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7,1-4.6-7; 1코린 9,16-19.22-23; 마르 1,29-39
+ 오소서 성령님
지난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오늘은 신임 구역장님들 그리고 신임과 현임 반장님들의 임명장 수여식이 있습니다. 그간 구역장님과 반장님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새로 봉사하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주일 미사 강론 때 너무 무거운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 이번 주에는 좀 가볍고 재밌는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제1독서 첫 구절이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이렇게 시작하고 있네요?
욥기의 말씀인데요, 우리가 주일 미사에서 욥기의 말씀을 듣는 것은 3년 중 딱 두 번인데, 그중 한 번이 오늘입니다. 혹시 욥기 읽어보셨어요? 저는 욥기를 책상에서 읽는 것과 병상에서 읽는 것이 무척 다르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요,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욥기를 읽으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한 단어 한 단어가 폐부를 찌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같은 성경 말씀이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 자세로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무척 다른 것 같습니다.
욥기는 ‘무죄한 이의 고통’이라는, 매우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죄한 이’가 세상에 예수님 말고 어디에 있겠습니까. 욥기가 말하는 것은 ‘고통의 원인이 죄가 아닌 사람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통의 원인이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고통의 원인은 죄이기도 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야, 쟤 죄짓는다, 고통 하나 내려보내라” 이렇게 천사를 시켜서 하늘에서 고통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트에서 1+1 상품을 구매하듯이, 죄와 고통이 결합 된 1+1 상품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후에 그에 따른 고통을 겪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고통이 죄의 결과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통이 죄의 결과라는 등식은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 어떤 때에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욥기는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정면으로 대들고 있습니다. 위로한답시고 왔다가, ‘자네가 죄를 안 지었다면, 자식들이라도 죄를 지었겠지’라고 비아냥거리는 친구들을 거슬러, ‘나에게 이 고통이 왜 주어진 것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욥기 3장부터 42장 6절까지, 운문 즉 시의 형태로 되어 있는 욥기의 중심 부분은, 구약성경이 그간 제시해 왔던 고통에 대한 이론을 하나하나 반박해 가며 이 문제를 따져나갑니다. 즉 ‘어떤 고통은 하느님께서 너의 신앙을 시험해 보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어떤 고통은 네 인격의 성숙을 위해 주어진다’ 등의 이론인데요, 욥기는 이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따지고 반박합니다.
본래 시의 형태로 존재하던 욥기의 중심 부분에다가, 후대에 어떤 사람이 앞뒤로 산문을 배치함으로써 욥이 겪은 고통의 원인과 결말을 제시했는데, 엉뚱하게도 하느님이 사탄과 내기를 하는 바람에 욥이 고통을 겪은 것이라는, 욥기의 주제와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욥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상(像)을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요, 첫 번째는 사탄과 내기 하는 하느님입니다. 두 번째는 욥의 친구들이 얘기하는 인과응보에 철저히 매여계신 하느님이고, 세 번째는 욥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하느님, 네 번째는 욥기 후반부에(38장부터) 등장하는,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가 욥기의 주제와 가까운 하느님 상이라 말합니다. 이에 비해 사탄과 내기하는 하느님은 ‘작은 신화적 우상’(a small mythological idol)이며,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거대한 이상의 우상’(a great ideological idol)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욥기는 고통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있을까요? 마르틴 부버는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대답으로 제시하신다’고 말합니다. 욥이 계속해서 요구한 것은, ‘자기의 처지를 원상 복구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더러 나타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당신 얼굴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욥 19,26)
마침내 하느님은 정말로 나타나셨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욥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라고 말씀드립니다. 욥의 고통은 여기서 그쳤습니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다른 어떤 대답과 위로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짊어지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해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고통을 짊어지고 계신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으로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데요, 당시 열병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고대 시대 사람들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영들이 우주를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해방하시고 회복시키신 것이 사람들에게는 병을 일으키는 나쁜 영들을 쫓아내시는 행위로 보였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제 안식일이 끝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껏 병자들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다음 날 새벽,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며 그곳을 떠나십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평생 자기들의, 자기 가족의 주치의로 모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병을 낫게 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냄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십니다. 여기서 ‘일으키시니’(ἤγειρεν, 에게이렌)라는 말은 예수님 부활 때(마르 16,6; ἠγέρθη, 에게르테)에 다시 등장합니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그분께서 일으켜지셨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것은, 그분께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일으키실 분, 즉 부활시키실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욥이 던진 질문은 이제 해결된 것일까요? 질병과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의문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욥과 같이 우리도 많은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욥이 그처럼 대담하게 하느님께 대들 수 있었던 까닭은, 욥 안에 이미 하느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진정성 있는 욥의 질문을, 당신께 대한 친구들의 위선적인 변호보다 더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외치십니다.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 분, 우리는 그분께 희망을 둡니다. 우리가 아픔 중에 있을 때, 그분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https://youtu.be/qxsd_5UWpBc?si=FSORnogFzcBLaZ9F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심, Dečani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