써 반복해 따져서 그 옳고 그름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니, 참으로 마음에 차지 않는 점이 있다. 김천휴의 논(論)이 그 병통을 참으로 잘 지적했다 하겠다. 그러나 이른바 “감히 입을 열어서 의리를 논설하였으니, 이미 태재의 경계를 범하였다.”라고 한 것은 남의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정도를 넘은 병폐가 있는 듯하며, 이른바 “노선생의 격언과 지론은 만 길 벼랑처럼 우뚝하니, 어찌 우리들이 편들어 준 뒤에 사람들이 믿어 주겠는가.” 한 것 역시 말이 다소 온당치 못한 듯하며 게다가 후학을 장려하는 뜻에 있어 미진한 듯하다.
이씨의 설에 “천명(天命)의 성(性)은 진실로 선악(善惡)이 없다.” 하였다.
변에 “이 단락은 매우 의아하다. 대저 천명의 성은 맹자가 이미 선(善)하다고 했는데 형은 어찌하여 선악이 없다고 하는가. 만약 이를 선하다 할 수 없다면 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불행히도 성(性)은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다는 설에 가깝다 하겠다.” 하였다.
김천휴의 이 변설은 매우 정밀하여 주 부자(朱夫子)의 《지언의의(知言疑義)》 중의 설과 은연중 계합된다.
이씨의 설에 “사람은 일심(一心)의 허령(虛靈)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 지각(知覺)이 이것이다.” 하였다.
변에 “허령한 것이 지각이라는 설은 선유(先儒)의 설에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이대유의 이 설은 참으로 의아하니, 응당 그 뜻을 분석하여 깨우쳐 주어야 했다. 만약 선유의 설에 보이지 않는다고만 말해 준다면 매우 범연(泛然)할 듯하다. 대개 허령(虛靈)과 지각(知覺)은 혼륜(渾淪)해서 하나의 뜻으로 보아서는 안 되니, 만약 묶어서 말한다면 허령은 체(體)이고 지각은 용(用)이며, 쪼개어 말하면 허(虛)는 뭇 이(理)를 갖추는 것이고 영(靈)은 만사(萬事)를 응하는 것이고 지각은 능히 만사를 제어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말하면 거의 옳을 것이다.
이씨의 설에 “기(氣)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면 이와 기가 합쳐져서 심(心)의 이ㆍ기의 신령함〔靈〕이 된다.” 하였다.
변에 “심은 진실로 이와 기가 합한 것이다. 그러나 ‘심의 이ㆍ기의 신령함’ 등의 말은 문세(文勢)가 순하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이대유는 ‘사람이 태어남에 천지의 이를 얻고 또 천지의 기를 얻어서, 이와 기를 합하여 마음으로 삼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심의 이ㆍ기의 신령함’이란 설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조어(造語)가 자못 분명치 못하니 변설이 옳다.
이씨의 설에 “성(性)의 큰 절목〔目〕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인의예지는 인성(人性)의 강령〔綱〕이다.” 하였다.
변에 “인의예지는 주자가 이미 ‘인성의 강령’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이대유는 어찌하여 다시 절목이라 했는가. 옛사람 중에 비록 절목이라 한 이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미 아래에 주자의 설을 인용했고 보면 굳이 다시 ‘목(目)’ 자를 놓을 필요는 없다.” 하였다.
변설이 역시 타당하다.
변설의 후어(後語)에 “붕우 간의 강론은 그야말로 서로 도움을 주기 좋은 것인데 저는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고 논의가 명쾌하지 못하니,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하는 이익을 얻는 것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더욱 크게 두려운 바가 있습니다. 옛사람이 의리를 논설한 것은 바로 실천을 위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도리어 실천할 일을 단지 한가한 언어로만 말하고 마니, 상채(上蔡)가 ‘앵무새와 같다.’라고 한 기롱과 주자가 ‘도에 해롭다.’라고 한 경계가 어찌 우리들이 척연(惕然)히 생각하여 경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은 자신의 수양에 독실했으니 진실로 남의 기롱을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은 없고 이름만 앞서는 것은 군자가 경계해야 할 바입니다. 저와 이대유가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 단락에서 논한 바는 매우 좋다. 붕우 간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서로 책려하는 뜻을 깊이 얻었으니, 읽는 사람의 마음을 척연히 경동(警動)케 한다.
무신년(1668, 현종9)에 내가 서울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자(字)가 대유(大柔)인 이생 구(李生絿)란 이를 만났는데, 나이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비록 그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였지만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을 들으니 절로 기이한 선비였다. 내가 남쪽으로 와서도 마음속에 늘 잊히지 않았는데 몇 해 안 되어 그가 홀연 작고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슬프고 가슴 아파서, 그와 토론하여 그의 학문이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인(同人) 김천휴(金天休)가 나에게 이대유의 뜻이 훌륭하였음을 말하는 한편 그와 더불어 논한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분변(分辨)을 말해 주었다. 이에 내가 서둘러 그를 한 번 만나 보려 하였으나 마침 김천휴가 남쪽 고을로 부임하는 통에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산천록(山天錄)》이란 것을 얻어서 읽어 보았더니 곧 김천휴가 지난날 이대유와 서로 왕복하며 논변한 것이었다. 내가 이미 이대유의 취향이 범속하지 않음을 사랑하였고 게다가 김천휴의 변설이 적확 온당함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깊이 완미하고 흠탄(欽歎)하던 나머지 마음에 미심쩍은 바가 있어 나의 생각으로 대략 논평하여 가르침을 구할 바탕으로 삼고자 하였더니 김천휴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갓 ‘고인(故人)은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탄식만 품은 채 이 글을 상자에 갈무리해 둔 지가 20여 년이었다. 마침 죄인의 몸으로 유락(流落)하는 신세라 일 없이 한가하여 상자를 뒤지다가 산질(散帙) 중에서 이 기록을 찾고는 지난 일이 꿈처럼 떠올랐다. 이에 김천휴와 이대유를 다시 볼 수 없음을 거듭 탄식하고, 나의 쇠퇴하고 궁액(窮厄)한 처지가 또 이와 같아서 우리 벗이 기대하고 책망한 뜻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니, 아, 슬프도다!
이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분변에 관한 설을 내어 놓자 율곡(栗谷) 이씨(李氏)가 앞장서서 이를 배척하였고, 그 무리들이 이에 빌붙어 호응하여 제멋대로 설(說)을 늘어놓아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잘못 아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그 화가 혹독하다. 이제 이 두 사람이 서로 왕복한 논쟁이 비록 일일이 다 이치에 합당하지는 못하지만 역시 삿된 설을 막고 바른 도를 부지(扶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하니, 참으로 이른바 “능히 양묵(楊墨)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성인의 무리이다.”라는 것이다. 내가 이에 책을 덮고 크게 한숨을 쉬고 이어 마음에 느낀 바를 말미(末尾)에 적어서 기록해 둔다.
錦翁先生文集
詩
次洪百源 汝河 韻。寄李翼文 徽逸 昆季。
漳濱孤臥病相尋。引領仙棲遠起欽。兩地音容憑夢接。一天明月盡情臨。
從知人獸分操舍。誰辨熊魚味淺深。卻恨山樊阻麗澤。爐邊可笑覓零金。
書
與李翼昇 玄逸○壬子
學培白。斯文不幸。參奉契丈。竟至不淑。承訃痛哭。不能已已。伏惟友愛隆深。摧痛酸苦。何可堪任。伏願深自寬抑。以慰慈念。學培契分期慕。固非輕淺。而塵冗汩沒。疾病侵凌。林下宿約。漸至差池。每想高棲。只自引領長吁而已。今春罷歸之後。尙冀賤疾少間。則一投雲關。以償平生之志。豈意不淑。遽至於此。抑此非學培一人之私痛。數關斯文。其如天欲喪之何。葬期卜在何間。平日志行。不可泯沒。想諸兄已有緖次之文。恨此病伏垂死。未得一哭靈筵之下。仍與僉兄握手叙懷耳。
與李翼昇
積病鬱悒中。令胤袖書來訪。相對坼封。兼承狀草。讀未及半。淚已橫臆。學培尙如此。况兄篤友之情。其何以堪遣耶。前書所達者。蓋欲得見草本。以寓平日愛慕之情耳。今承兄示。欲使拙者留筆其間。如古之哀辭誄語者然。情不敢固辭。而義有所難當。兄以學培爲何如人耶。風埃顚倒之餘。志業之荒廢極矣。况今重以病廢。更無可齒人類之望。想兄亦默會之矣。區區一念。尙冀幸得不死。則得與老兄。更尋遺迹於玉川雷澤之間。以寓山陽之感懷而已。狀辭甚備。足以傳信於後。矧又有洪百源之撰述。則揄揚發揮。必無餘憾。願老兄姑且收拾遺文。寶藏待時。勿爲汲汲求知之計如何。情深故言亦深。非兄何敢發此言耶。葬期遷就極可慮。然亦勢所當然奈何。惟望室家寧淨。嗣胤勉學。以卒先志爾。病甚手戰。作字胡亂。賤疾輕重。因此可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