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세상을 하직한 지가 오늘(2.23)로 벌써 16년이 되었습니다.
살아 있으면 44살. 스물여덟 꿈 많던 대학생 시절에 막내는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가며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랐지만 흰 천을 걷어 올리는 순간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멍하니 선 채 울음도 안 나왔습니다. 아니 얼굴을 쓰다듬으며 “얘, 집에 가야지 왜 여기 누워 있어?”하는 드라마속의 한 구절도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속으로 간절히 기도 했 것만 기어이 내 아들이라니....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필수야, 필수야”만 입속으로 웅얼거렸습니다.
막내는 1998년 2월 23일 아침, 불의의 사고로 “엄마, 아파..”한마디 소리도 못 내고 그렇게 갔습니다. 전날 막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 밤을 뒤척이다가 아침 연세대 통계학과 과장이라는 분으로부터 막내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서대문 연세병원(개인종합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후였습니다. 애비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부정(父情)은 이 병원에서 막내의 시신을 모교인 연세대학교부속병원에 안치하는 절차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과장선생님에게 항의했습니다. “왜 제가 다니던 대학교의 부속병원이 있는데 여기다 안치하였느냐?”는 울음 섞인 항의와 함께 당장 제 모교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앰브란스에 의해 연세대병원 장례예식장으로 옮겨졌고 사흘간의 안치를 끝내고 같은 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 안치소를 떠나 벽제 화장장으로 향했습니다.
아들을 영구차에 싣고 화장장으로 향하는 애비의 마음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공황상태였습니다. 아내는 아예 영구차가 떠날 때 딸과 함께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 엄청난 충격을 견뎌내기에는 마음이 너무 여려 자칫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아들과 친구들, 그리고 막내아들의 과 친구들의 슬픔 속에 화장을 마친 막내는 한 줌 가루가 되어 나무상자 안에 갇힌 채 승용차 두 대에 실려 제 형의 품에 안겨서 할아버지가 누워계시는 예산 효자리의 선산에 바람과 함께 뿌려졌습니다. 나는 차마 아들이 외로운 산속에 뿌려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선산에 아예 가지를 안했습니다. 막내를 좋아하던 같은 과 여학생의 손에 의해 한 줌 재로 뿌려졌으니 저 세상에서라도 여한은 없을까 하고 슬픈 마음을 달랬습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나던 날은 마침 제가 다니던 연세대학의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4학년이던 막내는 졸업장 대신에 하늘나라로 가는 천국행 티켓을 받은 것입니다. 오호 통제라, 이런 슬픔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전날 회계사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책가방을 메고 나간 막내가 졸업식 아침에 이 세상과 하직하는 이 기막힌 슬픔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막내가 화장장으로 향하던 날은 마침 김대중대통령이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2월 25일이었으니 이런 기구한 운명을 신은 왜 우리 가정에 내리시는가? 안타깝고 서럽습니다.
막내는 참으로 잘 생겼습니다. 탈렌트 같이 생겨서 주위에서 MBC 탈렌트시험에 한번 응모해 보라고 농담도 꽤나 들었던 아이입니다. 그 어렵다는 연세대 상대를 들어갔을 때 나는 주위로부터 꽤나 복 받은 사람이라는 소리와 함께 축하도 많이 받았습니다. 큰 아들은 서울대 공대, 딸은 이화여대, 막내는 연세대 상대......세칭 명문대에 삼남매가 합격하여 4학년 2학년 1학년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고 친척과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하였고 우리 내외는 세상을 혼자 얻은 듯이 어깨가 으쓱하였습니다. 비록 어렵게 살아도 삼남매를 공부시키면서 가진 자부심은 늘 운전대를 잡은 내 손을 가볍게 했습니다. 그 즐거웠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집안을 침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오늘 제삿날 큰 아들 내외가 다녀갔고 딸애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막내아들 얘기는 입에도 올리지 않고 그냥 커피만 마시고 갔습니다. 침묵 말고는 나눌 대화가 없었습니다. 막내 얘기를 꺼내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아예 입을 봉해 버렸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앞산이 뿌옇게 보이지만 자식이 죽으면 아예 산이 보이지 않는 다는 말이 있는데 아내의 오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할수록 아내는 가여워 보이고 막내는 보고습니다.
큰 며늘애를 보면서 막내가 살았다면 아래로 동서가 있어 둘이서 사이좋게 지낼 텐 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그 놈이 결혼을 했다면 애들 둘은 두었을 테니 며느리와 함께 네 식구가 더 있어 모두 합하여 우리 식구가 최소한 열 네 식구는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막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 하루였습니다. 막내에게는 여자 친구도 있었습니다. 막내의 유골을 직접 잔디에 뿌리기도 했고 49제에도 다녀가 막내가 살았다면 내 며느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늘 막내아들 여자 친구를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렸습니다.
우리 내외는 막내를 잊지 않기 위해 15년을 매년 제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해주자고 호소했고 나도 제사나마 안 지내준다면 막내가 얼마나 서운해 할까 하는 마음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 왔습니다. 세상에 아들이 부모 제사를 지내지, 부모가 아들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나 말고 누가 또 있을까요? 그래도 일 년에 한번 제 집에 찾아와서 제 어미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 한그릇을 먹고 갈 것만 같아 15년을 제사를 지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제 어미 애비 가슴에 상처를 더 키우는 듯싶고 특히 아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15년으로 제사를 마무리 하고 금년에는 제사를 접자고 달래 가까스로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너무 오래 이승에 붙잡아 두면 영혼이나마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아내 친구들이 말하곤 했답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무도 막내 얘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들 내외가 사온 딸기만 침묵 속에서 먹으면서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 따라 막내 아이가 이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이런 마음의 고통은 없었을 텐데..
나는 매년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갈 때면 아내가 준비해준 과일 몇 개와 막내가 좋아하던 소주 한 병을 들고 꽃다발 하나를 가슴에 안은 채 막내 묘를 찾았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들 형제 납골당을 만들면서 한자리를 나누어 막내 집을 하나 마련해 주었습니다. 덩그마니 혼자서 빈 납골당을 지키는 막내가 얼마나 쓸쓸할지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래도 영혼이나마 풍천노숙은 면했으니 춥다고는 안 하겠지..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애비가 곧 찾아갈 테니.....
진달래가 피었다
참았던 그 속말을 이제야 쏟았는가
저 꽃잎 흐드러져 봄 산이 뭉클하다
예쯤서 귀 기울이면 옛사랑도 울 것 같다
바람이 흩고 지난 묘비명 언저리에
끊어진 인연 줄이 슬며시 당겨지고
그제야 알았다는 듯 봄비가 흩뿌린다
부르면 돌아오는 메아리가 너였으면
깃을 터는 산새 두엇 숲속으로 스며들자
먼 산이 움찔거린다, 반갑다는 인사인양
그렇다. 봄에 부모님 산소에 가면 산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산새소리도 노래로 아들의 영혼을 달래줍니다. 나는 사과 하나, 담배 한대, 소주 한잔, 그렇게 차려놓고 “필수야~”하고 허공을 향해 손나발을 불어봅니다. 메아리가 “네~하고 대답합니다. 너구나, 너였구나, 사랑하는 막내야...
신문이나 테레비에서 젊은이의 죽음을 보도할 때마다 참 안됐다 생각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슬픔을 당할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하였습니까? 우리 보다 먼저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막내도 CPA에 합격하여 어느 대 기업에 다니며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여 손주 둘쯤은 안겨 주었을 텐데..,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막내의 얼굴이 어른거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제 자식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만 정말로 막내는 생각할수록 먼저 간 것이 아깝습니다. 나이며, 학력이며, 피아노 솜씨며, 영어며 어느 하나 버릴게 없습니다. 카튜사로 제대하고 복학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미국 이모네를 거처로 하여 어학연수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씨애틀 어느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피아노로 은파를 쳤더니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교수가 옆자리에 앉아서 곡이 끝날 때까지 떠날 줄 모르다가 연주가 끝나자 ‘very good’를 연발하며 박수를 치더라는 일화를 들려주던 막내였습니다.
막내는 음악을 참으로 좋아 했습니다. 피아노를 유치원에서 잠시 가르쳤는데 어찌나 음악에 소질이 있던지 커서도 배우지 않은 명곡을 그렇게도 잘 쳤습니다. 집에 동서에게서 산 마란츠 앰프와 듀알 턴테이블 그리고 AR이라는 스피커가 세트로 갖춰진 음향기기가 있습니다. 평소에 막내는 레코드판을 사 모으면서 공부하는 때때로 혼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감상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컴퓨터 옆에 놓여있는 오디오를 보면 헤드폰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추는 막내가 내 곁에 앉아있는 듯 눈에 아른거립니다. 차라리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 피아노를 전공시켰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하고 뒤늦은 후회도 해보았습니다.
큰 아들이 결혼 하면서 저를 달라고 했지만 막내 생각에 그것만은 안 된다고 손사래쳤습니다. 그동안 고장이 나서 오늘 마란츠 수리센터에 수리 가능 여부를 물어 봤다. 음향기기를 고쳐서 막내가 생각날 때마다 들어야겠다고 새삼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제는 제사도 끝냈으니 음악을 들으며 막내를 생각하고 음악을 통해서 막내의 체취를 느끼고 싶습니다.
마음이 무척이나 우울하고 심란합니다. 잠도 오지 않아 막내를 생각하며 정말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을 이 글로 전하고 싶다, 막내야....이 애비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다. 너를 만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싶다. 내생에 만나거든 밀렸던 얘기를 실컷 나누면서 부자간의 정을 뜨겁게 나누어 보자.
막내야 잘 가거라. 그리고 사랑했고 그 사랑이 변함이 없을 것임을 약속하니 부디 눈물일랑 부모 가슴에 내려놓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언젠가 이 애비도 죽어서 다시 만나겠지만 죽기 전에도 한 시도 잊지 않으마. 내 하늘에 오르는 날 이 아빠가 좋아하는 ‘에리자를 위하여’를 한번 들려주지 않을래? 2014년 2월 23일 네 제사를 마지막으로 지내고 아버지가 쓰다.(2014.2.23.)
오늘이 막내가 우리 곁을 떠난지 19년이 되는 날입니다. 살아 있으면 47살입니다. 물끄러미 아들이 그리 사랑했던 오디오를 쳐다 보니 눈물이 지꾸 납니다. 천상에서라도 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새벽 2시에 자고 6시쯤 잃어났는데 어제밤은 12시에 자고 아침 8시까지 잤습니다. 정말로 오랫만에 푹 잤습니다. 막내가 효도의 수면제를 보냈난 봅니다. 자꾸 눈물이 납니다.
너는 나의 영원한 맞수 연대생...아카라라칭 아카라카초 아카라카칭칭 아라카라초초 대 연세 야! (2017.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