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 주일설교(요한복음강해 37)
요한복음 10장 1~18절
양의 진실, 그리고 목자의 진실
■ 겉과 속이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이 진실인 경우도 있지만, 진실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실을 진실로 착각하거나 왜곡시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선수는 일본선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손기정이었습니다. 그는 일장기를 가슴에 붙이고 뛰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는 조선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진실에 기초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원칙과 함께 양심을 추구합니다. 그 이유가 진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실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이 진실을 더 드러낼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사실은 진리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이 진실인지를 판가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신앙의 복음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양과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양이 무엇이고, 목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양과 목자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사실에서 진실을 구분하는 작업을 하십니다.
■ 오늘의 말씀은 비유입니다.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비유는 듣는 사람의 이해를 높이고 도와주기 위해 드는 예(例)입니다. 복음서에는 다른 곳에 비해 이런 비유들이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비유는 장점과 함께 단점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 멋대로 해석해서 의도에서 벗어난 오해가 벌어지곤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는 비유의 핵심 혹은 비유사용법을 몰라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단점을 이유로 비유 사용을 멀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양과 목자가 중심입니다. 그리고 양의 우리, 양의 문, 문지기, 양의 목자, 선한 목자, 절도, 강도, 도둑, 삯꾼 등이 양과 목자의 비유를 이해시키는데 뒷받침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함께 읽는 중에 이미 정리가 되셨을 것이라 믿고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양’(羊)과 ‘목자’(牧者)는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양은 예수님의 택한 백성이고,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양의 특징을 통해 ‘구원 받은 백성의 행동규범’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 받은 성도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양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에만 순종합니다. 아무리 목소리를 변조해도 다 알아내는 것이 양의 특징입니다. 3절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자의 음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일까요? 일종의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양은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렇기에 5절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새번역) 자기 목자의 말에는 따르지만, 타인의 말에는 따르지 않을뿐더러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입니다.
그렇다면 양인 우리는,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목자, 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잘 구분하여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가장한 절도인지, 강도인지, 타인인지를 잘 구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에는 순종하고, 타인의 음성에는 도망가십니까? 어떻습니까? 혹시 내 이름을 안 불러주셔서 잘 모르겠다고요? 혹시 안 듣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2.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칭하시며 양을 위한 선한 목자로서 그 특징을 설명하십니다.
① 첫 번째 특징은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문으로만 들어가십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떳떳한데, 더욱이 그 양들의 목자인데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절도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법이고 편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문으로 들어가시는 데는 중요하면서도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과 9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절)
그래서 예수님의 문만이 정의이고, 진리입니다. 특히 이 문은 구원의 문이고, 양식(糧食)의 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영혼의 양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구원을 추구할 수는 있습니다. 마음과 육체의 양식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추구할 수는 있어도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마음과 육체의 양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이기는 하지만 진실이 아니고, 더욱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이고,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② 두 번째 특징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양의 숫자가 얼마가 되던 그 이름을 다 알고, 또한 인도하실 때마다 매번 그 각각의 이름을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은 목자의 감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양의 태도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속상하셔도, 속상하게 굴어도 이름을 부르며 인도하시는 일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비이십니다.
③ 세 번째 특징은 ‘언제나 양들의 앞에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옆에 서시지도, 뒤에서 몰지도 않으십니다. 늘 앞에서 이끄십니다. 4절입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왜 앞에 서서 이끄시는 것일까요? 혹시 앞만 보며 가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앞장서신다는 것은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확인하시고 정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앞만 바라보며 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후좌우(前後左右), 그리고 위와 아래 모든 곳을 살피십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과 위협이 닥칠지를 예의주시하며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돌보심입니다.
④ 네 번째 특징은 ‘양들에게 생명의 길과 풍성한 삶을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관심은 양들의 생명과 풍성한 삶입니다.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역동성과 긍정성 아닙니까? 이것은 믿음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풍성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풍성은 꽉 채워진다는 의미를 넘습니다. 채워지고 흘러넘치기까지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향력의 의미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흘러넘쳐 주변에,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양들에게 이러한 풍성한 삶을 수여하십니다.
⑤ 다섯 번째 특징은 ‘양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목자들, 소위 삯꾼들과 다른 점이십니다. 11~17절을 봐야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삯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대가없이 목숨을 버리십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양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십니다. 삯꾼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삯꾼(μισθωτὸς, 미스도토스)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어로 ‘hireling’, ‘hired hand’라고 합니다. 이 말은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 또는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살인 청부업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돈만 준다면 좋은 일, 나쁜 일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삯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선한 목자를 가장한 삯꾼들이 많습니다. 천사의 탈을 쓴 절도, 강도, 도둑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음성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과 풍성한 삶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멸망당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의 음성에 익숙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예수님과 대화하셔야 합니다. 대화의 방법은 ‘성서 읽기’와 ‘성서 묵상’, 그리고 ‘기도’입니다.
■ 세상이 쏟아내는 학문과 이론은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사실입니다. 행복하게 하고, 잘 살게 할 목적으로 인류는 학문과 이론들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아닙니다.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사실 뒷면에 감추어진 진실은 삯꾼입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구원은 다릅니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시기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타적입니다. 비타산적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주기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예수님을 인간이라는 사실까지만 알 뿐입니다. 그래서 존경은 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실은 그리스도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더욱이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형식만 구원이 아니라 철저하고도 완벽한 구원을 베푸십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