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사랑과 연민의 투사와 확산
이 태 수<시인>
ⅰ) 원용수 시인은 삶과 세상을 성찰省察하는 시선과 가슴이 따뜻하고 그윽하다. 사랑과 연민憐憫을 키워드로 가장 가까운 부모나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하찮은 사물들에까지 이 같은 내면(마음)을 투사投射하고 확산한다. 한결같은 이 투사와 베풂은 시인과의 수직관계나 수평관계, 멀고 가까움에도 아랑곳없이 그 경계마저 허물어 버리는 양상으로 진전된다.
더구나 물 흐르듯이 유연하고 원숙하며 진솔眞率한 언어들이 그런 미덕美德들을 푸근하게 감싸 안고 있어 내용과 형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가 하면, 상호상승하는 시너지효과를 빚고 있기도 하다. 이같이 시인과 시가 부드럽게 융화되어 그 일체감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시인의 변함없는 진정성이 언제, 어디서나 관류貫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ⅱ) 시인의 가슴은 너그럽고 훈훈하다. 그 바탕에는 어김없이 내리사랑이 자라잡고 있으며, 그 사랑의 훈기를 불러들이고 가슴에 녹여 자신의 사랑과 연민憐憫으로 되살려 발산한다. 내리사랑의 본보기는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며, 그 두터운 그늘이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는 사랑의 화신化身 같으며, ‘뒷면 없는 거울’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머니가 남긴 거울은 변함없는 내리사랑의 상징으로, 자기희생을 감내하는 모성母性과 그 사랑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뒷면 없는 어머니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감기 다 나았제?
옷 따시게 입고 다니거라
맑고 따뜻한 눈이
엄마를 봅니다
엄마는 나를 봅니다
어머님이 보고 싶으면
어머니가 남긴 거울을 봅니다
엄마는 여전히 늙지 않았는데
나는 자꾸 늙어갑니다
—「면경」 전문
어머니의 유품遺品인 거울(면경面鏡)을 매개로 모성을 반추하는 이 시에서는 ‘어머니의 거울=어머니’라는 등식을 만들면서 세월의 흐름에도 한결같은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고 그리워한다. ‘어머니가 남긴 거울’이 곧 ‘뒷면 없는 어머니’이자 ‘나를 비추는 거울’이며, 그 ‘나를 비추는 거울’이 ‘어머니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로도 그려져 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의 ‘엄마’의 눈과 같이 ‘나’의 눈도 “맑고 따뜻”해지며, 그 ‘엄마’를 보고 싶으면 그런 눈으로 거울(엄마)을 보지만 그 시절의 ‘엄마(거울)’는 “여전히 늙지 않았는데 / 나는 자꾸 늙어”간다는 아쉬움에도 젖는다. 늙어가는 ‘나’가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엄마’로 부르며 그때의 사랑을 “감기 다 나았제? / 옷 따시게 입고 다니거라”라고 표현하면서 시적詩的 묘미를 강화해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이 같은 그리움과 연민은 자신의 몸이 약해져도 “막내 튼실하게 키우려고 / 일곱 살까지 젖 먹였던”(「숭늉」) 기억과 그 사랑 때문에 “일흔이 넘은 아들이 / 젖 대신 마시는 숭늉”으로는 “마시고 마셔도 /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같은 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고기반찬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만 드신다
가족에게 단백질을 먹이려는 어머님 배려로
밥식혜는 가족 모두 먹는다
붉고 비리지 않다
구수하고 들큼하다
어머니 맛이 난다
돌아가신지 갑년이 지났어도
어머니 맛은 그대로다
—「밥식혜」 전문
가부장제家父長制사회에서의 어머니의 사랑(배려)을 떠올리는 이 시는 그 살뜰한 지혜를 예찬하고 기리는데 주어져 있다. 세월이 흘러서 먹는 밥식혜도 어머니가 만들어 줄 때와 같이 여전히 붉고 비리지 않으며 구수하고 들큼한 단백질 음식으로 “어머니 맛”이라고 여기고 있을 뿐 아니라 어머니가 세상 떠난 지 예순 해가 지나도 “어머니 맛은 그대로”라며 어머니를 흠모한다. 이 흠모는 연민과 무관하지 않으며, 타인을 향해서도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시 「못난이 사과」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오롯이 전이轉移돼 있다. 영천 재래시장 난전에서 “못난이 사과 한 접”을 펼쳐놓고 파는 할머니가 시인의 눈에는 “어머니 같은 할머니” 같아 보인다. 그래서 눈길 주는 사람마저 없는 그 사과들을 흥정도 하지 않고 몽땅 사게 되며, 그 할머니도 시인(화자)에게 “아들 같다며 웃으신다”니 은연중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일는지도 모른다.
아뿔싸! 집에 오니
빛깔 좋은 사과 한 상자 아내가 사 두었다
옛날 후포장에서
해묵은 감자 못 팔아 고생하시던
어머니 생각에 사 왔으니
두 말 말라는 당부에
못난이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가
엄마같이 웃는다
오늘은 운 좋은 날인가 보다
어머니 같은 분을 두 번이나 만나서
—「못난이 사과」 부분
시인은 오랜 옛날 시장에서 감자가 제대로 팔리지 않아 고전하던 어머니가 떠올라 ‘못난이 사과 한 접’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빛깔 좋은 사과 한 상자’를 이미 사 놓았다. 난전에서 산 사과와는 품질이 대조적이겠지만 아내가 “엄마같이 웃는다”니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심경이 어떠한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그 ‘못난이 사과’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웃는 아내를 ‘엄마’같다고 느끼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난전 할버니와 함께 “어머니 같은 두 분을 두 번 만나서” 운 좋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자리가 그윽하다.
이 시집의 표재시이기도 한 「무지개 여행」은 대구 근교의 산과 강을 배경으로 떴다가 사라지는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환상幻想에 실어 부각시킨다. 금호강과 초례봉을 잇는 무지개 속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복차림으로 되레 ‘나’를 보고 싶어 강을 밟고 걸어온다고도 그린다.
초례봉에 걸린 무지개 속 한복차림 노부부
금호강 밞고 걸어오신다
자세히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다
너 보고 싶어 왔다고
산소에도 안 오고 요즘 어디 아프냐고
오늘 보니, 지팡이 짚어야겠다, 하신다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린 무지개 그림
안방 벽에 붙여두었던 그 그림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그린 그 무지개 올라타고
저승 가셔도 여행 다니신다니
그 흔한 제주도 여행도 못 보내 드린 게
후회로 남아 가슴이 뭉클
글썽이는 내 눈물에도 살포시 내려앉으시는 두 분
좋아하시던 고향 무정 노랫가락
일곱 마디 곡 다 끝나기도 전에
굽은 등 편 무지개는 훌쩍 사라지고
물어볼 말이 아직 많은 나
비 그친 오늘도
금호강둑 서성인다
—「무지개 여행」
이 시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산소에도 안 오고 어디 아프냐고 / 오늘 보니, 지팡이 짚어야겠다, 하신다”는 구절이 말해 주듯, 운신이 힘들 정도로 나이가 들어 다소 무심해진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 지극한 사랑에도 효도를 잘하지 못한 회한悔恨으로 글썽이는 눈물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지개를 올라타고 내려앉는 모습으로 그리게 했을 것이다.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화자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려 안방 벽에 붙여 두었던 무지개 그림을 올라타고 저승으로 갔으며, 여전히 그 무지개를 타고 여행 다닌다고 상상하는 마음은 그야말로 애틋하다. 이쯤 되면 두 분이 좋아하던 노래를 채 다 부르기 전에 무지개를 타고 떠나 무지개 뜨던 강둑을 서성이게 하는 건 당연지사이기도 하다.
부모와 같이 조모祖母의 자비 역시 두터운 그늘을 드리워 준다. 시인은 겨울 저녁에 언 못 위를 거닐며 가끔 비명을 지르는 거위가 얼마나 물이 그리울까를 우려하며 연민을 보내는 「수성못 거위」에서는 할머니가 언젠가 했던 “머지않아 얼었던 연못이 녹을 거다”라는 말을 배치한다. 역시 내리사랑의 훈기를 불러들이고 가슴에 녹여 발산하는 경우에 다름 아니다. 그 다음의 묘사는 더욱 곡진하고 미묘한 여운餘韻을 안겨 준다.
훈훈한 할머니 말에
추위 깃든 겨드랑이 접는다
언 물 위에 비친 산 그림자도
거위의 노란 부리에
조금씩 뜯기고 있다
—「수성못 거위」 부분
ⅲ) 시인의 마음자리는 언제나 따뜻하게 열려 있다. 평소 마주치는 사물들을 지나쳐보지 않고 그런 내면(마음)을 투사해 바라본다. 시인의 말대로 ‘사는 맛’은 “쓴맛, 매운맛, 단맛 / 한통속인 게 / 우리네 사는 맛”(「사는 맛」)이지만, 그 사는 맛은 어떻게 변용하고 승화시켜 다스리느냐에 따라 적잖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시인은 그 이치理致를
제 몸이 더워야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듯
먼 길 걸어온 봄바람이
일찍 잠 깬 나비 등에 올라탄다
—「손난로」 부분
고, 봄바람을 끌어들여 환가喚起해 보인다. 아파트 마당에 만발한 매화梅花가 “선생님, 손길 따뜻해요 / 선생님은 옛 모습 그대로예요 / 매화가 가슴에 안겨온다”며, “우리 이야기 더 나누자 / 매화야, 며칠 더 머물러다오”(「매화 사랑」)라고 따뜻한 마음을 내비친다. 봄바람도 ‘선생님’(화자)도 따뜻하기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는 봄바람뿐 아니라 매화를 반기는 화자의 손길(또는 마음)도 변함없이 따뜻하기 때문에, 매화가 만발하는 걸까. 상대적으로 매화가 더 피어 있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도 이 시의 표제가 말해 주둣 ‘매화 사랑’ 때문인 것 같다. 다음의 시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우산을 그녀에게 기울인다
그녀와 함께 움켜진 손이 따뜻해진다
<중략>
우산 속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나는 흠씬 젖어도 좋다
어깨와 어깨는 밀착
우산 천정 두드리는 비의 연주에
이대로가 좋다! 이대로가 좋다!
—「낮꿈」 부분
이 시에 그려지듯, 가까워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는 그 이상이다. 설령 낮에 꾸는 꿈속에서라도 빗길의 우산 속에서 마주잡은 손이나 밀착된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는 비에 젖어도 좋고,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마저 좋을 수밖에도 없지 않겠는가.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리워하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족 사이에 교차하는 온기는 어떠할까.
맨 아래 가지엔 마주보는 내외
그 윗가지에 화가인 맏딸
그 윗가지에 평론가인 둘째딸
맨 윗가지에 과학자인 막내아들
구름이 비를 몰고 와도
회오리바람에 휘감겨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내일을 짊어진 일꾼들 끄덕없다
밑동이 튼튼하게 받쳐주니
땡볕 나라 풀밭 세상에게
그늘 나누어주기에 바쁘다
—「가족나무」 부분
나무에 빗대어 대견스러운 가족관계를 그리고 있는 이 시에는 화자 내외가 밑동에서 마주보며 받쳐주는 자녀들이 서로 밀고 당겨 주는 유대감紐帶感이 공고해 내일을 짊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같은 가족이지만 두 딸은 화가와 평론가이며, 아들은 과학자로 “땡볕 나라 풀밭 세상”에 그늘을 나누어 주기 바쁠 것이라는 믿음도 충만해 있다. 시인의 내리사랑은 이같이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의 사랑과 깊이 연계돼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시인에게는 수직적인 내리사랑뿐 아니라 수평적인 사랑도 거의 같은 빛깔을 띠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너그러운 아내를 어머니 같다고 묘사한 바도 있지만, 아내를 향한 마음은 다음의 시에 한결 곡진曲盡하게 떠올라 있다.
손이 발을 씻긴다
회혼 날이라
아내를 의자에 앉히고
나는 그 앞에서
난생 처음 남의 발 씻긴다
육십여 년
여섯 식구 돌보느라
장마당 누비느라
좁고 예쁘던 발
껄끄러운 마당발 되었구나
철없이 굴던 지난날 참회로
갈라터진 발 문지르는데
도리어 내 손이 말갛게 씻겼다
결국, 발이 손을 씻겼다
—「부메랑」 전문
회혼回婚을 맞아 육십여 년 가까이 가족을 뒷바라지해온 아내에 대한 심경을 낮고 겸허한 자성으로 떠올려 보이는 이 시는 아내에 대한 은근하지만 공고한 사랑의 깊이를 떠올려 보이는 경우다. 육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의 발을 씻긴다고 하지만, 기실은 그간의 마음이 함축된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읽히게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철없이 굴던 지난날 참회”로 거칠어진 아내의 발을 씻기는 자신의 손이 말갛게 씻긴다는 표현은 지극히 겸허한 사랑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시인의 이 같은 마음자리는 외부로도 거의 가감加減 없이 확산된다. “미세먼지 자욱한 아침”에 “용두토성 다람쥐 배고프겠다”며 “나는 공기청정기라도 있지만 / 마스크도 없는 다람쥐는 어쩌나”(「자라는 걱정들」)라고 걱정하며, 땡볕을 받으며 높은 가지에 탈듯이 매달려 있는 감을 쳐다보면서는 “조금만 더 낮은 가지에 매달렸다면 / 고깔이라도 씌워줄 텐데 / 가장 높은 가지 끝 차지하고 앉은 / 네 운명이 위태롭구나”(「상석의 운명」)라고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각별히 안타까워한다.
시인이 투사하는 따뜻한 마음은 소쩍새 울음소리를 “첫날밤 솥 작다 / 소박맞아 운다”거나 “솥작솥작 소박데기도 / 아기 하나 갖고 싶다고 / 저리도 운다”(「소쩍새」)고 듣게 하는가 하면, “유리에 비친 새가 / 자기인 줄도 모르는 콩새는 / 부리에 불이 난다 // 속이 까맣게 탄다”(「눈먼 사랑」)고 마음 아파한다.
시인의 연민은 사람(타인)들을 향할 경우 더욱 뜨겁다. 「석탄박물관에서」는 광산에서 일하다 세상을 떠난 형님이 ‘검정 땀’ 흘리며 일하던 사진을 태백석탄박물관에서 처음 본 심경을 서사적敍事的으로 절절하게 그린 시로 읽힌다.
자식 오남매 광산 부근엔 얼씬 못하게 하고
어머니 면회 오시면 출근 않고
검정 장화 검정 작업복 숨기고
돼지고기 실컷 대접하던 형
어머니 병원비와 생활비 모으던 검정 땀
검정 옷에 검정 땀에 검은 인생 사신 형
진폐증으로 환갑 전에 작고하신 형
형님의 검정 땀 먹던 가족들
박물관 앞에서 길을 잃습니다
—「석탄박물관에서」 부분
중복날 발송인도 밝히지 않고 택배로 보낸 홍도 한 상자를 받고 질녀가 발송인인 걸 알아내 세상 뜬 형님 얼굴과 홍도처럼 방실방실 웃는 질녀 얼굴을 떠올리며 “안견의 무릉도원도 화폭”이라고 보는 「홍도 한 상자」도 같은 맥락의 시다.
ⅳ) 한편, 시인은 노년의 삶에 순응하며 관조觀照하듯 너그럽고 여유롭게 향유享有한다. 노인들과 어울리거나 가족과도 함께 파크골프를 즐기고, 산골짜기를 찾거나 헬스클럽을 드나들며, 젊은 사람들과도 노소동락老少同樂하는 여유도 가진다.
노년에도 파크골프를 즐기는 걸 “팔순에 나머지 공부라, / 죽는 날까지 따라다니겠구나!”(「나머지 공부」)라며, “그렇다 / 저승 문 앞에서라도 / 나이스 샷! / 박수받고 싶다”(같은 시)거나 더욱 천진난만한 장난기가 발동해
고의가 아니고 우연인데
내 공이 숲속에 외로이 앉아 있으면
여자 공이 살짝 찾아와서
키스에 포옹까지
기분 좋다고 말을 할까?
아니지, 참아요
주먹키스라도 할까?
아니지, 참아요
골프공의 장난기
쨍, 콩콩
그냥 따라 웃는 거지
―「골프 신사도」 부분
라는 선정적煽情的인 감각이 작동되는데도 그 장난기를 골프공의 몫으로 돌리면서 절제節制의 미덕을 저버리지 않고 “그냥 따라” 즐거워하기도 한다. 골프의 이 같은 ‘짜릿한 즐거움’도 결코 신사도를 벗어나게 하지도 않는다.
노년을 즐겁게 보내라고 딸이 선물로 사 준 골프채를 경기장에 두고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에 와서 안타까워하는 노인과 함께 경기장에 가서 찾아와 “얼굴에 웃음꽃 핀 여사에게 / 나는 주먹악수로 축하해 주었다”(「주먹악수」)는 대목이나 시 「꼬두바리에게 금메달을」도 신사도 발휘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 준다.
시인은 「꼬두바리에게 금메달을」에서 학생 때 우등생이었고 젊을 때는 각종 대회의 금메달리스트였으며 가장으로도 금메달감인 한 노인이 서른두 명이 참가한 18홀 경기에 꼴찌를 하는 것을 보고 “금메달이 머릿속으로 가슴 속으로 /몇 번이나 들락거렸겠나?”라고 상상하면서도 “비록 시합은 꼴찌라도 / 연세와 친화와 에티켓을 합하면 / 저 어른도 금메달 감”이라고 추킨다. 그런가 하면, 가족과의 골프는 경기 내용과는 상관없이 즐거움 그 자체다.
할아버지 공은 그린 부근에
엄마 공은 그린에
할머니 공 빗맞아 피식 웃어도
잘했다고 포옹하고 안마까지
<중략>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힘이 가지다
그래도 오늘은 천당에 온 기분이다
—「가족 골프」 부분
그린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공
애미야, 잘한다
깃발을 지나 오비 되는 손자공
힘차서 좋다
홀인원이 아쉽다
파보다 몇 타를 더 쳐도
깃발까지 가지 못하는 할머니 공
주먹 쥐고 기다리다
쟁그랑 소리 들리면 모두 짝짝짝
시도 때도 없이
오비 되는 할마버지 공
아이고 저런 저런
—「화해」 부분
이 두 시에서도 읽게 되듯, 가족이 함께 하는 골프경기는 잘 치고 못 치고를 떠나 “천당에 온 기분”을 안겨 주며, 화해和解와 화합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시인의 마음자리는 고산골에 이르러 “골짜기 전체가 커다란 학교”이며 “공룡공원 용두토성 / 쌈지공원 주상절리는 학습장 / 꽃과 나무 바위와 냇물은 선생님 / 바람은 고산골 교장선생님”(「고산골학교」)이라고 자연을 스승이라고 예찬하게 하며, “아득히 높은 하늘 / 꿈의 칠판처럼 걸려 있다”(같은 시)는 우러름도 소환召喚해 온다.
또한 「러닝머신」에서의 “누군가 손 잡아 주지 않아도 / 걷다가 달리다가 되돌아오는 길 // 낮달이 축하한다”는 표현도, 사십대에서 오십대까지의 토끼띠 동갑同甲을 친구로 여기면서 “젊을 땐 어려 보여서 / 치 놀고 싶더니 / 나이 들수록 젊어지려고 / 내리 놀고 싶다”(「띠동갑」)고 하는 표현도 이 노시인다운 천진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ⅴ)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별반 다르지 않듯이, 시인도 삶의 애환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가까이나 멀리 자유롭게 나들이(여행)를 할 수 없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세월의 흐름은 붙잡을 수도 없지 않은가.
시인은 이제 “티 없어 동안이던 얼굴에 / 저승꽃 피어 노티가 난다”(「검버섯」)는 말을 들어야 하며, 검버섯 제거 시술을 권유받게도 된다. 그러나 동안童顔도 조상(DNA) 덕분과 부모의 음덕으로 여겨온 탓에 곧바로 “아차! 불효로다 / 부모님이 주신 음덕도 못 지키다니”(같은 시)라는 자성(순응)에 이르기도 한다. 뿐 아니라 피부 노화老化로 얼굴에 피는 검버섯을 검은 대륙으로 그리는 바와 같이 거시적 시각도 저버리지는 않는다.
지난겨울 파크골프에 빠져
자외선에 얼굴 노출시켰더니
피라는 꽃은 안 피고
아프리카 모로코 이집트 지도가
얼굴에 그려졌다
해외여행 가려다 코로나로 못 가는 곳이
내 얼굴에 나타나다니
그냥 두면 알제리 남아공도 그려지겠지
—「검버섯」 부분
일상에서도 시인은 크고 작은 파토스와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가면서는 일상의 애환들을 넘어서야 한다. 난감한 일을 겪어야 할 때도 있는 게 세상살이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의 애환도 그의 시에서는 거의 마찬가지 빛깔을 띤다.
요즘 아내가 흑변 본다고 딸에게 알렸다
아빠가 엄마 속 얼마나 태웠으면 흑변이요?
속 지지리 태워 흑변이라니!
병은 아니고 헬리코박터 제균 치료제 탓이래도
딸아이는 막무가내
더 큰 비밀을 간직한 게 아빠와 엄마 사이인데
너, 뭘 안다고?
고 녀석 내 편인 줄 알았더니……
—「난감한 사건」 전문
이 시를 곧이곧대로 읽기보다는 에둘러 읽어야겠지만, 딸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생각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을는지 모른다. 가부장제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속을 태우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머니처럼 여성인 딸의 입장에서는 그런 기우를 할 수도 있다. “고 녀석 내 편인 줄 알았더니……”라는 마지막 구절은 딸을 야속해 하기보다는 일종의 투정과 익살이며, 다분히 역설을 담은 희화적戱畵的 표현이라 할 수도 있다.
한편 「구름길」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의 흠집을 애써 지우며 “생의 전반부는 상처 내는 일이 많았고 / 후반부는 상처를 지우는 일이 많았다”는 기억을 되새기지만, “앞으로 얼마의 상흔 더 남기고 / 얼마의 흠집을 더 지워야 하나”라는 비애에서도 자유롭지는 않다. 나아가 “구름 등 밀고 오르는 상여길 / 문풍지처럼 가벼울 수 있을까”라고 세상 떠날 때를 지레 염려하게 되기도 한다.
“주머니에 주머니를 넣고 / 구름열쇠까지 넣어둔다”(「껍데기」)는 대목이나 “주머니가 주머니를 잃으면 / 빈 주머니만 남을 걸 안다”(같은 시)는 구절도 얼마 남아 있을지 모르는 여생餘生에 대한 관조와 순응의 암시로 읽힌다. 시인은 세월의 흐름을 느긋한 달관達觀의 시선으로 감싸 안으며, 처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륵사륵 흘러내리는 모래시계 소리
달빛 아래 돌배나무 마주하고 서면
나 살아있음을 알리는 달빛 신호다
육십에 퇴직하고 백수까지는 많이 남았다고
만만디로 산다던 인생, 하마 희수라며
몸 안에 가둔 모래시계가 달의 무게에 눌려
비탈길 내려가는 속도가 빠르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길은 멀고
마주치는 달빛은 포근하고
백 살까지 산다던 계획은 몇 년 더 살지 모르니
이제 남은 시간 돌배나무 손잡고 걸어야 한다
보이는 초침도 남은 인생도 사륵사륵
잡아둘 수도 없는 시곌랑
거꾸로 차고 사륵사륵
돌지 않는 물레방아 뒤쪽쯤 가서
달빛에 취해 옷고름 사각사각 풀어 볼까나
—「달의 비탈」 전문
희수喜壽(일흔일곱 살)에 느끼는 심경을 담담하게 풀어낸 이 시는 ‘모래시계’, ‘돌배나무’, ‘달빛’, ‘달의 무게’, ‘시계 초침’, ‘돌지 않는 물레방아’, ‘옷고름’ 등을 끌어들이면서 서정성이 짙은 은유隱喩의 아름다움을 떠올려 보인다.
이 시에서 모래시계 소리는 살아있음을 알려 주는 달빛을 받으며 돌배나무 아래 서 있는 화자에게 시간의 흐름을 완만하게 일깨운다. 하지만 내면으로 길항拮抗하는 정황으로 전이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몸 안에 가둔 모래시계가 달의 무게에 눌려 / 비탈길 내려가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끼는 절박함이나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길은 멀고”라는 대목이 바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시인은 ‘돌배나무=나’라는 등식(공동체의식共同體意識)을 만들어 “이제 남은 시간 돌배나무 손 잡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계를 거꾸로 차고 돌지 않는 물레방아 뒤쪽쯤에 가서 달빛에 취해 옷고름을 풀어보려 하는 생각에 닿기도 하는 것 같다.
화자는 새벽 다섯 시 반에 하릴없이 첫차를 타고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나 노파 등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 운반(첫차에 올리는)을 도우며 즐거워하고 “특별한 볼일도 없는 사람이 / 왜 첫차를 탔느냐고 / 묻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첫차」)고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희수를 넘긴 삶을 또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다 ‘시인의 말’ 맨 끝의 “아기처럼 티 없이 웃어보자. 기어가는 아가로 돌아가자.”는 두 문장을 포개놓고 그 암시의 공간을 적잖이 들여다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