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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10 -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 성전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다!
필리프 4세는 중앙집권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폭력과 재정의 독점을 원동력으로 삼는 국가 체제를
형성하니 플랑드르와의 전쟁, 교황과의 투쟁, 성전 기사단과 유대인 탄압을 통해 국왕주권을
확립하고 신성화 작업에 매진했는데 사회·경제·문화가 정점을 찍고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니 말년에는 왕자비들의 간통 사건과 세금에 대해 전국적 봉기로 커다란 위기에 처합니다.
필리프 4세는 1285년 부왕 필리프 3세가 사망하자 17세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친동생 중에는
발루아 백작이 되는 샤를이 있었고, 이복 형제로는 에브뢰 백작이 되는 루이, 에드워드 1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는 마르그리트, 합스부르크 루돌프 3세 부인이 되는 블랑슈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필리프 4세 치세 이후 서유럽 세계 정치를 뒤흔드는 강력한 가문들을 형성하게 되는데
필리프4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자로서 왕자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니 종교와 철학등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으며 가정교사였던 이탈리아 출신의 에지디우스 콜로나는 중세의
대표적인 책인 "군주통치론(De regimine principum" 을 집필하여 정치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대리석왕’ 또는 ‘무쇠왕’ 이라 불렸는데 철두철미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을 드러내는 별명이었으니
파미에 주교 베르나르 세세는 필리프 4세를 가리켜 “그 자는 인간도 짐승도 아니다. 그저 조각상
이다” 라고 말할 만큼 신하들 앞에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엄숙하고도 권위 있는 태도를
유지했으며 폭력과 재정의 독점화 과정에 기반을 둔 국가 체제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별칭인 ‘미왕(le Bel)’ 은 그의 외모와 관련된다기 보다는 프랑스 왕국의 풍요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니 중세적 맥락에서‘아름다움’이란 바로 ‘풍요로움’
을 의미하며 이는 중세의 세 위계적 상상 세계(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 또는
왕의 세 기능(사제, 전사, 양육자) 중에서 ‘일하는 자들’ 의 가치 및 풍성한 양육자를 뜻합니다.
이제 프랑스에서 11~12세의 봉건주의적 질서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으며 국왕 주권에 의한 단일한
국가체제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필리프 4세는 두가지
장애물과 충돌하니 하나는 지방분권적인 성향을 지닌 지방제후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국 바깥에서 서유럽 기독교세계 전체에 걸쳐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던 교황권이었습니다.
제후들 중에서 필리프 4세에게 문제 되었던 곳은 플랑드르 지역이었으니 플랑드르는 모직물 생산과
북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다른 어떤 곳보다 부유한 곳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필리프 2세 이후
로 프랑스 왕권에 점차 종속되어 갔지만 경제적으로는 양모 생산지인 잉글랜드와 더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97년 플랑드르 백작 기 드 당피에르는 딸 필리핀을 잉글랜드의
세자 에드워드드 2세와 결혼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프랑스 왕실의 커다란
재원이 될수 있는 플랑드르에 대한 영향력이 잉글랜드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일이었으니..... 기 드 당피에르와 필리프 4세 사이의 불화는 당연 했습니다.
기 당피에르는 필리프 4세에 대한 봉건신서를 파기하고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으니
필리프 4세는 6만명의 대군을 조직해 플랑드르 백작령을 공격했지만 부르주아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저항하는 플랑드르 백작 기 를 굴복시키기 어려웠으며 1302년 11월 쿠르트레 전투
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플랑드르 코뮌군에 패배한 사건은 필리프 4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1300년을 전후로 해서 프랑스 왕국에 전례없는 상황을 초래했으니 필리프 4세는 전비를 마련
하기 위해 화폐개주를 실시하니, 화폐의 순도를 조절하여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차액
으로 왕실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인데 문제는 필리프 4세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잦은
화폐개주를 실시해 화폐 질서 혼란을 야기하여 경제적으로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또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 전쟁을 십자군과 같은 것으로 선전하면서 십자군을 위해 실시했던
전국적 과세를 플랑드르 전쟁 전비 마련을 위해 강행했으니 그는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
다스리는 프랑스 왕국이야말로 제2의 성지로, 프랑스의 적과 싸우는 전쟁은 십자군 전쟁과
같고 프랑스 왕국을 위한 죽음은 ‘조국(Patria)’ 을 위한 순교와 다름없다는 주장” 을 내세웁니다.
결국 1304년 8월 18일 몽스앙페벨 전투에서 플랑드르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로써 플랑드르
봉기는 일단락 지어졌지만 플랑드르인들의 반프랑스적 정서는 14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이 봉기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날 다양한 종류의 반란의 서막에 불과했으며, 플랑드르
전쟁을 위한 과세는 부르주아와 농민뿐만 아니라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모두 부과 되었습니다.
이는 플랑드르 전쟁 이후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 불만은 바로 성직자들의
최고 대표인 교황으로부터 터져 나왔는데, 플랑드르 전쟁이 한창인 1300년을 전후해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도 대외적인 분쟁을 두차례에 걸쳐 치러야 했으니 세속권력자인
프랑스왕이 과연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자신의 재판정에서 재판을 진행할수 있는가 였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프랑스 성직자는 성직자이기 이전에 프랑스인인지, 아니면 프랑스인이지만 성직자
인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전자라면 성직자에게도 과세와 사법권을 부과할수 있는 것이고
후자라며 성직자는 오직 교황의 사람일수만 있으니 필리프 4세는 전자 입장에서
과세를 시행했고 그를 비방하는 파미에 주교 베르나르 세세를 자신의 재판정에 회부했습니다.
1296년과 1302년에 두 번의 설전이 벌어졌는데 일단 1296년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
와 관련해서는 보니파키우스 8세가 양보하면서 1297년에는 화해의 대가로 필리프
4세의 조부 루이 9세를 성자로 시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만..... 1302년 재판권
문제와 관련해서 교황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고 필리프 4세를 파문으로 위협합니다.
교황의 파문 위협에 필리프 4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1303년 모든 신민들을 소집하여 교황
이 이단이라 고발하며, 프랑스 최초의 총신분회의에서 고위 성직자, 대제후, 도시 부르주아
대표가 처음으로 프랑스 왕국을 대표하며 모였고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자 성자의
후예인 필리프 4세는 우상숭배 등과 관련해 오히려 보니파키우스 8세를 이단이라 단죄합니다.
프랑스 국상 기욤 드 노가레는 병사들을 이끌고 보니파키우스 8세가 속한 카에타니 가문과 숙적인 콜로나
가문과 접촉했으니, 1303년 9월 7일 기욤 드 노가레와 시아라 콜로나는 교황이 머무르던 아나니 별장
으로 쳐들어가, 시아라 콜로나는 끼고있던 철제 장갑으로 교황의 뺨을 때렸고 교황은 기절했으니 가장
높은 권위를 뽐냈던 68세 보니파키우스 8세는 처참하고도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했고 한달후 사망합니다.
이후 1303년에 선출된 교황 베네딕투스 11세는 1304년에 사망했고 짧은 공백기를 거쳐서
1305년 신임 교황으로 클레멘스 5세가 즉위했지만 이제 교황은 더 이상 13세기와
같은 기독교 세계 전체의 보편적인 영적 지도자로 자임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선출된 교황들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로마로 가지 못했고 남부 프랑스 각지
를 전전하다가 결국 프랑스 왕국 바로 옆, 프로방스 백작령에 위치한 아비뇽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이제 14세기 말까지 프랑스 왕권에 종속된 교황권, 즉 아비뇽 교황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왕은 자신의 왕국에서 황제다” 라는 주장을 현실화시켰는데 내부적으로 어떤 권력
보다 상위에 있는 권력이자 외부적으로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권력이라는, 13세기초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추구했던 ‘국왕 주권’ 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 합니다.
그 다음 희생양이 된 것은 성전기사단이니 11세기말에 펼쳐진 제1차 십자군 이후 십자군 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무장한 수도사, 즉 수도사의 계율을 지키는 기사 조직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들은 성지 상실후 십자군 운동의 부활을 노리며 국제적인 금융세력으로 성장해 나갔으니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 중 프랑스 조직을 1307년 10월 13일 해체하고 기사단원을 체포합니다.
이유 중에 하나는 실제 해체 당시 필리프 4세가 내세웠던 이유로 성전기사단의 타락을 들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국가체제 팽창과 더불어 만성적으로 결핍 상태인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견해이며, 마지막으로는 일국 중심의 국가 체제를 건설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국제 조직망을 갖춘 성전기사단과 여러모로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와 관련해서는 필리프 4세만의 판단으로 과연 성전기사단의 타락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고 둘째와 관련해서는 필리프 4세가 몰수한 기사단의 재정을
모두 병원기사단에 넘겼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며 셋째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충돌
이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자료가 명확하지 않으니... 어느것이 원인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의 관례와 행실이 여러모로 타락하여 이단적인 모습
을 보인다고 판단했고 기사단 주요 인물들을 감금하고 재판을 진행하고자 했는데
하지만 아비뇽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눈치를 보면서도
성전 기사단 재판을 교황이 주도하는 교회 재판정에서 이를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클레멘스 5세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1314년 비엔공의회에서 성직자 들이
이를 논의하는 것과 별개로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와 핵심 인물들을
이단으로 처형했는데 마치 성스러운 프랑스 왕은 프랑스 내에서 세속인과 성직자 모두
를 뛰어 넘는 종합적인 존재로서 이 둘 모두에 대한 재판권을 지닌다는 듯이 여겨집니다.
자크 드 몰레는 필리프 4세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고 전해지니, “신은 누가
잘못했는지 누구에게 죄가 있는지 아신다. 우리를 무고하게 처단한 자들에게는 불행이 곧
닥칠 것이다. 신이 우리의 죽음에 복수를 할 것이다.” 호사가들은 곧 드러나게 될 왕자비
들의 간통 사건과 카페왕조 직계 혈통의 단절이 자크 드 몰레의 저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필리프 4세는 선왕들이 지키고자 한 ‘가장 기독교적인 왕’ 의 칭호에 집착했는데 이는
필리프 2세나 루이 9세의 태도와 또 다른 것이었으니.... 필리프 2세가 교황에게
순종하는 군주로서, 루이 9세가 성 프란체스코를 본받는 군주로서 그랬다면 그는
교황마저도 처벌하는 기독교 세계의 궁극적인 수호자로서 이 칭호를 받아들였습니다.
또 성스러운 프랑스 왕국에 유대인들이 발붙이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성전기사단
해체 1년 전인 1306년에 왕국내 10만여명의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왕국 바깥
으로 추방했지만 얼마후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 와서 살도록 관대한 조치를 취한다고
하면서 정착조건으로 돈을 요구했으니 이 기묘한 신앙심은 재정충당의 목적과 맞닿았습니다.
카페 왕들 중에서 필리프 4세의 가족만큼 수많은 왕과 왕비를 배출한 왕은 없었으니
먼저 필리프 4세의 왕비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피레네 산맥 북서부에 위치한
독립 왕국 나바라의 여왕 잔 1세였으니, 1285년 필리프 4세와 결혼한
잔 1세는 일찍 사망한 자녀들을 제외하고도 네 명의 장성한 남매들을 두었습니다.
첫째 아들 루이 10세는 프랑스의 왕세자인 동시에 1305년 모후가 사망하고 나서 부터는 나바라
왕을 겸했고 둘째인 필리프는 푸아티에 백작으로 1316년 필리프 5세로 즉위하게 되고
셋째인 샤를은 라마르슈 백작으로 1322년 샤를 4세로 즉위하며 딸 이자벨은 1308년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해 잉글랜드 왕비가 되어 잉글랜드 정치의 주도권을 지게 됩니다.
나중에 프랑스와 백년에 걸친 전쟁을 일으킬 백년전쟁의 영웅 에드워드 3세는 바로 이 이자벨의
아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 백작 샤를은 지중해 원정의 영웅으로
그의 아들 필리프는 1328년 필리프 6세로서 카페 왕조 방계인 발루아 왕조를 개창하게 됩니다.
장남과 장녀를 다른 왕국의 왕과 왕비로 거느리고 있는 만큼 필리프 4세가 자신의 혈통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존심이 남달랐다는 것은 추측할수 있는데, 하지만 1314년 초 가문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잉글랜드에서 오랜만에 파리로 돌아온 이자벨에 의해서
장남과 삼남의 부인 마르그리트와 블랑슈가 젊은 기사 두명과 간통하다가 적발되었던 것입니다.
마르그리트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와 루이 9세의 막내 딸인 아녜스 사이에서 태어
났고, 블랑슈는 부르고뉴 백작 오통 4세와 아르투아 여백작 마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이었는데...... 이 두 여인들과 이들과 관계를 맺은 오네 가문의 필리프와
고티에 형제는 모두 대역죄의 판결을 받았고 일벌백계의 잔혹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차남 필리프의 부인 잔 또한 이들과 간통의 혐의를 받았으나 그녀 만큼은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대역죄 판결을 받은 필리프와 고티에는 산체로 사지가 절단되었고 그들의 물건 또한
잘려져 개들에게 던져졌으며 그들의 잘려진 신체는 이리저리 끌려다닌 후 효수대에 걸렸습니다.
마르그리트와 블랑슈는 삭발을 당한 채 검은 천으로 덮인 수레에 태워져 감옥으로 향했는
데... 마르그리트는 루이 10세가 왕위에 오르는 1315년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블랑슈는
7년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1322년 샤를 4세가 왕위에 오를 때 수녀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자크 드 몰레의 저주가 실현이 된 것일까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 이룬 듯이 보였던
필리프 4세에게 1314년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불길하기 그지없는 해였으니 이미
두 며느리들의 간통으로 커다란 오명을 뒤집어 쓴 그에게 더 큰 불행이 찾아
왔는데..... 그것은 바로 1314년 7월에 재개된 플랑드르와의 전쟁과 함께 시작 되었습니다.
치세 말년에 최측근인 시종장 앙게랑 드 마리니는 전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총신분회의
를 개최하여 과세를 결정하고 세금을 거두는데, 하지만 신분대표자라고 하는 자들과 일반
여론의 온도차는 꽤 컸으니 이제 경제적 번영의 시기가 저물고 인구와 식량의 불균형으로
경제적으로 쇠퇴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던 상황에서 일반 서민들의 불만은 급격히 고조됩니다.
다행스럽게도 9월 3일 국왕과 플랑드르 대표단 사이의 협정으로 전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갈등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제 사람들은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과세는 중단되어야 하며 나아가 이미 거둔 조세 또한 환급되기를 기대
했지만 필리프 4세 정부는 세금을 계속 거두었고 이미 거둔 세금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세금을 거두기 위해 필리프 4세와 앙게랑 드 마리니가 가짜 전쟁을 일으키는 속임수를
쓴 것으로 해석되었으니 전국 각지에서 귀족들과 성직자,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필리프 4세 정부에 대한 성토와 비판이 빗발치기 시작했고 11월 3일 필리프 4세는
이들의 비판을 접하고 크게 놀랐으며 그 다음날 4일 사냥을 하던 도중 낙마하여 급사합니다.
이제 필리프 2세부터 시작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의 흐름이, 짧게는 20여년 동안 필리프 4세
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국가 체제화의 흐름이‘귀족 동맹’이라고 부르는 지방분권적인 저항
세력에 부딪혀 제동이 걸리게 되었으나, 이 모든 책임을 져야할 필리프 4세는 갑자기
사망했고......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루이 10세의 몫이 되었습니다.
루이 10세는 필리프 4세와 나바라 여왕 잔 1세 사이에 태어났는데 1305년 모후 잔 1세의 사망으로
나바라 왕위를1314년 11월 부왕 필리프 4세가 전국적인 귀족동맹 봉기 속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즉위하자마자 지역의 제후들과 협상을 통해 봉기를
진정시키는데 전력을 다했지만 1316년 6월 통치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루이 10세는 1307년 대관식을 제외하고는 나바라에는 가지 않았으니 나바라는 왕이 없이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 1314년 봄에는 부인인 마르그리트가 동생 샤를의
부인 블랑슈와 함께 간통 사건으로 고소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아 유폐되었으니
이후 루이 10세가 왕위에 오른 뒤인 1315년 마르그리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합니다.
1314년 플랑드르 전쟁에 따른 과세와 조기에 협상으로 이어진 휴전은 부왕 필리프 4세와 시종장
앙게랑 드 마리니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니 각지의 귀족과 성직자, 부르주아
들은 왕이 가짜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했고 전국적으로 번진 봉기에 충격을 받은 필리프
4세는 낙마사고로 11월 4일 사망하니 봉기를 진정시킬 책임이 루이 10세에게 주어졌습니다.
제후들의 지방분권적인 조항들을 담고 있는 헌장들을 검토하고 협상하는 일로 쉴 틈이 없었으니
귀족 동맹은 예전의 봉건적인 자율권과 자치권을 요구하는 듯하면서도 과도한 중앙화를
제약하는 공통된 조항들을 제시하며 왕국을 국가 체제가 아닌 지방 간의 연방상태로
유지하고자 했는데 이들의 주장은‘좋았던 성왕 루이 시절로 되돌아가는 개혁’으로 요약됩니다.
1315년 루이 10세는 플랑드르와 분쟁상태에 들어서 원정 준비에 나섰는데 같은 해 8월 19일에는
지중해에 진출했던 앙주가문 출신의 헝가리왕 샤를-마르텔의 딸 클레망스와 재혼했으며,
루이 10세는 실내 테니스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또한 매우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316년 6월 5일 뱅센에서 테니스를 친후 차게 식힌 포도주를 과하게 마신 후 갑자기 사망합니다.
공식적으로 늑막염이지만 독살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문제는 왕위계승이었으니 감금되었다
사망한 마르그리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잔 2세뿐이었으며 1315년에 결혼한클레망스는
임신중이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왕자인지 공주인지 모르는 상황인데다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니, 1315년부터 냉해에 의한 흉작이 거듭 발생하여 대규모 기근사태가 벌어집니다.
장 1세(1316) 는 1316년 11월 14일 태어나 5일후 19일 사망한 루이 10세의 아들로 실제로 왕이라
볼수 없으니 그의 왕위계승 인정은 숙부 필리프 5세의 왕위계승 야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니,
루이 10세가 사망하자 아비뇽 교황 선출에 개입하게 위해 리옹에 머무르고 있던 푸아티에
백작 필리프가 재빨리 파리에 도착했고 무력을 동원해 궁정을 비롯한 주요 근거지들을 장악합니다.
왕위계승 회의를 개최하던 왕국 대제후들은 필리프의 전격적인 도발행동에 놀라면서 황망하게 당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필리프가 내세운 것은 자신의 왕위계승권이기 보다는 루이 10세의 딸 잔에
대한 후견권과 섭정권이었으니 사실 필리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제후들은 공주인 잔에 대한
후견권이 외숙부인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와 외할머니 아녜스에게 돌아간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필리프 5세는 외드 4세와 잔과 복중 태아와 관련하여 섭정권에 대한 일련의 협정을 채결하니 클레망스가
임신한 아이가 왕자라면 필리프가 후견인이 되며 그가 왕이 된후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와 촌수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이 왕위에 오르기로, 또 그 아이가 공주라면 왕위계승권은 장녀인 잔에게 돌아
가며 잔의 섭정은 필리프 5세가 맡되 신랑 결정과 결혼 관련 문제는 부르고뉴 공작이 섭정하기로 합니다.
드디어 11월 14일 밤 클레망스는 남자아이를 낳았고 이름은 장(Jean) 으로 지어졌는데 당황스럽게도
이 아이는 19일에 바로 사망하자 푸아티에 백작 필리프는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하면서 파리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기 장은 축성식과 상관없이 혈통에 의해 태어나면서 부터 프랑스
왕이었으며..... 협약에 따라 그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인 자신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프의 주장에 동의한 제후들은 아무도 없었으니 태어난지 5일만에 죽은 아기를 왕으로 인정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숙부인 발루아 백작 샤를
도, 또 그의 동생인 라마르슈 백작 샤를도 그에게 등을 돌렸고 필리프는 정치적으로 고립
되기 시작했지만 축성식도 하지않고 통치도 하지않은 장 1세가 왕조 계보에 자리잡게 됩니다.
즉 장 1세가 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필리프 5세의 왕위도 인정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또 이와
더불어 필리프 5세는 남성만이 프랑스왕이 될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카 잔의 왕위계승권을 부정
했으니.... 이제 프랑스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이 처음으로 세워집니다
루이 10세의 딸 잔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한후 남성만이 왕이 될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대귀족들의 반발이 극심했으나 끊임없는 설득과 신분회의 개최를 통해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획득했는데 왕국의 개혁과 십자군에 고무되었으나 즉위 6년만인1322년 1월
30세의 나이로 사망하니 그 또한 딸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생 샤를 4세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필리프 5세는 필리프 4세의 둘째 아들로 푸아티에 백작이 되고 1307년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부르고뉴 백작 로베르 2세의 딸 잔과 결혼했으며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 친
프랑스적인 요하네스 22세가 선출되도록 리옹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부고를 듣자 말을
몰아 파리에 도착했는데 오는 도중 지방의 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충성신서를 받아냈습니다.
자신이 주도하는 루이 10세 장례식을 다시 한번 거행했으니 루이 10세의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장례식은 필리프 5세가 루이 10세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점을 보여
주는 듯이 진행되었고 7월 12일에는 시테 왕궁과 루브르성을 점거하고 17일에는 조카
잔의 섭정을 자처하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와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협상을 벌입니다.
이 당시 루이 10세의 자식이라고는 전처 마르그리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 잔뿐이었고
재혼한 헝가리 공주 클레망스는 임신 상태였으니 대부분의 제후들은 공주인 잔에 대한
후견권이 외숙부인 부르고뉴 공작 외드 4세와 외할머니인 아녜스에게 돌아간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아직 전례는 없었지만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검토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1317년 1월 6일 대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랭스 대성당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며 파리로 돌아와서 2월 2일과 3일에는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어 왕위라는
‘공적인 것(res publica)’ 은 오직 남성만이 승계할 수 있다고 천명했는데 대귀족들은 물론 숙부
인 발루아 백작 샤를과 동생 라마르슈 백작 샤를도 등을 돌렸으니 필리프는 정치적으로 고립됩니다.
필리프 5세는 신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로 결심했으니 1317년부터
1321년 까지 무려 28회의 신분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신분회의는 필리프 4세가 개최했던
것처럼 왕궁에서 전국의 대표자들을 모아 왕국의 통합을 선전하는 총신분회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방을 자신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그 지방의 귀족들과 성직자, 부르주아들을 때로는 함께
때로는 개별적으로 소집했는데 초기에는 자신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설득시키기
위해, 그 다음에는 1318년 부터 다시 발발한 플랑드르와의 전쟁을 위한 세금을 걷기
위해, 마지막으로는 왕국의 개혁과 십자군 준비와 관련해 끊임없이 신분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지방을 찾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눈물겨웠으니 1319년 2월 10일 필리프 5세는 대플랑드르 전쟁 비용과
관련한 과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역의 귀족대표자들을 모았지만 적대적이었던 노르망디 귀족들
과 샹파뉴 귀족들이 참가를 거부했고 필리프 5세는 직접 두 지방을 찾아가야 했으니 노르망디에는
자신의 측근을 파견했고 국왕은 샹파뉴 서쪽에 위치한 프로뱅까지 가서 4월 1일 회의를 소집합니다.
노르망디의 회의는 무사히 끝났으나 문제는 샹파뉴 신분회의였는데 국왕이 직접 샹파뉴
까지 왔는데도 불구하고 4월 1일에 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결국 국왕이
샹파뉴의 중심지인 트루아까지 가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자 귀족들은 트루아에
모여서 신분회의를 개최했고 필리프 5세는 이들로 부터 과세를 동의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왕국의 제후들과 귀족들은 필리프 5세 치세 초기에 적대적이고 비협조적이었지만 필리프 5세 덕분
에 교황이 된 요하네스 22세는 세속 권력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 필리프 5세의 정치적
곤경을 해결해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으니 1316년부터 1320년까지 교황의 권위를
내세우며 프랑스의 주요 제후들에게 80여통의 서한을 보내 필리프 5세를 보필할 것을 촉구합니다.
또한 필리프 5세에게 봉기를 일으킨 플랑드르 반란군에게는 명성이 자자했던 이단심문관 베르나르
기를 파견해 손쉽게 이들의 굴복을 끌어내기도 했으니 결국 교황의 설득은 1318년부터
효과를 발휘해 1320년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정치적 상황이 나아지게 되었으니 많은 귀족과
제후들이 파리 궁정으로 모여들었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3세가 이끄는 반란 또한 진압됩니다.
1320년부터 왕권 중심의 개혁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필리프 5세는 원대한 포부를 품기
시작했으니 그는 화폐를 개혁하고 왕령지를 체계적으로 통일하고자 했으며 매우
선구적이게도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하고자 했는데 실제로 프랑스에서 도량형 통일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라야 가능해졌던 만큼 그의 생각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필리프 5세는 반교황적인 종교 분파들을 이단으로 탄압하고 유대인과 나병환자들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주변인들에 대한 억압 정책도 펼쳤으니 이러한 신앙심은 또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루이 9세로 대표되는 십자군에 대한 꿈과 연결되지만 정치 엘리트들은 필리프 5세의 중앙집권적
정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니 자신들의 독립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누리려 했습니다.
1321년 8월부터 고열과 장염을 앓기 시작한 필리프 5세는 결국 다음 해 1월 2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그에게는 오직 딸들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확립한 왕위계승 원칙- 남성
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 에 따라 자연스럽게(?) 왕위는 동생인 샤를 4세에게 돌아갔습니다.
샤를 4세(1322–1328) 는 형이 확립한 남성승계 원칙 때문에 순탄한 정책을 펼쳤으며 신분회의를
자주 개최할 필요도 없었는데 십자군 원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결국 1324년 부터 기옌
지역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 에드워드 2세와 생사르도스 전쟁을 치렀으니 곧 전개될 백년전쟁의
전조로 평가되며..... 라마르슈 백작의 지위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습니다.
필리프 5세가 왕위에 오를때 숙부 발루아백작 샤를과 함께 필리프 5세에 대한 반대 세력의
중심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궁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했지만 필리프 5세가
루이 10세의 딸인 잔의 왕위계승권을 거부하면서 남성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왕위 계승원칙을 세운 때문에..... 주변의 반발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룩셈부르크 가문) 의 딸 마리 드 뤽상부르와 재혼을 했는데 사실
그는 1307년경 부르고뉴 백작 오통 4세와 아르투아 여백작 마틸다의 딸로 필리프 5세의 왕비 잔 2세
의 여동생 블랑슈와 결혼을 했으나 블랑슈는 부왕 필리프 4세 치세 말기에 밝혀진 1314년의 간통 사건
으로 유폐되어 있었으니 그가 왕위에 오르자 교황 요하네스 22세는 샤를 4세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샤를 4세의 재혼이 성사되었고 블랑슈는 이후 수녀원으로 들어갔는데 하지만 1324년 왕비
마리는 마차 사고로 복중 태아와 함께 사망하니 1325년 7월 샤를 4세는 에브뢰 백작의
딸로 사촌관계인 잔과 결혼을 했으니 잔은 샤를 4세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낳았으나 아들을 낳지는 못했으며 이는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후일 중요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별 문제 없이 왕위를 계승한 샤를 4세는 개최해봐야 늘 시끄러운 신분회의에 큰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니 그보다는 행정과 재정과 관련된 관료제를 세밀하게 발전시켜 나갔는데, 안정적
인 왕권을 바탕으로 1323년 부터 모든 프랑스 왕들의 꿈인 십자군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
하기 시작했지만..... 복잡해져 가는 서유럽의 정세는 십자군을 조직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봉신으로 기옌(아키텐) 지방을 통치하던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와의 갈등이었으니 근본적
으로 기옌 영지 문제는 두 국왕들에게 첨예한 갈등의 소지로 남아 있었는데, 지방분권적인 봉건
주의적 질서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명목상의 종주권을 지닌 프랑스왕과 실질적인 통치자인 종신
잉글랜드왕의 관계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영토통합적인 국가 체제로 발전해 나갈수록 문제가 됩니다.
기옌(아키텐)은 두 국왕 모두에게 자신의 확고한 영토로 만들려는 욕망의 대상이 되었으니....
에드워드 2세 입장에서 보자면 기옌의 전통적인 실질적 통치자는 잉글랜드 왕이었기
때문에 기옌은 잉그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어야 했고 샤를 4세의 입장에서 보면 기옌은 애초
부터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하사한 봉토였기 때문에 의당 프랑스 왕국의 일부였습니다.
에드워드 2세와 샤를 4세의 관계 악화는 에드워드 2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로저 모티머 를
샤를 4세가 보호해 준 사건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1322년 에드워드 2세에 의해 봉기가 진압
된후 감옥에 갇힌 로저 모티머는 탈옥에 성공하여 샤를 4세에게 몸을 의탁했으니 에드워드
2세는 모티머 인계를 요구했지만 샤를 4세는 누이 이자벨의 내연남인 모티머 인계를 거부합니다.
에드워드 2세와 샤를 4세 사이의 긴장 관계는 기옌의 생사르도스에서 불꽃이 일었으니, 생사르도스
는 세속 차원에서는 기옌에 포함되지만 교회 교구상으로는 프랑스의 사를라 교구에 속했는데
잉글랜드군이 생사르도스에 요새를 건축하자 파리 고등법원은 프랑스 왕국까지 침범했다면서
시정을 요구하나 잉글랜드왕 휘하 기옌인들은 프랑스 관리들을 쫓아내거나 교수형을 집행 합니다.
샤를 4세는 에드워드 2세를 봉신으로 다루면서 복종을 요구했고 영국왕 에드워드 2세는 불복종
으로 일관하니 1324년 7월 1일 고등법원을 통해 기옌 영지 몰수를 선언했고 발루아 백작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손쉽게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얻었으니 결국
1324년 9월 22일 잉글랜드 대표로 이자벨이 참석한 가운데 양국 간의 평화 조약이 맺어집니다.
에드워드 2세는 기옌 영지를 유지했으나 이 지역의 관리는 프랑스 왕이 파견한다는 데 동의하는
한편 그 자신은 샤를 4세에게 봉건신서를 해야만 했는데....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봉건신서
문제를 두고 다시한번 샤를 4세와 대립을 했고 이에 샤를 4세는 기옌 영지 몰수를 선언 합니다.
이 와중에 잉글랜드 왕비인 이자벨이 애인 모티머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
했으니 왕비는 에드워드 2세에게 등을 돌리고 정적과 손을 잡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에드워드
2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행위였으니 샤를 4세에게 누이 이자벨의
뻔뻔한 행동은 매우 큰 부담이었고 결국 이자벨과 모티머에게 잉글랜드로 떠날 것을 명령합니다.
이후 두 연인은 에드워드 2세를 공격한 전투에 승리를 거두니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이자벨은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왕위에 올렸으며 프랑스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옌과 관련한 조약을
맺고자 했지만 9월 에드워드 2세가 죽었고 12월부터 샤를 4세 또한 몸져 누웠으니.... 이듬해 1328년
2월 1일 샤를 4세가 사망하였는데 형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왕위를 이을 아들은 태어나지 못합니다.
샤를 4세가 죽기전에 임신한 잔은 4월에 셋째딸 블랑슈를 출산하고 사망했으니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계직계냐 아니면 남계방계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
가 되었으니, 즉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4세의 친조카 발루아
백작 필리프 6세 사이에 프랑스 왕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발루아왕조" 가 들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