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의 연락책
“따르릉, 따르릉”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반가운 마을 형님의 이름이 떳다.
두어 달 전에 식사하며 뵙었는데 허약하셨는데 ‘이제 몸이 좀 몸이 좋아지셨나! 전화를 하셨네’ 하고 전화를 받으니 이름과는 다른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잘못 입력시켰나 하는데 침착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의 딸이라고 한다. 섬뜩한 감이 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새벽에 돌아다셨다”는 말을 했다. 놀랄 시간도 없이 내게 떨어진 부탁은 주변마을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전해 달라는 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연락책을 맡긴 했지만 이런 마지막 연락책까지 맏게 되었다. 맥이 빠지고 형님과의 추억들이 맴돌며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마을에서 언제든 찾아가면 반겨주며 챙겨주고 나눠주시던 형님이건만 그런 지기가 있다는 것이 늘 행복하다고 자랑을 했는데 이제는 볼 수가 없는 강을 건너 갔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시골에 들어와 산지 15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 마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어릴 때 물가에 자라서 호수가 있는 마을만을 찾다가 다니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었다. 호수를 낀 환경이 좋고 교통도 좋은 탓인지 외지인들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분들이 여럿이 있었다. 일찍이 도시생활을 접고 와서 모임을 만들어 형님 아우하며 우애를 다지고 있는 모임이었다. 나는 아침 걷기 운동을 하다가 회원중의 한분에 손에 이끌려 동참하였고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가장 어린 나이로 들어간 나는 다섯살 위부터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들은 수시로 좋은 음식이 있으면 불러서 서로 먹이고 나누고 하며 재미있게 보냈다. 맛난 음식도 먹으러 가고 모아놓은 경비가 좀 되면 여행도 가며 시골의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도록 힘을 불어 넣어주던 형님들이었다.
그 중에도 이곳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사셨던 분이 진달래 형님(집 주변에 유나히 진달래가 많음)인 오늘 연락을 받은 분이었다.
내가 뛰어다니며 하던 마을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자하고 힘을 실어 주었으며 나의 능력을 십분 믿고 응원해 주셨었다. 집에서 음식 대접하기를 좋아사셔서 많이도 갔었는데 이제 가셨다. 먼 나라로 올 수 없는 나라로 차원을 달리하며 가셨다.
우리 모임이름으로 사업을 하자고하면 제일먼저 손들고 나오셨다. 나이가 들었어도 품위를 잃지 않고 조용조용,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며 좋은 뜻에 힘을 실어주셔서 내가 무모하게 힘을 빼고 다닌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인정해주고 응원해주기에 힘을 받고 뛰어 다녔었다.
휴지를 줍자고 하면 솔선수범하였고 마을 이장님들을 모아 우리사업을 진척시켜보자고 할 때도
조용하면서도 품위 있게 마을분들 과 발전적인 의견을 내 놓으며 토론하였다. 언제고 찾아가도 반겨주는 마을에 친구이며 협력자였는데 이제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연락을 받고 내가 그 형님을 위해 마지막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아보다가 그간의 사진들을 찾아 ppt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진첩을 찾았다. 정말 형님의 미모는 아름다웠다. 정말 이 마을을 무척 사랑하셨는데 이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사셨기에 이곳 사진들을 찾아 넣고 형님 집이 진달래 만발한 사진에 우리모임이 활동했던 사진들을 찾아 나열을 했다. 새벽에 쓰레기 줍는다고 집게에 봉지들고 찍은 사진, 제주도 여행갔던 사진 , 강원도 바닷가에서 유쾌하게 모여 웃으며 찍은 것,홍신자 선생님 공연을 보러 예술에 전당에 가서 같이 찍은 아홉명의 사진등 찾아서 올리면서 계속 눈물이 솟아난다. 이런 형님을 이제는 볼 수가 없구나 생각하니 지인을 보내는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정말 실감이 났다. 모두 모아 나열을 하였다. 마무리를 짓고 형님을 마음에서 보내기 위해 한동안 우울 할 것이다. 핸드폰 연락처에 형님의 전화번호를 보며 글을 보내본다. 그 동안 함께 했기에 행복했습니다. 좋은 곳에서 양면하시고 계세요. 얼마지 않아 우리들도 따라 갈 것입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