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리현상은 많다.
유역(流域) 개념이 그 중 하나다.
'한강유역'이라는 용어는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처음 등장한다.
용어는 사용하되 정의를 해주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나름대로 짐작한다.
"한강유역이란 한강 일대 혹은 한강 부근을 말하는 거다" 하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유역변경식 발전소라는 것이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책에 싣고 시험에 낸다.
다음은 중학교 1학년짜리 이람이가 학교에서 치렀던 사회시험 문제다.
문제 :
다음 왼쪽 그림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가. 지역의 지형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가. 지역에 건설될 수 있는 발전소를 바르게 설명한 것은?
답 :
경사가 큰 쪽으로 물길을 바꾸어 전기를 일으키는 유역변경식 발전소이다.
그 내용은 물론 교과서에 설명되어 있다.
강릉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는 태백산맥 서쪽의 완경사면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에 댐을 쌓아
저장한 물을 터널을 통해 동해쪽의 급경사면으로 보내어 발전하는 발전소이다.
유역이 뭔가.
산줄기에 의해 온전히 둘러싸인 강의 세력권이다.
유역변경이란 뭔가.
이쪽 강의 물을 저쪽 강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역변경식 발전소는 뭔가.
유역변경의 결과 생기는 낙차를 이용한 발전소다.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볼까?
유역은 담장에 의해 온전히 둘러싸인 아파트단지다.
유역변경이란 이웃 아파트단지에 선물을 보내는 일이다.
유역변경식 발전소는 그 선물을 담장 위에서 떨어뜨려 전달하는 일이다.
유역변경에서 중요한 사실은 '담장에서 떨어뜨린다'는 방법론이 아니라,
'담장 너머 이웃에게 선물을 보낸다'는 원칙론이다.
그런데 교과서는 '경사의 차이'를 유역변경의 근본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방법과 원칙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유역 자체를 정의할 수 없는 산맥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저수지에 가둔 물은 크게 두 군데에서 이용할 수 있다.
같은 유역에서 이용하려면 그냥 내려받으면 된다(대부분 이런 형태다).
그러나 다른 유역에서 얻어쓰자면, 그러니까 유역변경을 하자면 반드시 터널을 뚫어야 한다.
왜냐하면 유역은 산줄기에 의해 온전히 갇혀있는 것이며,
물은 그 유역 내에서만 중력의 법칙에 따라 흐르는 것이므로 그렇다.
유역변경의 키워드는 그래서 터널이다.
그 터널은 반드시 대간 아니면 정맥에만 존재한다.
지맥에 터널을 뚫을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지맥은 유역 내에 존재하는 것이며, 유역 내에서는 물을 내려받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에 산맥이 끼어들 처지도 못된다.
그런 산맥을 붙들고 유역변경을 설명하자니 느닷없는 경사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나마 완전한 설명은 못된다.
까닭은 이렇다.
물이 떨어지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보내져야 한다.
그 경우의 낙차는 그러나 '경사의 완급'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물을 주고 받는 두 지역의 '표고차'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주는 곳이 고도만 높다면 경사가 급해도 상관 없고(교과서의 해설과 반대다!),
받는 곳이 고도만 낮다면 경사가 완만해도 상관 없다.
그러니까 교과서는 유역변경을 설명한 게 아니라 발전소를 설명한 것이다.
그것도 고도차로 설명해야 할 것을 경사의 차이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물을 받는 지역의 경사도는 오직, 받은 물을 이용해 발전을 할 것인가, 그냥 마시는 물로 쓸 것인가에 관계될 뿐이다.
우리나라에 유역변경식 댐이 태백산맥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기존에 주입된 태백산맥에 대한 지식, 다시 말해
'서쪽이 완만하고 동쪽이 급하다'는 사실만을 이용해 유역변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태백산맥의 설명이지, 유역변경의 원리가 아니다.
이제 경사가 태백산맥 같지 않은, 나머지 유역변경식 댐들은 다 어찌 설명할 것인가.
예컨대 운암호의 섬진강물은 동진강유역에서 농업용수로 쓰이고 있고,
(건립 초기에는 낙차를 이용한 발전을 했으나(칠보발전소), 지금은 채산성이 없어 농업용수로만 쓴다.)
주암호의 보상강물은 광주에서 식수로 쓰고 있다.
그것들도 경사의 완급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유역변경식 댐은 태백산맥의 것 하나만 알고 말라는 것인가.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지 말자.
과학은 원리가 중요하다.
'사슴가죽에 가로 왈자' 식의 땜질 교육으로 얻은 지식은 공허하다.
그런 모래성 쌓기 교육이 제5공화국 최대의 사기극이었던 '평화의 댐' 공갈을 먹혀들어가게 했다.
기억하시겠지만 당시의 대통령 전두환이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 호들갑 떨며 외쳤던 소리는 이러했다.
86년 10월 북한이 한강 상류에 금강산발전소를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측이 추정한 금강산댐의 규모는 높이 200미터, 저수용량 200억톤이다.
만약 북한이 수공(水攻) 목적으로 댐을 일시에 폭파한다면 63빌딩의 절반이 물에 잠길 것이고,
수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평화의 댐을 건설할 것이다.
평화의 댐은 북한의 수공으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뿐 아니라,
역공(逆攻)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즉, 금강산댐이 파괴되어 홍수가 밀려오다 우리측 대응댐에 갇히게 될 경우 물길이
북측으로 넘어가도록 설계하였다.
그 물은 북한 지역 130㎢를 침수시킬 것이다.
그 소리를 받아 당시의 신문들은 "섬뜩한 흉계... 정성모아 물리친다" 제하의 기사로 날마다 지면을 도배했고,
코흘리개의 돼지저금통까지 오지게도 훑어갔다.
이제 그 늑대사건은 금강산댐의 규모를 실제보다 3배~8배 정도 과장했던 사기극이었다는 게 밝혀지긴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늑대다!" 소리친 사람도 그렇지만 그 말 믿은 국민들도 부끄럽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하지 말자.
언론들은 금강산댐의 규모야 군사비밀이었으므로 불러준 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지 말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었던 군사비밀상의 수치가 아니라,
평화의 댐 설계계획 자체가 갖고있는 모순이다.
유역 개념만 알고 있었더라면, 애초부터 말도 꺼내지 못했을 모순이 발표문 안에 들어있다.
우리는 당시 "역공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발표에 주목했어야 했다.
역공(逆攻)이라는 것은 유역변경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유역변경을 터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설마 평화의 댐에서 북한땅까지 땅굴을 파겠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역변경이 가능한 또 하나의 경우는 댐의 높이가 그것을 둘러싼 산의 높이보다 높은 경우다.
즉 역류인 셈인데, 상상이 안되는 일이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역류를 통해 역공을 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평화의 댐 높이가 북측 한북정맥의 가장 낮은 재(峙)보다 높을 것.
둘째, 그 재는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이에 있을 것.
셋째, 우리측에 그보다 낮은 재가 없을 것.
넷째, 북한측이 역공에 필요한 충분한 물을 내려보낼 것.
소설 같은 얘기다.
왜냐하면 북측이 물을 안 내려보내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행여 수공(水攻)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당연히 북측은 가장 낮은 재에 담장을 쌓은 후 내려보낼 것이다.
그 일은 능선 위 몇 미터만 담을 쌓아 올리면 되므로 간단하다.
그렇게 되면 물은 이제 우리측 낮은 재를 통해 넘나든다.
역공이 불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그것이다.
어쨌거나 평화의 댐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쌓는 것이라니까 그렇다 치자.
그래도 만에 하나 북측이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내려보냈다면?
물은 최소의 법칙을 따른다.
둘러싼 가장 낮은 곳을 통해 넘쳐 흐를 뿐, 원하는 높이까지 차오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말은 우리가 원하는 높이만큼
ㅡ봇물 터지듯 북측으로 쏟아질 만큼ㅡ
물을 가둬 일시에 북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평화의 댐을 하늘까지 쌓더라도 북측의 가장 낮은 지형보다 더 높이 물을 저장할 수는 없다!
졸졸 흐르는 물도 물이니까 역공은 가능하겠다고?
그래, 모든 소설이 현실화하여 북한 지역 130㎢가 침수되었다고 치자
(굉장한 것 같지만 강화도의 절반도 안되는 면적이다).
그렇게 북한을 침수시킨 그 물은 다 어디로 가나?
한강 하류도 우리땅이요, 임진강 하류도 우리땅이다.
하나의 수역 안의 물은 어디로 빼돌려도 결국 강 하구로 되돌아오고 만다.
하류지역이 상류지역을 향해 물로 공격하겠다는 발상은,
아파트 아래층 사람이 욕조 가득 물을 채워 위층으로 퍼붓겠다는 공갈과 다를 바 없다.
그 물이 위층에 다소 피해를 줄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아래층인 우리집으로 다시 흘러내려오게 되어있다.
위층 아이들이 쿵쿵거려 다소 시끄럽더라도,
현명한 가장이라면 모름지기 수공(水攻)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터다.
사실 지리학에서 유역만큼 명확하고 쉬운 개념은 없다.
애초부터 산경을 배웠더라면 맨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이 유역 개념이다.
아무려나 지질구조보다야 백 번 쉽다.
유역을 알았다면 유역변경은 가르칠 것도, 배울 것도 없는 현상이다.
그랬더라면, 온 백성이 유역을 깨우치고 있었더라면,
전대통령께서는 평화의 댐 말고 휴전선 부근에 평화의 빌딩을 짓자고 했을지도 모를 터인데.
북한이 우리측에 돌팔매질 하거든 그 돌을 모아 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되던져 혼내주자고 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여기까지 쓰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려는 참인데,
이람이가 다시 예상문제집을 들고와 자문을 구했다.(그림37 참조)
문제 :
다음 그림은 우리나라 수력발전소 분포도이다.
그림에서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유역변경식 발전소를 건설한 것과 관계 깊은 산맥은?
답은 '함경산맥'이다.
나는 물론 북한에 있는 그 발전소의 이름도 모르고, 거기에 발전소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그저 '유역변경은 대간과 정맥에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백두대간과 비슷한 선인 함경산맥을 '때려잡은'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푸는 것이 진짜 실력이다.
언제 어떤 형태로 출제되어도 알아맞힐 수 있다.
그런데 이람이는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푸나.
무조건 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었더니, "북한지도에서 유역변경 문제가 나오면 개마고원 근처가 답이에요"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점수를 어디에 쓸까.
어쨌거나 이람이는 유역변경식 발전소 시험문제에 답을 썼고, 동그라미를 맞았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니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