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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유사(遺事)가 많아 1, 2로나눈다.
1부. 김익희, 29세. 평윤씨, 김수남, . 김 장생, 27세. 김 현, 27세.
김성하, 25세. 김숙남, 25세. 김유신, 27세. 김후경, 28세.
김 오, 28세. 취지,25세. 김득선, 24세, 김의정, 24세.
김정일, 24세. 김여호, 24세. 김 덕보, 31세.
2부. 김존경, 28세. 김득신, 26세. 김재관, 27세. 김광계, 25세.
김광악, 25세. 김요형, 25세. 김 초, 26세. 김자빈, 27세. 김덕란, 26세.
김득남, 28세. 김동준, 25세. 김 설, 25세. 김남식, 26세. 김여성, 25세.
김남철, 26세. 김이성, 27세. 김화준, 27세. 김익제, 27세. 김성일, 29세.
김성구(成九, 29세)
병자호란이 일어나기전 건위주의 천태종이
외교서신을 보내왔다.
조선은 답례하는 화답사를 이곽이란 자를 차출하여 보냈다.
이곽이 심양에 도착하자, 때마침 국호를 청이라하고, 왕은 황제,
연호는 숭정이라하며, 청태종의 즉위식을 거행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즉위식에 조선의 사신을 참석시키려고,
이곽에 참석을 강요하였다.
즉위식에 참석한 이곽 일행을 나라에 오명을 입힌자라며,
조선의 여론은 좋지않았다.
이곽과 나덕현이 청국사신 용골대와 함께 귀국했다.
김익희는 아우 김익겸과 더불어
“이곽, 나헌덕을 죽여 8도에 효수하고,
청나라의 사신을 목을 베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야한다.”라고 상소했다.
청나라 사신이 상소의 소문을 듣고
, 본국으로 도망쳐 간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 후 후금은 세력이 더욱커져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고쳤다.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왔다.
병자년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정묘호란 때 형제의 나라로 맺은 조약을,
군신관계 질서를 임금과 신하의 나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이 거부하자,
청나라는 선조의 태도를 문제삼아 왕자를 볼모로 요구하고,
주전파 신하중 주동자를 청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들어주지 않았다.
청태종(1635)은 분노하여,
친히 1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지만,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혔다.
신하들과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항전하였지만,
버티지 못하고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강화조약을 맺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3번 무름을 끓고,
9번 절하는 삼배 구고두레(1번 무름끓고, 3번 절하기)를 했다.
군신관계의 나라에서 청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대우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갔다.
인조는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임금이 되어버렸다.
김존경(存敬, 28세)은
선조조 문과급제, 강진현감과 삼척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있다.
정묘호란때 왕실이 가화도로 파천하고,
왕세자가 분조하여 완산으로 남하 할 때 호위한 공을 사양하였다.
천추사 서장관 및 성절사로 연경을 다녀왔다.
광원도 관찰사로 선정했으나 노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김득신(得信, 26세)과
김재관(在寬, 27세)는
어가를 호종한 공로로 호종공신에 책록되다.
김광계(光繼, 25세)는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의병대장 근시제 해의 아들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청군에 에워싸여 위급하게 되었다.
의병대장이 되어 아우
김광악(光岳, 25세)을 참모로 삼고, 종제 두문자
김요형(耀亨, 25세)과 조카
김 초(礎, 26세)의
도움을 얻어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였다.
죽령에 이르니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향을 향해 통곡하고 돌아왔다.
임진, 병자 양란에 부자 의병대장으로 충절의 표상이되었다.
25세 야일재 휘 광악 (양간공파 ‧밀직부사공파)
1591(선조25)-1648(인조26)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이직. 호는 야일재.
아버지는 증 판서 해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진성이씨이다.
정구, 장현광의 문인이었고 1618(광해11)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때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가 있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귀향하여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이이첨을 주참 할 것을 주청하였다.
병자호란 때 형 광계와 더불어 의병을 모아 죽령에 이르렀을 때
남한산성의 비보를 듣고 서쪽을 향해 통곡을 하고 귀향하였다.
벼슬 공부를 폐지하고 청량산에 들어가, 대명일민(大明逸民))이라
자칭하고 은거하였으며 저서로 야일재 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야일재 휘 광악 묘갈문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관로에 출사 하는 것과
처사로 지내는 두 길 뿐이다.
다만 산림에 살면서 고요하고 곤궁한 것을 편히 여기며,
대의를 불관하고 군신사이 분수를 다 하지 않은 것은
군자의 행할 바가 아니다.
나의 들은 바에 의하면 야일재 같은 분을 어찌 대의를 지키고
군신사이의 분수를 다한 분이라고 이르겠는가.
공은 두 돌도 못되어 양친을 여의고 어렵게 자랐으나
스스로 학문에 뜻을 두어
14세에 대암 박성에게 궁리하는 말씀을 들어 배웠다.
한강(정구), 여헌 양선생의 문하에서
연원 있는 학문을 강구하고
무오년(광해11)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때마침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돌아와 도사 김시추와 함께 소를 올려,
이이첨을 참하라 하였다.
이이첨의 소에 영남 선비들이 상소를 올린다는 핑계로
난리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이에 패주 광해군에게 노여움을 받아 장차 군사를 보내어
주살하려 하였다.
사람들이 크게 놀라되 공은 조금도 굴하지 않더니
진사 최문한의 상소에 힘입어 구제가 되었다.
향인 중에 이이첨에 아부하여 급제한 자가
문 앞에 와서 뵙기를 청하거늘,
공이 거절하니 그 사람이 앙심을 품고 장차 모함하려 하되
조금도 동심하지 않았다.
사귀는 친구는 학사 김응조, 노연 심광수, 나제 신영도니
서로 도의를 강마하였다.
병자년에 청나라 오랑캐가 갑자기 침입하자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산성을 청군이 에워싸서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백형 매헌공이 창의하여 대장이 되고, 공은 참모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향하여 통곡하였다.
돌아와서 청량산 북쪽 보속동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서
스스로 대명일민(大明逸民)이라 칭하고,
그 이름을 야일재라 하여
채궐, 종국의 시율(詩律)이 있다. 산중에 살다가
12년 만에 졸 하시니 생년인 선조 신묘년으로부터 셈하여 58세다.
명하여 가로되,
산에는 개미가 있고 진펄에는 씀바귀가 있도다.
잠이 깨면 쉬는 한숨, 옛 서울 생각일 뿐
맹세코 잊을 수 없는 것은 석인(碩人)의 곧고 바름일세.
광산김씨사.
김자빈(自鑌, 27세)은 종사관으로 숙부
김덕란(德鸞, 26세)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광주(廣州)로 출전하였다.
중간에 접전이 벌어지자, 화살이 떨어져 포로가되었다.
굴복하지 않는고로 숙질이 화를 당하였다. 논산 충곡서원에 배향되어있다.
.28세 충의공 휘 득남(양간공파‧ 직제학공파)
1601년(선조35)-1637년(인조15) 조선 중기 문신이며 충신. 자는 선술.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의공.
아버지는 증 참판 억창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의성 김씨.
선원 김상용의 문인이었고 광해 13년(1620) 무과에 급제하였다.
인조 1년(1623) 선전관으로 인조반정으로 왕위가 바뀌어 질 때
창졸간에 어보(임금의 옥새와 옥보)를 분실하였는데,
공이 이를 찾아서 주정대신(主政大臣)에게 밀납(密納)하였다.
이듬해 이괄이 난을 일으킴으로 공주에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안현에서 적을 격파하여 그 공으로
초계 군수에 이어 백령진 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철곳첨사로서 세자를 강화도로 호종(호위하여 동행함)할 때
오랑캐가 사녀(士女)를 포로로 잡아가는데
그 참상을 보고 추격하니, 세자가 말, 갑옷을 주었다.
인조 15년 부평 계양 산하 굴포까지 진격하여 분전,
적 수 백 명을 베고 포로로 된 사녀들을 모두 되찾았다.
승세로 계속 추격하였으나 날은 어두웠고
말은 지쳐 남한산성을 향하여 달리다가
말이 넘어지고 기진맥진하여 역부족으로 장렬히 전사하셨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의 정려를 명받고 강화의 충렬사,
무안의 보충사 및 표충단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공이다.
광산김씨사
김동준(東準, 25세)는
광해조에 급제, 서궁에 유페된 인목대비를 홀로 찿아 뵈었다.
정묘호란 때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로 남하하였다.
뵹자호란 때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고, 척화를 상소하였다.
호란 후 관직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황명처사라 자처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호산서원에 배향,
김 설( 渫, 25세)은
인조때 무과급제, 병자호란 때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
화의가 성립되자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고창의 토성산 밑에 송죽을 심고, 정자를 지어 영취라하며 후학양성.
김남식(南式, 26세)은 신독재의 문인으로, 아버지 송와
김여성(汝聲, 25세)의 명을 받들어 고창에서,
김남철(南哲, 26세)과 같이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자가 수 백명에 이르렀다.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청주에서 오랑케 무리 90여명을 참하였다.
남한산성에 가려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져 귀향했다.
정읍의 계령산아래 옥산정사라는 강학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니,
수 백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조정에서 충신의 정려를 받고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화준(華준, 27세)은
병자호란 때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 충절로 벼루를 하사받았다.
김익제(益濟, 27세)도
어가를 호송하다가 전쟁이 멎자, 귀향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김성일(成一, 29세)은 인종조에 무과에 급제, 아우 사호
김성구(성구, 29세)와
같이 원수인 종놈 김이란자를 죽이고,
관가에 자수를 하니 인조 임금이 효행을 가상히여겨 특사하였다.
성일은 병자호란 때 군공을 세워 삭주부사에 제수되었다.
죽은후, 충신과 효자의 정려가 내려졌다. 담양 중암사에 배향되어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형제 복수전이라는 글도 전한다.
27세 통정대부 효자 이성(양간공파‧ 전리판서)
1653년(효종4)-1696년(숙종23)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성보, 호는 시은
아버지 증 참판 남식, 어머니 증 숙부인 고흥 류씨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며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친환에 자신으로 하여금 대신 아파 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주혈로 연명케 하고, 복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숙종 16년 기사사화 때 향리에 숨어 강학당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을 썼다.
순조조에 어사의 추천으로
정려를 명받았고, 좌승지에 추증되고,
정읍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시은 이성 행장
공의 휘는 이성이요, 자는 성보다.
공의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학문도 깊고 넓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효성으로 새벽에 안부를 살피고
밤에 이부자리를 펴드리며 겨울철에는 따뜻하게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해드려 부지런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장성하여 진지는 손수 직접 올리되,
반드시 맛을 본 뒤에야 올렸다.
철마다 새로 나온 먹을거리는 먼저 부모께 드려 봉양하였다.
채소 한 포기, 과실 한 개라도, 먼저 올리고서야 먹고,
올리지 않고서는 먼저 먹지 않았다.
밖에 나갈 적에는 알리고, 돌아오면 인사를 드려 한결같이
성인의 가르침대로 따랐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과거를 볼 때가 아니면,
멀리 나가 놀지도 않았고
오래도록 떠나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가에는 학문을 힘써
성의와 정심으로 공부를 독실하게 하였다.
광은도위 기성 찬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7월.
대구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