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푸른 생명 윤리를 향한 꿈
----글가람의 시
오홍진(문학평론가)
시인은 언어로 눈 앞에 펼쳐진 세계를 구현한다. 시인에게 언어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눈과 같다. 이 눈으로 시인은 세상을 감각하고, 그로써 만들고 싶은 세계를 상상한다. 글가람은 우리말 ‘한글’에서 시로 들어가는 언어의 길을 찾는다. 「한글」이란 시에서 그녀는 “글 길/ 말 길/ 숨 길”로 한글을 표현한다. 글과 말과 숨을 밝히는 한글을 쓰며 “환하고 밝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 시인이 바라는 환하고 밝은 세상은 “생태계를 살릴 경전”이란 시구에 충분히 드러난다. 가만히 있는다고 환하고 밝은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니다. 환하고 밝은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향한 치열한 열망과 연동되어 있다. 한글로 생태계를 살릴 경전을 쓰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만큼 달라지는 거라고 말해도 좋겠다.
시인은 “21세기 집현적역”에 세워질 “魂 창조하는 훈민정음 발전소”를 마음 깊이 그리고 있다. 훈민정음 발전소는 지구를 살리는 거대한 힘을 만들어낸다. 한글이 ‘글 길’이 되고 ‘말 길’이 되고 ‘숨 길’이 되어 그려낼 거대한 생태계를 떠올려 보라. 여기에는 인간의 관점으로 다른 생명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배제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한자는 지배층의 뜻을 나타내는 언어로 이용되었다. 이와 다르게 한글은 백성들이 제 뜻을 펼치는 언어로 기능했다. 언문이니, 암클이니 하는 말로 지배층은 한글을 무시했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숨을 쉬듯 한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한글이 언어 지배종이 되었다는 말은 백성들의 뜻이 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시인은 한글에 새겨진 바로 이 힘으로 “생태계를 살릴 경전”을 쓰려고 하는 셈이다.
일상 언어가 단일한 의미를 지향한다면, 시 언어는 한 사물 속에 드리워진 다양한 맥락을 그 안에 함유하고 있다. 상상력을 중시하는 시에서 언어의 힘은 무엇보다 이러한 역설을 온전히 끌어안는 데서 비롯된다. 시인은 상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 없는 사물을 이곳으로 불러낸다. 이를테면 「금관총」에서 시인은 성역 문을 열면 피어나는 “천년 서라벌 뜰”을 상상한다. 뜰에는 부귀영화꽃과 도환생꽃이 만발했고, 그 사이를 금빛어리표범나비가 날아다닌다. 시인이 상상하는 뜰에는 수많은 감각이 넘쳐난다. 길을 내는 달빛이 보이고, 갓난이의 옹알이가 들리며, 부엌 아궁이에서는 매콤한 연기가 흘러나온다. 달그락달그락 숟가락 소리와 개 짖는 소리는 어떻고, 미리내 강에 쏟아져 내리는 달빛 소리에 잠 못 들어 뒤척이는 강물은 또 어떤가. 이 모든 감각으로 시인은 돌이 금이고 금이 돌이 되는 금관총의 세계를 그린다.
금관총은 신라 시대의 무덤이다. 신라 고분 중에서는 금관이 처음 발견되어 금관총이라고 불린다. 집터를 파헤치는 과정에 우연히 발견된 이 고분을 시인은 왜 시 세계로 불러낸 것일까? 무덤 안에 들어간 시인은 수많은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돌이 금이 되고, 금이 돌이 되는 세계는 돌려 말하면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진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이 곧 죽음이 되는 역설이 펼쳐지는 곳이기에 금관총은 죽어도 죽지 않는 신생(新生)의 세계가 된다. 당장 고분 위에 집을 지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상을 영위하지 않았는가. 시인은 “금관총 금밭에 시 밭 일구면 금 나올까”라고 묻는다. 금밭을 시 밭으로 가꾸려면 상상하는 언어가 끊임없이 뿌려져야 한다. 시 밭에서 나오는 금이란 이리 보면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새 날개”와 다르지 않다.
일상 속에서 역설의 언어는 어떻게 사용될까? 역설이란 이어질 수 없는 이것과 저것을 하나로 잇는 어법을 가리킨다. 불교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언어를 부정하는 불교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언어를 이용한다. 언어는 강을 건너는 배와 같은 것이다. 강을 건넌 뒤 배를 머리에 이고 갈 수는 없다. 배를 버려야 몸이 가뿐해진다. 이것과 저것의 어느 하나에 주목하면 역설을 풀어낼 수 없다. 이를테면 ‘텅 빈 충만’은 ‘텅 빈’과 ‘충만’을 하나로 연결해야만 비로소 그 의미가 증폭된다. 텅 비면서 충만하고 충만하면서 텅 빈 경지란 금관총 안쪽에서 여전히 꿈틀대는 삶의 숨결과 다르지 않다. 삶은 늘 죽음과 더불어 있다. 언어의 역설에 주목하는 시인이 한 사물에 서린 이것과 저것의 맥락을 두루 살피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잡념(雜念)」에 표현된 대로, 우리는 수많은 생각에 매여 하루하루의 일상을 산다. 잡념은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의미한다. “골목길은 사람들 뜀박질 끌고 가고”에 나타나듯, 머릿속 생각이 이른바 생각하는 주체(?)를 만든다. 시인은 “꿈으로 엮어진 잡념의 바다”를 접으려면 “삼매경에 들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데 삼매경에 이르는 “주소가 없다”. 불교에서는 삼매경에 이르는 길로 화두 참구를 든다. 주소가 없다는 것은 이리 보면 참구할 화두를 아직 얻지 못했다는 맥락과 이어진다. 그러니 “구구 장천 날개 없는 날개”를 타고 흘러드는 잡념에 집착할 수밖에. 잡념에 휘말리면 끊임없이 잡념이 밀려든다. 잡념이 잡념을 낳는다.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잡념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시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삼매경이 그것이다.
삼매에 빠진 사람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지 않는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분별심에서 사물의 의미가 뻗어 나온다. 한 사물에 의미가 부여되면 다른 사물에는 그와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의미’에 따라 나누려고 한다. 언어로 사물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불탄다. 인간은 과연 언어로 사물을 지배할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우리는 언어의 역설을 이야기하며 충분히 얘기했다. 시인의 말마따나 잡념은 잡념에 돌려주어야 삼매경에 들 수 있다. 이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각하는 주체가 환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환상이 끊어진 자리에서 삼매로 가는 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사물을 아무리 분석하고 해석해봐야 인간이 덧붙인 의미만 밝혀질 뿐이다. 사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주체가 있다는 환상은 이토록 깊이깊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
글가람의 시는 바로 이 자리에서 사물의 생태계를 똑바로 보려는 마음결과 만난다. 생각하는 주체의 눈에는 죽은 사물만 보인다. 죽은 사물을 의미가 부여된 사물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시인은 「비의 지문」에서 생명력을 “지문들의 소란스러움”으로 표현한다. 조약돌 하나를 연못에 던지면 금세 비의 지문이 퍼져나간다. 시인은 사방으로 퍼지는 비의 지문을 ‘소리’로 보고 듣는다. 지문들이 저마다 목청껏 떠들어댄다. 내리는 비도 살아 있고, 그 비를 온몸으로 품는 연못 또한 살아 있다. 지문들의 저 소란은 그러니까 “지문 사이로 피어나는 천지조화”에서 뻗어 나온다. 사물에 집중하면 사물이 펼쳐내는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있다. 사물에 집중하는 이 마음이 바로 삼매와 이어진다. 불교의 삼매가 사물을 향한 감각마저도 끊어내는 경지라면, 시인의 삼매는 사물에 집중하는 저 힘으로 사물의 어떤 순간을 감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문 사이로 피어나는 천지조화
어지럽다
이 멀쩡한 대낮에
지문들의 실루엣이라니
지문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 추임새
물비단 짜고
구름꽃
만발한 향기
물방울 돌리고 있다
돌멩이로 연못 때리면 자지러지는 몸통
- 「비의 지문」
지문들의 소란스러움에 취한 시인은 그것을 고요한 한낮의 어지러움으로 표현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어지러움이 아니다. 머릿속이 혼란해 사유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의 어지러움도 아니다. 어지러운 시인은 더 이상 사물에 부여된 의미에 매이지 않는다. 의미에 매이면 “지문들의 실루엣”을 볼 수 없고, “지문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 추임새”를 들을 수 없다. “구름꽃/ 만발한 향기”를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위 시에서 사물을 향한 시인의 감각은 의미로부터 자유로이 움직인다. 연못 위로 피어나는 비의 지문은 시인의 마음결에서 일렁이는 상황으로 연결된다고 말하면 어떨까? “돌멩이로 연못 때리면 자지러지는 몸통”이라는 결구는 바로 여기서 펼쳐진다. 시인은 돌멩이를 품은 연못이 자지러지게 반응하는 상황을 온몸으로 느낀다. 시인은 이미 연못이라는 사물이 되었다.
생각하는 주체는 관념으로 만들어진 주체를 가리킨다. 생각하는 주체 앞에 서면 사물은 제 모습을 잃어버린다. 언어로 부여한 의미에 매여 그 뜻에 한정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물과 하나가 되려면 그러므로 사물을 주체 앞에 세우려는 이 마음을 떨쳐내야 한다. 「비의 지문」이 그 과정을 시화하고 있다면, 「빈 산」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펼쳐지는 디스토피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빈 산」에 나타나는 ‘빈 산’은 푸른 노래가 가득한 산이었지만 지금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멀건 민둥산”이 되었다. 까맣게 변한 산은 이제 가뭄도 홍수도 막아줄 수 없다. 무성했던 생명의 소리는 천지에 묻혔고, 하늘과 나무 머리가 세운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다만 “까슬까슬한 구름그림자 검은무덤에 앉아” 소갈머리와 주변머리가 뽑힌 민둥산을 슬프게 어루만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고 싶은가? 묻는 당신도 알고 대답할 우리도 그 범인을 알고 있다.
민둥산에는 “귀곡자 푸른절규”가 넘쳐흐른다. 한 맺힌 생명의 소리는 산천을 휘휘 곡소리가 되어 산을 까맣게 덮는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생각하는 주체는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생각하는 주체 앞에는 개발해야 할 사물이 놓여 있다. 그들은 사물을 이익 유무로 따진다. 이익이 많으면 좋은 사물이고, 이익이 적으면 나쁜 사물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물을 파괴하는 것쯤 아무렇지 않은 일로 생각한다. 말 그대로 생각하는 주체는 사물을 자기들을 위해 신이 베푼 선물로 여긴다. 정말로 그런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사물이 본래 지닌 특성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사물 하나하나를 생명으로 대하면 개발은 이루어질 수 없다. 개발이 없는 문명을 떠올려 보라. 생각하는 주체는 개발을 위해 개발을 벌이는 무한 개발의 상황에 처해 있다. 이들을 지배하는 자본은 개발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귀곡자 푸른절규에
산천 휘휘 돌리며
나무 위령재를 지내는지
웅웅 곡소리가 산을 까맣게 덮는다
저, 긴긴 곡소리에 산이 텅 빈다
빈 산지기
달 지나가다 제 몸빛 내려놓으니
발광체들 대머리 산 경작하겠다고
모여드는 빈산 혼(魂)들
- 「빈 산」
글가람은 온갖 생명이 쏟아내는 “긴긴 곡소리”가 민둥산을 까맣게 덮는 장면을 상상한다. 까만 산을 까맣게 덮은 이 영혼들을 위로하려는 것일까, 빈 산지기인 달이 제 몸빛으로 가만히 민둥산을 어루만진다. 산이 까맣게 변하기 이전부터 달은 온 산에 제 몸빛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수많은 생명과 더불어 뜨거운 감각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제 몸빛을 아무리 내려놓아도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없다. 다만 민둥산을 경작하겠다고 모여드는 “빈산 혼(魂)들”만이 서럽게 울며 달빛의 품속으로 밀려들고 있다. 생각하는 주체가 된 인간은 무엇보다 사물을 품어 안는 달빛의 마음을 잃었다. 달빛은 생명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되면 제 몸빛을 산에 내려놓을 뿐이다. 그러면 뭇 생명이 알아서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자연 이치를 정확히 수행하는 것이다.
「한글」에서 글가람은 “생태계를 살릴 경전”을 한글로 쓸 거라고 선언했다. 경전은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편 윤리를 담고 있다. 보편 윤리는 모든 생명이 모든 생명을 환대하는 윤리와 이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연못은 환대하고, 비는 연못에 지문을 일으킴으로써 온전히 연못과 하나가 된다. 수많은 지문들이 일으키는 소란스러움이 커질수록 연못과 비는 더욱더 큰 희열을 느낀다. 서로를 향한 뜨거운 희열이 없이 어떻게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뜨거운 희열이 사라지고 차가운 의미만 남은 세계는 까만 민둥산이 되어버린다. 까만 민둥산에서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오로지 죽은 생명의 혼들만이 사방을 떠다닐 뿐이다. 글가람의 시는 이러한 죽음 너머에서 일렁이는 새로운 삶을 끊임없이 상상한다. 생각하는 주체는 미칠 수 없는 자리에서 시인은 “푸른노래 가득하던 산”을 상상한다. 그가 시로 표현하는 보편 윤리는 그런 점에서 푸르고 푸른 생명 윤리와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