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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묵상글 들 ( 연중 21주 수요일-행복 착각, 착각 행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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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1주 수요일-행복 착각, 착각 행복
제 생각에 진짜 불행은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거나 더 나아가 행복한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불행을 키워왔음을 알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세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호의호식에 떵떵거리던 권력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불행한 줄 모르고 살면 불행합니다.
저는 불행한 줄 모르고 행복한 줄 아는, 이런 행복을
<행복 착각> 또는 <착각 행복>이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인생이 이런 착각을 하며 삽니다.
이런 착각이라도 없으면 살기가 힘드니까 착각을 하는 것이요,
불행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행복을 살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불행은 불행일지라도 소박한 불행일 것입니다.
속으며 살고 속아서 산다는 사람에게는 인생이란 어차피
이런 소박한 행복과 불행을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불행에 대해서는
오늘 바리사이들에게처럼 그렇게 거창한 불행선언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만일 그러신다면 소 잡는 칼로 파리 잡으시겠다는 식이 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불행선언을 하시는 것은 소박한 불행이 아니라
남을 불행에 빠트리고 예언자를 죽이는 어마어마한 죄악의 불행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이 죽였던 예언자들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며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착각을 하지만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인데
사실 옛 예언자가 아니라 지금의 예언자,
그것도 나에게 예언을 퍼부어대는 예언자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하느님의 사람인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하느님 계명을 잘 따른다면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언자는 하느님 계명을 어기는 자들,
특히 종교 사회 지도자들에게 파견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잘못을 꼬집으니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야 즉시 그것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회개하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개뼉다귀처럼 여기는 예언자들이 하는 개소리라고 여기지요.
사실 우리 삶에도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면 예언자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언자처럼 거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눈에 그야말로 개뼉다귀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예언자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고,
그런 사람을 고마워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개뼉다귀같은 사람이 하는 쓴 소리가 개소리가 아닌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 곧 예언이 될 것입니다.
저도 머리로는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 예언을 받아들이기는 하고,
적어도 예언자를 죽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고마워하는 데까지 아직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리사이들을 보면 이런 점을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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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연중 2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칠한 무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정화가 필요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29,13). 하였고, 주님께서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소중한 것은 알맹이입니다. 부정함을 피해가라고 무덤에 회칠을 하였으니 ‘회칠한 무덤’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회칠한 무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남을 부정하고 더럽다고 비난하지 말고 자신의 속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정화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자비를 청하게 되고, 인정하지 못하면 내 안의 부정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회칠한 무덤’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다. 자비를 청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위선을 내려놓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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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회칠한 무덤 ♣
‘위선’은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죄인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직 교리 지식이 부족한 초보 신앙인들을
죄짓게 만들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선은 ‘큰 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대단히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마태 18,6).>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위선자인 경우,
교리 지식이 부족한 초보 신앙인들은 그 위선자의 행실을 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 알고 그대로 따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위선자인 경우, 그의 위선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고
변질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복음을, 즉 거짓 복음을 전해 주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 라고
지시하셨는데(마태 10,9-10), 그 지시에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또는 복음이 물질에 대한 걱정이나 욕심 등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선교사는(사도는) ‘기쁜 소식’만 가지고 가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만
전해 주는데, 생활비나 활동비 명목으로 돈을 욕심내는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기쁨은 하나도 없고 욕심만 가득 들어 있는 나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무덤에 접촉하면 7일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율법입니다(민수 19,16).
유대인들은 과월절이 가까워지면 무덤에 하얗게 회칠을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접촉했다가 부정하게 되어서
과월절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얗게 회칠한 무덤들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고 꾸짖으신 것은,
그들이 겉만 아름답고 속은 시체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처럼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들로(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해서 남을 죄짓게 만드는 위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을, “무덤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겉만 아름답게 꾸민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회칠한 벽’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3)”
여기서 ‘회칠한 벽’은 ‘회칠한 무덤의 벽’이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회칠한 무덤’처럼 ‘위선자’ 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
그래서 율법 실천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인데,
속으로는(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율법을 잘 지키고 안 볼 때에는 안 지키는 자들,
또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일에 관해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하고,
안 보이는 일에 관해서는 안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이고, ‘회칠한 무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이천 년 전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위선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복음화’는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복음화하기는커녕 신앙인 자신이 세속화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회칠한 무덤’으로 전락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표준’이고 ‘모범’이기 때문에, ‘신앙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자기 혼자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짓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인’이라는 말을 ‘교회’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9-32).”
이 말씀은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너희 조상들과 다르지 않다.”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살해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는 것은,
그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존경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척 하면서,
같은 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은 박해하고 살해합니다.
따라서 무덤을 만들고 묘를 꾸미는 일은 모두 위선입니다.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혈통으로도 살인자들의 자손이지만,
하는 짓이나 정신이나 사고방식으로도 살인자들의 자손이다.”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라는 말씀은,
“조상들의 죄를 완성하여라.”, 즉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해서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한 죄를 완성하라는 뜻입니다.
죄가 완성되면(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본래 뜻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고 싶다면
조상들과 같은 죄를 지어라.”, 즉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지 않기를
원한다면 조상들과 같은 죄는 짓지 마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또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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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새벽을 열며.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빠다킹신부님.
많은 커플이 자신과 정반대의 타입에 반하고 끌려서 연애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바로 그 다름 때문에 괴로움을 맛볼 가능성이 거의 99%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혼 사유의 대부분은 성격 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신 어떤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이 자매님은 지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책이 싫었고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적이고 책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영원한 반쪽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운명적인 만남에 감사하며 결혼했지만, 함께 살아보니 지적이고 책 좋아하는 모습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것만 같고,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고집 센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점 때문에 결혼했지만, 그 다른 점 때문에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다른 점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랑은 같은 점에서 찾는 것이 아닐까요? 같은 점을 찾아가면서 다른 점 역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다른 점만 찾았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그 다른 점만 찾다 보니 정작 봐야 할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특히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주님과 다른 점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함’으로는 그들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기도했고, 툭하면 머리에 재를 뿌리고 오랫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남들보다도 더 많은 봉헌을 하는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의 세부조항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열심함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정작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고, 예수님의 사랑에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전혀 자신의 행실을 고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점을 찾고 비판하고 단죄하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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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깨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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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추천서입니다.
교회가 문턱이 높으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접근불허의 금역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박정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에누리 모르는 무자비라고 여긴다.
교회가 앵무새처럼 정의만 외쳐대면, 사람들은 하느님을 위선자 꼰대라고 치부한다.
믿는 이가 속절없이 착하면, 사람들은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네”하고 경탄한다.
믿는 이가 먹구름 날씨에도 노상 해맑으면, 사람들은 “뭔가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있는 모양이야” 한다.
믿는 이가 원수 같은 존재를 조건 없이 용서하면, 사람들은 거룩한 두려움에 “나도 한 번 믿어볼까?” 마음이 흔들린다.
고 차동엽 신부님의 유고시집에 있는 글입니다.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새로 이사와도 아무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아서, 구역장님께 인사라도 하려고 전화번호를 사무실에 물어서 걸었더니 잘못된 번호였답니다. 교무금 책정에 관해 물으니, 사무장님은 자유롭게 내라면서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교무금은 공납금으로 교구로 들어가고, 건축금은 전액 본당 수입이니까 교무금 대신 건축금으로 내세요.”
이렇게 관심도 없고, 대신 꼼수만 피우는 교회 같아서 나가기 싫다고 하시네요.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주님께서 어떤 모습을 더 좋아하실지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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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연중 제21주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27-32: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선이 아니다. 죽은 뼈들과 같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의로움이며, 전혀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다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이 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을 욕하는 척하면서 그들은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예언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살해를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책망하신다. 그러나 그들의 기질은 의도를 숨기려 해도, 아무리 가장을 해도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고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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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한상우 신부님. 너희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 28)
가을은 그냥
오지 않음을
깨닫게됩니다.
헷갈리는
요즈음 우리들
세상입니다.
코로나 19가
소중한 일상을
송두리채 집어
삼키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지쳐있는
우리모두를 위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회칠한 무덤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의 위선입니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위선을 버리고
가짜를 벗고
이제는
우리의 불법을
바로잡을
때입니다.
위선과 불법은
일순간에 우리의
소중한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사람 사는 곳에
필요한 것은
정직과 질서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깊은
의미를 다시 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선과 불법으로
짓눌려있는
잃어버린 우리의
의미를 다시 찾는
참된 사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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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는 저마다 나름의 경험과 지식을 통하여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지닌 이 개념이 과연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곧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지인들이나 다양한 언론 매체 또는 그동안 읽어 온 책들일 터인데,
그것들 가운데 무엇을 어디에서 배우고 얻었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경험이 모두 다르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기준과 개념을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스스로는 얼마나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이겠습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음이 가난하고, 슬픔에 젖어 있지만 온유하며 자비로운 이들은 물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면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리고 평화를 이루려 노력하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산상 설교(마태 5―7장)로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 설교(마태 23―25장)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 불행 선언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보이고자 영성을 잘못 이용하고 신심을 권력으로 여기는, 예수님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 불행 선언이 지난날의 사람들에게만 유효하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곧 악의 경향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우리이기에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우리 양심을 성찰하라는 경고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데리고 온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오늘 복음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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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연중 제21주간 수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과 혼배 면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알아도 혼인 당사자들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편지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메일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젊은이들은 진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게 해 주곤 합니다. 저는 당사자들의 편지를 요약해서 강론 때 전해 주기도 합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론 신앙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도록 당부합니다. 둘이 마주 보려하지 말고, 같은 곳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마주 보면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화복한 가정, 충실한 신앙생활을 바라본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도전들을 극복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실함입니다. 아내에게 성실한 남편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자신의 삶에 성실하기를 당부합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기를 이야기합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실함은 많은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나태함은 많은 장점들을 빛바래게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제는 성실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할 때 정말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합니다. 일주일의 노동시간도 그렇고, 휴가를 보내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이민 가서 한국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대게는 편의점과 세탁소의 일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야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힘든 일을 정말 열심히 해서, 처음에는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집도 장만하고, 나름대로 삶의 기반을 잡습니다.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봉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에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있기에 거리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 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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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연중 제21주간 수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無知의 죄 - 회개 은총이 답이다 -
요즘 복음은 마태복음 23장,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일곱 차례 불행을 선언하시는 내용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 서두의 행복선언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처럼 똑같은 사람이 행복선언의 대상도 될 수 있고, 불행선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오늘은 불행선언의 마지막 여섯째, 일곱 째부분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한다.”
한마디로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무지의 죄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대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아닙니까? 이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지식은 탁월했을지 몰라도 자기를 아는 지혜와 겸손은 완전히 수준 미달임을 봅니다.
완전히 자기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위선적 삶을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악순환의 무지의 죄를 끊어버리는 회개 은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면서 비로소 무지로부터 벗어나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한 사람,
겸손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회개야 말로 참 귀한 은총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자 하느님과 나를 알아가는 앎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의 핵심은 회개를 통한 참나의 실현에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부정적 모습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예전 어느 수도형제의 말을 들으며 웃은 일이 있지만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책임자 신부님을 통해서 저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여 그와 반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변의 모두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가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2테살로니카서 말씀은 게으름에 대한 경고입니다.
질서와 근면에 관한 훈계입니다. 진실과 겸손은 이론이나 추상이 아닙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의 일을 하며 제대로 한결같이 살아갈 때 저절로 진실하고 겸손한 인품의
형성입니다. 하여 기도와 공부와 노동이 균형잡힌 기본에 충실한 질서있는 삶을 강조하는 분도회 정주서원의
삶입니다. 무질서한 삶보다 영적 삶에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무질서한 삶으로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와 공부와 노동이 균형잡힌 평범한 일과표에 충실함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영적 삶의
처방인지 깨닫습니다. 하여 제가 자주 피정자들이나 상담차 오는 분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일과표의 궤도 따라 사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떠났던 마음도 돌아오고 내적 안정과 평화, 질서도 이뤄집니다.
그러니 하루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매일 미사의 은총이 참으로 좋습니다.
매일 미사는 못드리더라도 매일 미사책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깊이 묵상하면서 그날의 영적 양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좋은 영적 습관이 저절로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날로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저절로 치유되는 내외적 분열의 치유입니다.
바로 위선자들의 치명적 영적 질병은 내적 일치가 아닌 내적 분열에 있음을 봅니다.
안과 밖이 다르니 내적 평화와 안정은 요원합니다.
바로 이런 내적일치의 삶의 모범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일행입니다.
복음의 위선자로 질타받는 율사와 바리사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은 물론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 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진정 이런 질서있는 삶이 내적일치의 진실하고 건강한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분발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앞서 복음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과는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침 어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풀과의 전쟁’중 제 집무실 주변에서 예초 작업의 육체노동에 전념하던
수도형제에게 보낸 칭찬의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예초刈草 솜씨가 일취월장日就月將 놀랍고 멋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지의 죄가,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의 죄가 만악의 근원이요 불행의 뿌리가 됩니다.
답은 하나 부단한 회개 은총뿐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내적 일치가 깊어지면서 무지에서 벗어나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참나의 실현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면서 이렇게 전인적, 통합적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테살3,16.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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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의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7.29)
복음 안에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예외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완전성이지요.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무하는 것은 잘못 자체를 드러내어 수치를 주고 공격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된 길을 돌이켜 참된 모습을 회복하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 너희도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 속은"(마태 23,27-28)
예수님은 그들이 겉으로도 속으로도 의인이고 아름답길 바라십니다. 유다 백성의 종교 지도자로서 이미 겉으로는 충분히 그럴듯한 신분과 자격을 갖추었으니 속도 그렇게 가꾸라고 강력히 촉구하시는 것이지요. 여태까지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면 이제라도 돌아서서 진정 거룩하고 충실한 섬김의 길을 가면 되니까요.
하느님이야말로 겉과 속이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우리 나약한 인간에게서 보이는 위선이나 모순, 불일치가 없습니다. 그분은 마음에 품으시는 지향과 의지가 말씀으로, 그 말씀이 실행으로 완성되는 분이시지요. 인간을 향한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일관된 아버지 사랑의 완성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양식을 지시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2테살 3,7)
사도는 "무질서"라는 말을 반복해 사용하며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사도들은 복음 선포와 더불어 손수 일해 양식을 구하면서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생활 양식을 시작하는 신도들이 사도들을 본받아 삶을 질서 있게 영위하도록 도우려는 목적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2테살 3,116)
"평화"란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만, 한 인격체 안에서 보면 '존재 전체가 전반적으로 일관성과 질서를 획득하여 안정되고 동요가 없는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겉과 속이 하나이며 동일하신 하느님께서 그 자체로 평화이심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사도 바오로는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 평화를 내려 주시길 기원합니다. 개개인 안에 육적인 필요와 영적인 지향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에게 모범과 유익이 되는 평화를 의미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의 그럴듯하게 꾸며진 "겉"과 혼동으로 삐걱대는 "속"을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분께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요. 아직 정화되지 못한 욕망과 이기심, 어두움과 죄스러움까지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우리를 부르셔서 사랑을 쏟아 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이 모든 불결함과 위선의 무질서에서 벗어나 당신처럼 겉과 속이 하나인 아름답고 의로운 모상이 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여덟 번에 걸쳐 불행을 외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에 귀를 기울입니다. '진정 그대들이 겉과 속이 하나인 참된 신앙인이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묻어나지요. 불행 선언과 대조되는 진복 선언을 기억하며 마음으로도 사랑하고 손끝으로도 사랑하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존재 전체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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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23,28)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이 질책 앞에서,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저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절대적 이유는 완전하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우리의 여정이 완전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가는 여정, 곧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이런 우리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완전함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지금 여기'를 '간과'(看過)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가 천국이 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난한 이들이 기뻐하고, 잡혀간 이들이 해방을 맛보고, 눈먼 이들이 다시 보고, 억압 받는 이들에게 해방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루카4,18 참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해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그리고 너와 함께,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함께 지금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이 부족합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위선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세리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고, 되돌아 온 작은 아들처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b)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오늘도 나의 연약함과 나의 위선을 하느님의 자비 앞에 내어드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다시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1테살3,1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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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테살로니카 3,6-10.16-18
마태오 23,27-32
절대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의 유형, 회칠한 무덤!
사제에게까지 돈을 꾸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사제에게까지 돈을 꾸어야 할까요?
그래서 여력이 되면 다 꾸어주려고 합니다.
저는 차를 사려고 모으던 돈, 책을 찍으려고 모아놓은 돈 등을 모두 꾸어주었습니다.
이런 돈밖에 없다고 할 때 그 꾸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 꼭 갚겠다는 약조를 합니다.
그리고는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분들의 특징이 있다면 자기 확신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돈을 빌릴 때는 눈에서 빛이 나고 언제까지 갚을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사라집니다.
이런 분들이 처음부터 사제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돈으로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상황이 힘들어 갚기가 어려운 걸겁니다.
그래서 저도 돈을 꾸어줄 때는 받지 못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꾸어줍니다.
다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돈을 꾸어야 하는 목적이 있을 때는 자신 안에 갚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눌러놓기 위해 더욱 자신의 말을 확신으로 치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군인이었는데 지하실에서 못된 일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옷장과 책상은 지나칠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속이 썩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겉이 지나치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무엇이든 좀 지나쳐 보이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믿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상징적으로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십니다.
속은 시체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 겉에는 더 희게 칠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회칠한 무덤의 법칙을 아는 이들 눈에는 속이 썩어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어서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결혼과 같은 것일 때는 정말 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가 “자기, 나 믿지?”라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절대 믿으면 안 됩니다.
회칠한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람이 사람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습니까?”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줘야 사기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리며, “언제까지는 기필코 갚겠습니다.”라고 확언을 한 사람 중에
얼마나 그 기일 안에 갚았나요?
그렇게 모든 게 확실한 사람이 왜 돈을 꾸어야 하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기필코, 기어이, 꼭’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더욱 믿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결혼해서 사시는 분들은 지금의 결혼 삶이 이럴 것이라고 아셨나요?
만약 알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나없이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렇게 확신한 사람들 순으로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생일 때 어떤 신학생이
“난 빨개 벗겨서 여자들이랑 한 방에 들여놔도 끝까지 정결을 지킬 자신이 있어.”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 사람 안에는 정결하지 못하다는 양심의 비난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회칠을 하는 것입니다.
속이 검은 사람은 그 검은 것을 감추기 위해 겉은 더 밝은색으로 칠합니다.
이것이 사람들 앞에서 하는 자기 확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며 확언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들 속에서 그들이 자신을 모르는 회칠한 무덤과 같음을 보십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조상들보다 더한 더러움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확신 속에서 그들의 교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려다가 벌레가 기어 다니는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얻게 된 것은 사람은 착각하는 동물이기에 자기를 믿지 않게 되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우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자기에 대한 착각만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나를 신뢰할수록 주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한 이들의 것입니다.
주님만을 믿으려면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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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테살로니카 3,6-10.16-18
마태오 23,27-32
이 시대 위선자들
한없이 자비하시고 끝없이 인내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시지만 마냥 좋으신 분, 속없이 마음 좋으신 분만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사랑의 경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들, 그 좋은 산상수훈을 듣고도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은
무척이나 준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낸 대표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러 부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엘리트 집단의 사람들이었으며 나름 하느님과 신앙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대 유다 백성들 가운데 잘 나가던 주류층 사람들, 지도급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의외였습니다.
그리스도 심판의 번갯불은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집 위에 떨어졌습니다.
하느님 그리고 율법과 가장 가까이 있던 것처럼 보이던 그들은 하느님, 그리고 구원으로부터 가장 멀리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멀리 있던 사람들이 가장 하느님과 구원에 가까이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분 구원과 생명의 말씀을 수용할지 말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각자가 선택한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신 동시에 심판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복음은 평화롭고 고요하지만은 않습니다.
수용과 응답에 대한 강한 요구와 함께 우리에게 던져지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하늘 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영혼의 의사여야 하는데 영혼들을 악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반대로 그분의 훼방꾼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이 생각을 받쳐주지 못할 때, 강론이 생활을 뒷받침하지 못할 때, 말과 행동이 유리될 때 준엄한 예수님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나를 돌아봅니다.
신심 없는 신앙,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
구체성 없는 결심, 본질과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는 아둔함, 공연한 선민의식...
나 자신에게 요청되는 의무나 요구들에는 불성실하면서 이웃들의 어깨에 무거운 십자가를 올려놓은 위선과 이중성, 허례허식...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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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이영근 신부님.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마태 23, 27-32(연중 21주 수)
오늘 <복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계속입니다. 곧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불행선언’에서 그들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위선” 입니다.
마치 “선”인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선’은 악보다 더 추악합니다.
사실, ‘종교적 위선’이란 단순히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 곧 선한 행위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겉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미사나 전례나 성사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렇습니다.
‘위선’(ùποκρισισ)은 그 행동과 마음 속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만, 이와 같은 마음과 입술 혹은 행동 사이의 차이는 나아가서,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고,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을 올가미에 씌우려 하기도 합니다(예레 18,18).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마태 22,18) 말입니다.
나아가서, ‘위선’은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하느님의 명을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이용하며,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려던 허위를 자기 자신이 진실로서 생각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고’(루카 18,9;20,20),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ùποκριτησ) 자기의 배역을 계속하면서 결국 그들은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고, 그들의 가르침은 ‘나쁜 누룩’(루카 12,1)에 불과하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 먼 이들’이라고 부르십니다(마태 23,25-26).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애쓰면서 자신을 속이게 되며 자신의 모습에 눈을 감고 빛을 볼 수 없게 되어 오히려 빛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선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째 불행선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기고 맙니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해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러운 속을 감추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하느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게 하소서!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31)
주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깁니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으려 앙탈이지만,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냅니다.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소서!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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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6. 연중 제 21 주간 수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 먹지도 마라. 와 의인이 아니라 위선과 불법인 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자신들이 무질서하지도 아무에게서 양시을 거저 얻으려 하지 않았으며, 폐를 끼치지 않았고 수고와 고생으로 밤낮으로 일했다. 고 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겉은 아름다워 보이나 속은 죽은 이들이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난 이들과의 대화, 일, 사건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생활, 허물과 그릇됨.. 복음적 생활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나의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은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 2테살 3,6-10.16-18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하낟.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마태 23,27-32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바오로 사도와 일행들은 전도할 때, 올곧은 마음으로 그것을 행했습니다. 아무에게서 거저 양식을 얻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수고와 고생으로 밤낮으로 일을 하며 전도하였습니다. 이런 모범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흠이나 해가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거짓을 꾸짖습니다. 겉은 율법의 말씀과 신심으로, 그 실천으로 사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행실을 거짓과 더러운 것으로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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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6일 수요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_김홍주 베드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njMmRur7O9A (26:36)
•2020. 8. 26.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0년 8월 26일 수요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Wednesday of the Twenty-first Week in Ordinary Time
김홍주 베드로 신부 (서울대교구 동성고등학교 지도신부) 집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7-32
***** 신부님 강론 08 : 25 – 12 : 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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