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네 복숭아집>에 복숭아를 샀어요 그리고 생각난……
그날은 의림지에서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작은 형님이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힘들 것 같다며 또다시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했다.
중환자실을 엄마가 나온 지 십여 일이 지난 터이다.
내가 담당의사와 상담 시 모친께서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좋아지셔서 중환자실을 퇴원하고 일반병실로 옮기나, 또다시 중환자실로 오게 된다면 백 퍼센트 죽음이라고 했던 말이 뇌리에 번개처럼 와 꼽혔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엄마가 안동병원에서 구급차에 실려 봉화로 올 때 소생확률은 5퍼센트였다.
하지만 엄마는 의사들이 다 헛소리했다는 듯 일어 나셨다. 안동병원 중환자실에 계실 적이었다. 눈을 감고 의식은 하늘에 있는지 아직 땅을 밟고 있는지 몰랐을 때,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병마를 이겨내고 눈을 뜨시라고 이렇게 불효자식을 두고 떠나시지 말라 애원하며 엄마를 불렀다. 그러자 엄마는 나의 손을 불끈 쥐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주었다.
엄마! 병연이 선생님 되고 아림이 대학가는 거 보고 천천히 가시고 일어나세요.
그때 천당의 문턱에서 엄마는 또다시 이승을 다시 밟았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눈을 뜰 때 박수를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한데 또다시 중환자실이라니…….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유리창이 뿌옇게 되어 도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울면서 운전했더니 안경에 눈물이 튀었다. 안경에 눈물이 마르자 소금기가 뿌옇게 나타나 시야를 방해했다. 그날 난 눈물이 샘물처럼 펑펑 솟아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간 봉화 혜성병원은 커다란 장벽처럼 다가왔다.
공기 중 암흑을 걷어내면서 난 중환자실로 급하게 들어갔다. 엄마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앉아있었다. 양손에 주사바늘이 주렁주렁 달렸다. 뒤편 화면에는 연신 빨간불이 깜박이며 심박과 혈압, 혈중 산소농도를 나타내는 기계적인 수치가 압박하듯 깜박였다. 엄마를 보자마자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정말 엄마가 마지막처럼 느껴져 엄마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그런 막내가 안쓰러워 힘겹게 헐떡이며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어야 된다.”
콜록거리며 가래 끓는 소리가 나의 오장육부를 할퀸다.
“울지마래이 동구야 울지마라. 나이 많으면 아무짝에 쓸모없다. 빨리 죽어야 한다. 그게 행복한 거다. 아이구 이놈의 자슥 주야장창 궁디두둘기며 오냐오냐하고 키웠더니 뭐가 그리 서럽게 우노. 고만 뚝 그쳐라.”
난 온 갖 서글픔에 두 시간 정도를 울었다. 육남매 중에서 위로 누나 둘 그리고 내리 아들 셋을 낳았고 끝으로 딸 동순을 낳고 평생 고생만 하신 엄마다. 내가 아들이지만 엄마는 중학교 시절부터 빨래도 시키고 설거지도 시켰다. 위로 누나가 시집을 가고 형들은 봉화에서 자취하며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집에 작은 허드렛일은 할 사람이 딱히 없었다. 동순이는 너무 어렸고 그나마 내가 적당하여 아들이지만 여자아이처럼 부렸다.
위기를 넘겼다는 의사의 말에 형제들은 안도했다. 며칠 뒤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대형 마트를 찾았다. 엄마가 즐겨 먹는 귤을 사기 위해서였다. 난 늘 마트에서 습관대로 귤을 골랐다. 무르지 않고 탱탱한 것들만으로 골라 병실로 향했다.
“엄마, 귤 드세요. 제일 맛있는 것들만 골라왔어요.”
엄마는 한심하다는 듯 그리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얘기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귤을 사가라고 다시는 그러지 마래이…….”
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늘 깍쟁이로 살아왔다. 누군가를 만나도 내가 편한 시간을 내어 만났다. 무엇을 해도 늘 나를 기준으로 살아왔다. 난, 둔기로 머리를 강하게 맞은 느낌이었다.
며칠 전 민지네 복숭아집을 찾았다. 세명대에서 글 쓰다가 잠깐 들린 것이다. 민지네 엄마 친구 분도 계셨다. 덤으로 복숭아 맛을 보라면서 민지 엄마가 복숭아를 과도로 잘라 주었다. 그것을 고맙게 받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복숭아 한 개 먹을 시간도 안 되어 가게로 손님이 찾아왔다. 노년 중년 부부는 이리저리 살펴본다.
“맛은 있나요?”
할아버지가 취조하듯 물었고 민지네가 맛있다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맛을 보라면서 한편에 있던 복숭아를 깎아 드린다.
“이렇게 주는 건 맛있는데 집에 가서 먹으면 맛이 없더라고.”
옆에 있던 우리도 웃었다.
“할아버지 맛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거들었다.
십여 년도 지났지만 엄마가 살아계실 때 자두농사를 많이 지었었다. 자두는 수확기에 비가 내리면 밋밋하여 시쳇말로 오이보다 더 못하다. 어느 해 수확기에 비가 며칠간 내린 적이 있었다. 자두를 좋아하는 나도 도저히 손길이 안 갔다. 그냥 물맛 밖에 나질 않았던 것이다. 비가 그치자 엄마는 내게 독촉을 했다. 떨어진 자두는 그냥 두고 나무에 달린 것은 공판장에 갖다 주자고 했다. 그날 엄마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미식가가 마치 결선에서 요리 맛을 보는 것처럼 심각하게 자두를 들고 맛을 보셨다.
“음, 이 정도면 달고 맛있다.”
땡볕에서 고생한 당신과 아들의 땀을 생각하여 맛을 봤을 것이다. 그까짓 삼일 간 비가 내렸다곤 하나 자두가 이정도면 맛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때 그 자두는 나로선 도저히 못 먹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살면서 과일 하나를 사도 세심히 살핀다. 마치 상품판정관처럼 말이다. 감자를 하나 사도 너무 크다 빼고 너무 작다고 치운다. 나의 이런 깍쟁이 마음은 아마 쉽사리 없어지질 않을 것이다. 세상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고 난, 무엇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서 뺏고 또 빼앗기지 않을 생각으로 살아 갈 것이다. 사회봉사를 해도 무턱대고 오케이 하지 않는다. 언제 이 마음은 조금이라도 느슨해질까. 무엇이 이토록 나를 쫓아오고 불안케 하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늘 깍쟁이고 선하지 않다.
비가 내린다. 눅눅하게 습기 찬 방은 슬슬 장마가 지겹다. 달리고 싶다. 비가 오니 더 달리고 싶다.
첫댓글 고공스님 뵌지가 오래네요^^
언제 시간나면 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