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坡集』~~소암처사 위영우
19세기 호남 인물 李僖錫의 문집
[내용 및 특징]
『南坡集』은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활자본이다. 서문은 1897년 기우만이 썼는데, 기정진의 문인으로 장흥 天冠山의 정기를 받은 듯 빼어났던 이희석의 학문과 행실을 찬미하였다.
권1과 2는 詩 430 수 가량이 실려 있는데,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나 그 문인들, 이희석의 친족이나 동향의 長興魏氏들과 주고 받은 시가 많으며, 奇在善이나 奇鳳鎭과 같은 기정진의 친족, 崔益鉉이나 金平黙에게 보낸 시도 있다. 기정진의 문인으로는 安達三, 金瀏, 曺毅坤, 吳相鳳, 金漢燮, 奇宇萬, 奇弘衍 등이 있다. 이희석의 시 중에서도 학문과 유학자들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노래한「閑居無事得句輒寫不復詮次」, 주변의 풍광에 자신의 감정을 담은「樂英齋雜吟」, 「舍人亭風詠契會」 「長川齋酬唱」등은 대표적인 장편시이다.
권3에는 書 34편이 실려 있다. 스승인 기정진과 동문인 崔得洙, 趙性家, 이항로의 문인인 김평묵, 장흥부사로 부임하였던 韓致肇, 李鶴來, 宋綺老 등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안부를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친구나 同族, 인척 등에게 보내는 편지도 몇 편 있다.
권4는 雜著이다. 「蘧廬說」은 생계에 서툴러 거처는 누추하지만 뜻은 크고 높다고 자부하는 글이며, 「回甲說」은 회갑을 사치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봉양의 의미를 돌이켜보는 날이어야 한다고 비판한 글이다. 「去矜說」은 공자의 글을 학설을 열심히 공부하면 자만하는 마음이 떠난다는 글이다. 「貞說贈永錫齋諸生」은 괘와 곤괘의 정의 덕을 본받아야 체용을 갖출 수 있다는 글이다. 「金敏受(永澤)記實」은 흉년에 마을과 친척들을 구제한 김영택의 공적이 알려져 태수 尹墉과 관찰사 李敦相에게 추천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舌誡」는 혀를 잘못 놀렸을 때의 병통이 가장 큰 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약재라는 것이며, 「擬惜誓」는 善言이나 故事를 통해 자신을 경계하는 글이며, 「擬周君臣賀宮人作關雎詩」는 대례식을 행하는 왕비의 덕을 찬양하는 글이다. 「先王考府君新阡錄」은 부친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지은 글이다.
권5에는 序 9편, 記 12편, 跋 6편이 실려 있다. 「沙湖移宅序」는 이희석이 1851년 홍수를 만나 나주의 사호로 이주하였던 일을, 「愛菊序」는 국화를 좋아하게 된 내력을, 「止雲序」는 친구 金國敏의 號인 止雲에서 儒者들의 動靜과 出處에서 그칠 지(止)자의 중요함을, 「可菴序」는 친구인 金永夏를 위해 늦었지만 공부를 더해야 함을, 「黙軒序」는 朴寅煥의 自號인 묵헌의 黙이 망녕되이 말하지 않는 것에 있음을, 「竹史序」는 周雲之에게 호가 없는 사람이 없는데 기왕에 竹史라고 자호하였으니, 대나무의 내력을 살피고 의리를 생각할 것을 부탁한 글이다. 그 밖에 「默軒金公遺集序」는 해남 출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낸 묵헌 金載一의 시문집, 「默窩魏公(守澤)遺誥序」는 향촌 지식인인 魏守澤의 유고 서문이며, 「永保洞契序(代李進士圭浩)」영암 덕진면 영보동에서 연촌 최덕지의 후손과 거창신씨가 주축이 되어 수백 년 시행된 계를 중수한 사실을 거창 신씨의 외손인 李圭浩를 대신해서 지은 글이다. 記는 12편인데, 「栗亭公碑陰記」는 이희석의 선조 율정공 李斗宇가 장흥에 내려와 강학하면서 1573년에 족보 서문을 쓴 사실을 기록한 것이며, 「淵院重修記」는 老峯 閔鼎重과 屯村 閔維重, 李敏基를 모신 淵谷書院이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뒤에 다시 중수한 사실을 쓴 글이며, 「鹵園記」는 세상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멀리 천관산 남쪽 바닷가에 거처하는 은자의 삶을 잘 묘사한 글이다. 그 밖에 장흥의 冠山이나 獅山을 유람한 기문 등이 있으며, 서실이나 사당, 효열정려비에 관한 글도 남겼다.
발문은 족조인 李績의 비문이나 삼가 출신의 『永慕齋遺稿』의 발문, 장흥 출신의 養性齋 宣孝子의 언행록, 高氏 三孝門記, 경주최씨 孝烈錄 등 효열에 관한 발문, 대필해준 「靈泉窟結社記」의 발문 등이 있다.
권6에는 행장 3편, 묘지명 1편, 제문 7편이 실려 있다. 행장 3편은 모두 장흥에 거쳐하였던 인물에 관한 것인데, 이희석에게 어린 시절 공부를 가르쳤으며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고 고을에 향약을 실시한 삼종숙 李商啓, 효성과 우애를 다하였던 素菴處士 魏榮禹나 장흥의 여러 유자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磻泉居士 廉翰琪의 생애를 묘사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은 부친 李重楫에 대한 것이고, 제문으로는 스승인 기정진을 비롯해서 교분이 두터웠던 奇章一, 道谷處士 宋鍾雲이 별세하자 올린 제문과 蓉山에서 기우제를 지낸 글과 천관산의 산신령께 호랑이를 물리치게 해달라는 기원문이 있다.
권7은 이희석이 1866년 3월 2일부터 6월 13일까지 4개월간의 여행기록이다. 「遠遊續錄後序」에 의하면 이희석은 1858년 奇文鉉, 奇鳳鎭, 金錄休 등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자, 1866년 3월 고종의 대례로 인한 증광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상경한 이후 金會鉉, 金玗와 함께 금강산을 다녀오고 다시 김회현과 함께 영남을 거쳐 고향에 간 기록이다. 그가 다녀간 곳을 장흥 남면⟶서울⟶강화(정족산성, 마니산)⟶동대문⟶금강산(장안사, 마하연, 유점사,신계사, 총석정)⟶금성창도⟶원주⟶조령⟶대구⟶삼가⟶진주 월횡⟶하동⟶구례 간전⟶순천⟶장흥 남면 묵촌까지 3,360리에 달하는 긴 거리이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많은 시문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영남에서는 자신의 종족들이 많이 거처하고 있었던 대구와 삼가를 찾아 이문화를 모신 西溪書院과 兎洞의 雷龍亭을 방문하였으며, 진주 월횡에서는 10여일을 머무르면서 기정진과 교분이 두터운 하달홍과 동문인 조성가 등과 함께 시문을 주고받았다.
권8은 이희석에 대한 각종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奇宇萬이 찬한 행장과 奇參衍이 서술한 「南坡李先生傳」 및 李承旭이 지은 묘지명, 그리고 金平默(1890), 崔益鉉(1892), 宋綺老(1890), 趙性家(1901)로부터 발문을 받아 1898년에 손자 大遠 · 正遠 등이 편집, 간행하였으며 이 사실을 삼종손 周遠이 다시 발문으로 기록하였다.
[자료적 가치]
『남파집』은 시문에 뛰어난 기정진의 문인인 이희석이 남긴 문집이다. 이희석은 장흥출신의 유학자로서 대단히 활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430수에 달하는 그의 시에는 그가 사귄 인물들과 주고받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서 기정진의 문인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인물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권7에는 1866년 3월 2일부터 6월 13일까지 서울과 강화, 금강산과 영남 대구, 삼가, 진주 일대를 여행한 4개월간의 3,360리에 달하는 장기간의 여행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희석은 가는 곳곳마다 많은 시문을 남겨두었으며, 영남에서는 자신의 종족과 스승인 기정진과 교유하던 인물을 찾아 시문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당시 여행경로나 거리, 풍광, 풍속 등에 대한 생생한 정보, 노사학파와 관련된 영남지역의 동향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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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김봉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