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10장 9-22절
설교제목 : 틀을 깨시는 하나님
최후 통첩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장마와 무더위로 인하여 지치기 쉬운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시길 빕니다. 지난주 폐암 투병 중인 친구를 병문안하였습니다. 이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는 없고, 요양병원으로 가라는 최후통보를 받고, 한 달 반 정도를 보내고 있습니다. 담당의사는 생존기간을 한 달 정도로 잡았습니다. 뇌로, 허리로 전이된 암세포는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몰핀에 의지하여 잠을 잤지만, 최근에는 몰핀없이도 잠을 잘 수 있을 정도가 되어 통증이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자고 있다가 눈을 뜬 친구에게 내가 누구냐고 했더니 알아보았습니다. 깨어났지만 통증이 시작되면서 반복적으로 시음하며 말하는 소리는 “힘들어”였습니다. “힘들어”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더니 “나 어떻게”라고 말했습니다. “행복하자, 잘살자” 늘 희망과 위로를 건네던 친구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었습니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꽃들도”라는 찬양입니다. 제가 이 찬양을 처음 접한 것은 재개발지역 안에 있던 그 친구가 목회하던 교회가 건축을 완공하고 봉헌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불렀던 마지막 찬양이었습니다. 그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담은 목소리로 불렀고, 그의 음성은 떨렸고,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찬 어조로 찬양을 불렀습니다. “이곳에 생명 샘 솟아나 눈물 골짝 지나갈 때에 머찮아 열매 맺히고 웃음 소리 넘쳐나리라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1절을 부르고 멈추었더니 2절을 왜 안 부르냐고 힘이 빠진 작은 목소리로 친구는 2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
찬양하는 동안 잠시 고통을 잊은 듯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주겠노라 했더니 그는 눈인사를 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최후통첩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 견디고 건강해져서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항암치료하면서 그 친구와 바다를 보러 가려고 하다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주어진 소중한 것을 하지 못하고, 소중한 만남을 갖지 못하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지 못할 수 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귀히 여기고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자
사도행전 10장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변곡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후 세시쯤에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와 만나게 됩니다. 천사는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이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이란 사람을 데려오너라”는 음성을 듣고 베드로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구절들을 읽으면, 고넬료라는 사람을 그저 선한 사람 정도로 평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로마 황제가 지배하던 시대에 가이사랴는 황제의 도시로서 로마의 축소판처럼 황제의 통치 방식이 그대로 구현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로마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대단한 권력이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엘리트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점령군으로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식민지 유대 백성을 섬기며 자선을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유대교의 하나님인지 확실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를 통하여 많은 배고픈 이들을 구제하였던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자신의 유익과 편리, 사리사욕을 챙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타자를 섬길 줄 아는 자였습니다.
권력과 돈으로 자신의 왕국을 높이 쌓아가고자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권력을 잡은 이들이 각종 이권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시도는 비일비재합니다. 여전히 암암리에 벌어지는 진행형 사건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넬료는 큰 자이자 위대한 자였습니다. 피정복민들의 배고픔과 설움을 달래 주려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힘과 물질을 연약한 이들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자가 바로 참 그리스도이며, 예수의 정신으로 삶을 살아내는 자일 것입니다.
환상의 의미
주의 천사는 고넬료에게 무두장이(모피의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시몬의 집에 묵고 있다고 합니다. 고넬료는 두 명의 하인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병사 하나를 불러서 베드로를 모시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갑니다. 정오의 시간인데 그때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들면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땅으로 드리워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에게 음성이 들립니다.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었습니다고 고백합니다. 두 번째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이 일이 세 번 있은 뒤에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인간의 의식으로 침투하는 환상은 새로운 것을 유입시키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한된 정신의 규모와 틀을 넘어서 새로운 정신적 목표와 변환을 위하여 의식을 뚫고 나타난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등장한 천사 또한 환상 중에 나타난 초월적 기능으로 하나님의 보조적인 측면을 수행합니다. 베드로의 환상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같은 그릇은 여성적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릇 안에는 구약성서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취급하는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베드로 개인에게 있어서 동물적 충동을 동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시하고 배제하고 억압한 본능을 동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의식적 편견을 조정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의 율법적 편협성을 깨뜨립니다. 부정과 정함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깨기 힘든 금기이자 허물 수 없는 법칙과도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도록 강제한 것입니다. 자아가 구획한 경계선을 넘어서 하나님은 그의 세계관과 가치를 철저히 넘어서게 하시려는 목적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꿈과 환상, 뜻밖의 사건은 우리의 편견과 가치관을 전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강제하여 변환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를 전환시키려는 꿈, 환상, 뜻밖의 사건을 만날 때 온전한 응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틀을 깨시는 하나님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베드로가 만나고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갑니다.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오자, 그는 마중 나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25).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일개 어부에게 절을 하는 모습은 고넬료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간에 천사와 만났던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소상히 아뢰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이야기를 듣고 설교하였고 그 설교하는 가운데 듣는 이들에게 성령이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거기에 모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과 만남은 동시성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이방인 백부장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구원의 영역이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처음 공동체는 모든 이에게 열린 공동체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회질서에 개입하시면 모든 종류의 관료주의와 전체주의를 파괴합니다. 신성의 개입을 통하여 기존적 교리와 문법이 정한 울타리는 해체됩니다. 반대로 만일 이런 표준과 법이 강력하면 중요한 자발적인 정신적인 사건의 가능성을 방해하고 평가절하될 수도 있습니다. 폰 프란츠는 말합니다.
“비교숭배들은 영적으로 하나였던 사람들이 만든 은밀한 집단들이다. 그 안에서는 비합리적인 놀이가 자유롭게 행해질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원시 교회에서는 활기찬 정신, 조직적인 의미에서는 실용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았던 영적인 충동이 있었다.”[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지음, 이도희 옮김(2020) : 《황금 당나귀》, p204]
이런 영적 충동이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탄생시켰고, 기존의 가치체계를 넘어서 그 지평이 확장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삶의 국면에서 고착되고, 정체되고, 경직되면 그 틀을 깨기 위해 침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자아의 울타리를 허물고, 기존의 체계의 범주를 넘어서 보다 넓은 인격의 확장을 도모하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확립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틀을 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침투하심을 알아차리고 그 때가 바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기존의 낡은 체계를 갱신해야할 때임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