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 독서집] “왜 안되겠어요?”
어슐러 르 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일 년 전 이맘때 SF 판타지 작가 어슐러 르 귄의 산문집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읽었다. 책장을 덮을 즈음 원고 청탁을 받았다. 오래 생각도 않고 “네, 쓰지요.”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독서 칼럼을 연재하는 일 같은 건 이제 정말 그만퉈야지 했는데, 갑작스런 변심은 순전히 르. 귄의 책 때문이었다.
맘에 드는 책을 읽으면 가슴이 뛰고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이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읽었을 때 내가 바로 그랬다. 르 귄은 독자적인 환상 세계를 구축한 ‘어스시 시리지’, ‘헤인 우주 시리즈’로 유명한데, 그런 방대한 작품을 쓰는 와중에도 서평을 꾸준히 썼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경이로운 생산력은 나를 주눅 들게 함과 동시에 자극했다. 열심히 써야지.
나를 더 자극한 건 그가 쓴 문장이었다. 책에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쓴 강연 원고와 연설문, 에세이와 수십 편의 서평이 실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일흔에서 여든 사이에 쓴 글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고 통쾌했다. 흔히 이런 문장엔 ‘젊다’는 수식어가 붙지만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왜냐면 그의 재치와 유머, 통쾌한 신랄함은 70년을 넘게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과정 없는 통찰과 여유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만큼 오래, 이만큼 열심히 살았으면 이 정도 얘기는 할 수 있지, 하는 마땅한 자신감이 행간에 속속들이 스민 글. 그런 글을 읽자 나도 쓰고 싶어졌다.
읽는 사람은 줄고 자기를 읽어달라는 사람만 들어나는 시대에 독서 칼럼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회의했는데,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라는 문장에 안심했다. 듣도 보도 못한 책에 대한 그의 서평을 읽으면서, 책에 기대지 않고도 오롯이 존재하는 서평이 가능함을 보았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아주 큰 꿈이었지만, 불가능한 꿈처럼 사람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달뜬 내게 마지막 쐐기를 박은 문장이 있었다.
(여성운동을 통해) 저는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에게는 없는 온전한 경험의 영역이 있고, 그런 글이 쓸 가치가 있고 읽을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찾아 제대로 읽었어요. 그 뒤로는 페미니스트들이 우리에게 준 모든 책, 다른 여자들이 수백 년 동안 써온 책들을 읽었지요. 여자들이 여자처럼 글을 쓸 수 있고, 남자와는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왜 안 되겠어요?”
그래, 왜 안 되겠어? 설령 잘 안 된다 해도 언제나처럼 자괴와 모욕을 감내하면 그뿐이고 거기서 배우면 그만이지. 나는 ‘여여한 독서’를 시작했다. 지금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당찬 마음으로.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팽팽하게 부풀었던 가슴은 한 편의 원고를 쓸 때마다 바람이 빠져 납작해졌다. 어슐러 르 귄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대거리하고 말하겠다는 처음의 다짐은 어디 갔을까? 초심을 찾아 다시 어슐러 르 귄을 펼쳤다. 이번엔 그가 여든이 넘어서 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로.
이 책은 블로그에 쓴 글을 모은 것인데 첫 페이지부터 웃음이 난다. 2010년 10월 여든 살에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를 밝히면서, 처음엔 블로그란 말도 싫었다고, “콧구멍을 가로막은 장애물 이름”같다고 한 걸 보고 한참 키득거렸다. 기발하면서도 정확하고 유머러스한 비유를 보는 즐거움이야말로 글을 읽는 재미다. 르 귄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선배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블로그를 보고, “오! 나도 이렇게 해볼까?”하고 블로그를 시작했단다. 주제 사라마구의 블로그는 못 봤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같은 그의 소설로 미루어 “계시”라는 르 귄의 평가가 과장이 아닐 건 분명했다. 역시나 대단한 사라막! 르 귄은 그에게서 “자유로움”을 빌렸다는데,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두 대가의 자유로움을 몽땅 빌리고 싶다.
자유의 시작은 유머다. 르 귄의 유머는 세월과 함께 더 농익어서 읽자마자 웃음이 터져나온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선의를 가득 담아 내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하하하!
유머만이 아니다. 신랄한 현실 비판은 더 신랄해졌다.
“나는 어떻게 경제학자들이 성장을 끊임없이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지려 한다. 성장이란 그럴싸한 비유의 일종이다. 아기라면 어른의 몸지만큼 성장할 것이고 이후엔 성장이 안정감 유지와 항상성, 균형 잡기로 바뀐다. 아기의 몸집이 끝없이 커진다면 머지않아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모든 경제적 성장은 부자들만의 이익으로 남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
이게 너무 길다면 아주 짧은 문장도 있다.
“어른이 되는 것보다 어른 탓을 하는 편이 훨씬 쉬운 법이다.”
르 귄의 문장을 읽다 보니 촌철살인은 노녀의 문장이란 생각이 든다. 긴 세월을 살면서 겪은 배반과 수치, 의심, 분노와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를 그리는 사람이 가지는 회한 어린 희망이 바로 촌철살인의 짧은 문장을 낳은 건 아닐까.
매일 아침 눈뜨는 게 두려운 날들이 있다. 텅 빈 백지를 마주하는 공포의 시간도 있다. 그러나 산다. 삶이 언젠가 내게 촌철살인의 문장을 선물할 것이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끝내 서로를 믿고 살아내기만 한다면, 선물 같은 문장이 햇살처럼 쏟아지는 날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