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Havana , 그 정열적인 매력과 낯선 가난함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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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만 해도 쿠바의 아바나(Havana)나 바라데로(Varadero) 같은 곳은 중남미의 라스베가스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인 부유층들이 잠시 와서 놀다가는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부류 중에는 휴양을 즐기러 쿠바를 자주 찾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도 있었다. 헤밍웨이가 쿠바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28년이었지만 쿠바와 깊은 교제를 시작한 것은 1932년 여름이었다.
새치 낚시광인 헤밍웨이는 쿠바산 럼주를 좋아하는 플로리다 키웨스트의 친구들과 두 달간 쿠바에 머물며 이 낮선 동네와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그의 소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는 당시 그의 친구들과의 쿠바에서의 모험담을 토대로 쓴 것이다. 1940년대에 문을 연 라 보데기타 (La Bodeguita del Medio) 레스토랑은 쿠바에서 휴가를 즐겼던 헤밍웨이가 자주 들렸던 곳으로 오늘날 아바나의 명물이 되었다. 또한 이곳은 쿠바의 지식인과 예술가, 그리고 보헤미안들이 그들의 지성과 예술적 의지를 서로 나누고 불태웠던 장소이기도 하다. 아바나에서 헤밍웨이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는 아바나 시내 오비스포 거리에 위치한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이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이 호텔에서 헤밍웨이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1932년부터 39년까지 머물면서 쿠바에 대한 단상을 글을 옮겨 쓰곤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나날이 고립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대한 몸부림일까? 아바나의 밤거리는 어느 도시들보다 화려하고 정열적이다. 최근 들어 전 세계에 불고 있는 라틴 리듬 열풍의 진원지는 바로 아바나다. 그 화려한 문화 앞 선에는 1940년대에 무도회 반주음악 연주양식과 맘보, 볼레로, 차차차 등의 리듬이 혼합되어 생겨난 살사 댄스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친숙해진 쿠바 재즈가 있다. 특히 살사로 몸을 흔들며 무아지경에 빠져있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 경제적 풍요만이 삶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극도의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뜨겁게 솟구쳐 오르는 이들의 삶에 대한 진중한 애착과 정열이 숭고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르네상스의 감추어진 빛, 페라라 Ferr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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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페라라에는 르네상스 문인들의 시적 기운과 예술적 무대가 어우러진 채, 찬란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광이 빛나고 있다. 인구 13만 명의 중소 도시 페라라가 부와 명성을 함께 갖추었던 에스테가(家)의 거점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던 것은 13세기부터였다. 이때부터 페라라는 에스테 가문의 문예 장려책에 따라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5, 16세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번영기였다.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대한 정신'을 이끌었던 지성과 예술의 대표적 인물들이 에스테가의 후원에 힘입어 이 도시로 대거 몰려왔다. 소네트라는 14행시를 완성한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Petrarca)와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로 알려진 시인 아리오스토 (Ariosto)도 당시 이곳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선각자들이었다.
오늘날 이 도시의 곳곳에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요새건축물인 에스테성(城)과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두오모 대성당 등 에스테가 시대의 번영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도시 건축미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에스테 성(Castello Estense)은 반란과 봉기에 대비하여 에스테 가문을 보호한다는 명문아래 1385년 지어진 것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는 요새처럼 사각 모양에 주변을 물웅덩이(濠)로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내(城內) 지하 감옥(Dungeon)에는 1425년 에스테가의 니콜로 3세 군주가 그의 첩과 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참수형에 처했다는 비극의 장소가 남아있다. 이 이야기는 후에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작품 <나의 마지막 공작부인(My Last Duchess)>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도시의 중심가인 카테드랄레 광장(Piazza Cattedrale) 주변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휴식터이자 다양한 일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마치 모든 일상의 움직임들이 시의 운율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듯하다. 도시 중심가에는 밝은 햇살처럼 아름다운 파스텔 톤의 빛바랜 건물들이 인상적인 모습으로 늘어서 있다. 미로처럼 얽힌 구시가의 거리를 배회하면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노래하였던 옛 르네상스 시대의 문인들의 시향(詩香)이 도시 곳곳을 떠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페라라를 언급할 때 이 도시가 낳은 위대한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Antonioni, Michelangelo)를 잊지 않는다. 그는 이 도시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정사(L'avventura)>, <밤(La Notte)>, <태양은 외로워(L'clipse)>, <욕망(Blow up)>과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그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페데리코 펠리니와 어깨를 겨루는 이탈리아 영화계의 대부이기도 하다. 근래에는 <구름 저편에 (Al di la delle nuvole),1995년작>라는 영화로 국내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페라라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 유산인 중세의 성벽이 남아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언어의 연금술을 반복했던 르네상스 문인들의 시향을 맡으며 한가롭게 중세 성벽을 따라 나른한 오후의 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참 운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