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들려오는 성적 비리, 각종 교사 비위 문제에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워지다가도, 교사 전체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해버리는 대중들의 반응에 가슴 한편이 꽉 메어온다. 교사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에, 마치 우울증의 초기 증상처럼 의욕이 떨어지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차기도 한다. 아마도 이 땅에서 교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심정 또한 나와 같지 않을까 싶다.
세상 사람들 모두 정답을 알긴 할까
힘든 일은 왜 한 번에 일어날까
나에게 실망한 하루/ 눈물이 보이기 싫어
의미 없이 밤하늘만 바라봐
작게 열어둔 문틈 사이로
슬픔보다 더 큰 외로움이 다가와 더 날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 옥상달빛의 노래 <수고했어, 오늘도>의 일부
지금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현상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한 글 한 편보다 시 한 구절이 주는 감동이 필요할 때다. 논리적인 근거로 대중을 설득하려는 발표나 연설처럼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문학에서 찾아야 할 때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로토닌을 증가시키기 위한 항우울제도, 불안증을 치료하기 위한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약물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잘하고 있다는 따뜻한 격려 한마디다.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김용택의 시 <사람들은 왜 모를까>
더 이상 ‘사람들은 왜 모를까’라는 생각으로 속상해하지도 말자.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른다 해도, 결국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해나가면 된다. 지금 당장은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꽃’은 ‘아픈 데’서 피어난다는 진리를 위안으로 삼고 한 걸음씩 나아가자
나로 하여/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다만 안개꽃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 복효근의 시 <안개꽃>의 일부
이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초심(初心)이다. 교직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분필을 처음 잡았던 그때의 설렘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나로 인해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펼쳐낼 수만 있다면, 나는 그저 그들의 ‘안개꽃’이어도 좋다는 당시의 교직관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겠다.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
우리 주위엔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학부모가 있고, 우리보다 더 훌륭한 지식인들이 있으며,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권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밥알을 흘리는 어지러운 식탁 옆에 있지 않고, 오줌 싼 바지를 갈아입히는 지린내 옆에 있지 않으며, 힘겨워하는 산수공식과 딱딱한 책상 옆에 있지 않다.
아이의 구체적인 고민과 어려움 곁에 있지 않고,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 아이 옆에서 고뇌하며 있지 않다. 교사는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아이의 인격, 아이의 고민, 아이의 성장, 아이의 성공과 실패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
- 도종환 시인의 글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의 일부
그리고 기억하자. 우리는 ‘어지러운 식탁 옆’에서 ‘아이의 구체적인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주는 유일한 존재다. 우리가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책임을 지고 이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가족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만,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해내는 방법에만, 자신이 속한 정당의 지지율에만 관심을 가질 뿐 우리 교육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니 우리만큼은 ‘현실’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