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야기 몇가지 돌아본다.
그래서 방송에 바둑 이야기를 여러번 하고 있다.
죽림칠현 가운데 한사람인 위(魏) 나라 완적(阮籍)은
친구랑 바둑 두는데 모친 별세 소식을 듣는다.
친구는 어서 집으로 가라. 헌데 완적은 끝까지 바둑을 둔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술을 마구 마시고 피를 토해낸다.
장례기간 중 완적은 또 술을 마시고 소리치며 피를 토해낸다.
그렇다면 그가 모친 별세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가지 않았던 건 뭘까?
빈소에서 동이술 마신건 무슨 심사인가?
그리고 피를 토하며 '이걸로 끝이다' 했던 말은 무슨 말일까?
완적에게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 불효자이다.
하지만 그가 더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피를 토하며 드러낸 건
인간적이다. 해서 완적은 '예법이 나 같은 사람 지키라 생겼겠느냐?'
태어나길 구속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던 자유인이라 이해가는 소리다.
그렇다고 나도 완적처럼 못할까? 그건 완적 한사람으로 족하다.
장례 후 탄핵의 목소리가 높았다. '완적은 모친 별세 소식 듣고도 바둑뒀다.'
'빈소에서 동이술을 마셨다' '상주노릇 제대로 못하고 차별대접했다'
차별대접 한건 맞다. 완적을 위로 하러 왔던 유명인사 중에
꼴도 보기 싫은 인사는 허연 백안시로 봤고. 죽림칠현 혜강 같은
사람은 술이랑 거문고 들고 빈소로 오자 퍼런 안광을 빛내며 '청안시'로
반겼으니 말이다. 완적을 옥에 넣어라. 여론이 비등하자 사마소가
완적을 만났다고 한다. 꼴을 보니 뼈만 남아 죽을 거 같이 생겼고.
돌아와 말하기를 '장례 때 술과 고기 먹은게 무슨 죄인가?'
사람 알아봤다는 소리다. 다시 완적이 모친 별세 소식 듣고도
바둑을 둔 손길을 본다. 그리고 진정 그가 한세상 놀아 보고자 했던
인생 바둑을 넘겨다 본다. 누군들 해방된 인생 꿈꾸지 않았으랴
산다는 건 바둑 한판도 마음대로 둘 수 없는 세상 아니던가?
오늘 방송에선 '고운 최치원과 안동 청량산' 일화를 '고전 사랑방'에 써봤다.
안동 청량산은 퇴계 이황이 즐겨 걷던 올레길 '예던길'도 있다.
농암 종택도 그대로 남아서 하룻밤 이현보의 '어부가' 소리 들으며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이름처럼 맑은 기운이 넘친다는 청량산. 그곳에 가면
통일신라를 대표했던 인물 고운 최치원이 바둑 두던 전설도 있다.
최치원이 바둑 고수였을까?
그 시대로 치면 최치원은 신라의 알파고라 할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를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치원의 바둑은 세상을 깊이 관조하면서 두었던
구름바둑이었다고 해두는게 낫겠다.
그 자신이 외로운 구름처럼 왔다 갔으니 청량산 풍혈 기판에서 둔 게
구름바둑 아니고 무슨 바둑이랴.
판은 움직이지 않는데 바둑돌 두는 사람 심사는 천지를 휘젖는다.
헌데 최치원의 바둑판은 천지간 구름으로 흘러 돌며 세상 어느구석에
무슨 돌을 놔야 사람이 살지를 봤더란 소리다.
그 청량산 바둑 이야기 오늘 오후 2시부터 국악방송 '상암골 상사디야'
<고전 사랑방>에서 방송된다. 원고는 나중에 올려볼까싶다.
바둑판 앞에만 앉지 말고 최치원 처럼 구름으로 둥둥 세상을 굽어보며
사람 살곳에다 맥점 한번 통쾌하게 내려 칠 그런 구름바둑을
안동 청량산 가면 구경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야지 우리 산천
둘러볼 곳이 이리도 많은데 어찌 해외 사진자랑이나 하고 있을손가?
우리땅 부르는 소리 들으면서도 서생은 이리 책 갈피 앞에 나이들어 있다.
첫댓글 세상사람들 관점에서는 완적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보인 범상치 않은 행동들이 만행으로 보였겠죠.
더구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완전 패륜아로 낙인이 찍힐 테구요.
그렇긴 하지만 냉정한 의미로 모친이 생사의 기로에서
그를 찾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싶습니다.
아마도 바둑알을 던지고 달려갔을지도 모르죠.
이미, 타계하셨다면 달려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해결해야 될 문제를 마저 매듭짓고 다음
상황에 대처해야 겠다는 생각이었을지.....
그 속이야 완적 자신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어쨌거나 그가 모친상때 보인 행동들에 대해
세간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네요.
유명 바둑일화 가운데 하나를 들려주셨는데
어느 시대나 세속적인 걸 거부하거나 통치 시스템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살고 싶은 세상을 꿈꾸며
찾은 곳이 겨우 대나무숲 일곱사람들. 멋도 알고 풍류도 있지만
사람끼리 정한 예법 도덕적 규범이 싫었던 사람들이었죠.
뿐만 아니라 가진 것들끼리 힘센 놈들끼리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사는
그런 부류에 섞이고 싶지도 않았구요.
지금 세상도 강대국이 정한 룰에 끝없이 저항하며
스스로 몸을 던져 산화 시키는 사람들 보세요. 그들은 나의 신념에
마음껏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물으며 몸을 부숴 저항하지요.
추구하는 가치나 정신은 다르지만 저항은 동일한 원동력이죠.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저항
@김병준 어떤 깃발을 드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죽림칠현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이 시대의 부조리와 썩은 냄새에 저항한 측면은 공감합니다.
또는 세속적인 도전이나 야망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 날마다 소풍다니듯 사는
그런 초연함도 선망합니다. 그들 때문에 부끄러워 했던 권력자나 부자들이 있었구요.
하지만 결정적 선택에 문제가 있죠. 그리 피를 토하고 미친 사람 처럼 죽을 고생하느니
사회적 약속과 슬픔을 조절하는 시간차 규칙이란 상례에 따랐더라면 일정기간 편했을 수도 있었으니깐요.
그렇다고 사람 행위를 강압하는 제도와 규칙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또 아니랍니다.
사람 살 곳에 두는 통쾌한 맥점 하나!
요즘 자신의 출세 영달만을 위해 달리는
정치가들이 바둑판 앞에 앉아서 곰곰,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최치원의 바둑판 바위가 있었다는 안동 청량산을 사진으로 구경갔더랬죠.
우리강산 이러다 몇군데나 찾아볼꼬 걱정이네요.
알파고의 구름바둑 같았던 최치원의 바둑. 그 시대 사람이 알았다면
그를 그처럼 고독한 구름으로 둥둥 떠 흘러가게 하진 않았겠지요.
시대의 맥점. 살자는 사람 앞길을 트는 길을 여는 그런 바둑 고수가
우리시대 정치판에 몇이나 있는걸까 눈을 씻고 또 씻고 내일도 씻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