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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3 - 왕정 후기 선거운동으로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와 마지막왕 타르퀴니우스
트로이 멸망후 탈출한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로 왔고 그 후손인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세운
로마 왕정은 기원전 509년 7대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왕이 추방되고 로마는 공화정으로 바뀝니다.
로마를 건국한 초대왕으로 로마의 기초를 세우고 이후 사비니족과 전쟁 후에 그들을 로마에
합친 로물루스왕과 현자로 불리던 사비니족으로 초빙되어 내실을 다진 2대왕 누마에,
3대왕으로 라틴족의 본가인 알바롱가를 흡수한 툴루스왕 까지는 왕정 전기에서 다루었습니다.
사비니족 출신으로 테베레강에 다리를 놓고 오스티아항을 얻은 4대왕 안쿠스와 에트루리아 출신 이주민
으로 최초로 선거운동을 통해 왕에 올라 간척사업으로 포로 로마노를 건설한 5대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로마성벽을 쌓고 신전을 세우며 군제와 세제 및 투표제를 완성한 6대 세르비우스왕
그리고 쿠데타로 왕에 올라 전투에는 뛰어났으나 추방된 마지막왕 타르퀴니우스는 왕정 후기에 올립니다.
1. 4대왕 안쿠스 마르티우스
4대왕 37세 안쿠스 마르티우스는 사비니족 출신이니 2대왕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
났는데 당시 로마는 라틴족과 사비니인이 교대로 왕이 된다는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라틴족인 제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죽은 기원전 641년에 후계자로 선정 됐습니다.
라틴계인 3대 툴루스왕이 초대 로물루스왕 처럼 치세기간 내내 전쟁에 몰두했기 때문
에 로마에서는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고..... 통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전쟁을 하지 않았던 2대왕 누마의 손자라서 기대를 얻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사정을 안 이웃 부족은 로마의왕은 전쟁을 싫어하는자 라고 멸시하며 공격을 시작했는데 그러나
안쿠스는 비전투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멋지게 군을 지휘했으니 로마는 피데나이인, 아니에네강
중류 사비니인, 캄파니아 지방의 볼스키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인근 도시 하나를 굴복시켰습니다.
그는 선왕 툴루스와 마찬가지로 굴복한 도시의 건물을 파괴하고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
시켰으며 또한 안쿠스는 북방의 에트루리아 인들을 대비하기 위해 강 서안의 자니콜로
(닉룸) 언덕에 요새를 만들었으며 이 자니콜로언덕과 강 동안의 일곱언덕을 연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뗏목 다리 밖에 없었던 티베르 강에 처음 견고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로마에서 26km 나 떨어진 테베레강 하구에 어촌 오스티아를 정복하고 로마의 외항
으로 삼았으니 지중해에 도달했고 염전을 손에 넣어 돈을 만지는데, 로마의 첫 도로는
오스티아항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니 “비아 살라리아” 라고 불렀는데..... 바로 “소금길”
이라는 뜻이며 돈(소금) 을 손에 넣은 로마는 완만하게 한걸음씩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안쿠스는 평시 통치에도 능력을 발휘했으니 적을 강제 이주시켜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아웬누스(벤티누스) 언덕이 로마 시가지에 통합
되었으며 또한 수로를 건설하여 로마에 최초로 물을 끌어들였으며 종교 의식 등의
제정에도 노력해, 이후 로마에 전해지는 신중한 선전 포고 절차를 고안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제 로마에서는 팔라티누스언덕에는 라틴계, 퀴리날리스언덕에는 사비니족, 카일리우스언덕에
알바롱가족이 거주한 가운데 전쟁에서 패해 도시가 파괴되고 강제 이주당한 4번째 라틴
부족은 벤티누스 언덕이 제공되었으며 신전이 지어진 카피톨리누스언덕까지 5개가 채워졌습니다.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전설적 인물에 가까우니 저런 공적 외에도 로마에서
처음으로 기원전 144년에 마루키아 수로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냉정한 인물이었고,
평시에도, 전시에서도 뛰어난 왕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안쿠스는 기원전 616년에 병사 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후견인이었던 에트루리아인이었던 타르키니우스 프리스쿠스
가 제5대 왕이 되면서, 라틴 인과 사비니 인이 왕위를 번갈아 하던 시절이 끝나게 되는
데.... 안쿠스의 두 아들은 훗날 왕위를 노리고 타르키니우스 프리스쿠를 암살했지만,
그 뒤를 잇지는 못하고 폴키스 마을에서 거지가 되는 말로를 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5대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고대에서는 특이한 자이니 최초로 왕에 선출되기 위해 선거운동
을 한 자인데 안쿠스가 왕위에 있던 시절 우마차를 몇 대나 거느린 일가가 로마로 들어
왔으니 화려한 차림새와 장발로 에트루리아인이란걸 알수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망명해온자 이고 어머니는 지체 높은 집안의 에트루리안인 이었습니다.
에트루리아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무역에서는 민족을 따지지 않지만 자기들 사회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으니 이방인으로서 지위 향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외지에서 팔자를 시험해 보기로 했으니 코린트인이 시칠리아에
건설한 시라쿠사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인도 순수한 혈통을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해서 로마로 이주해 왔는데 외지인에게도 시민권을 주는데다 누마와 안쿠스등 라틴족이 아닌 사람도
왕이 되었기 때문이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력과 자신의 재능으로 10년도 지나기 전에 안쿠스왕
의 유언집행자로 선출될 만큼 출세했는데 공증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위에 입후보를 합니다.
리비우스는 타르퀴니우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연설를 하고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며 돌아
다녔다고 적었는데... . “나는 이주한 사람이지만, 타국인이 로마 왕이 된 선례가 있다. 처자와 함께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왔으니까 뼈를 묻을 마음이 충분하며 나이도 공직에 앉기에 적당하고, 선왕의
신뢰도 두터웠으며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고 로마법을 존중하는 점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민회는 타르퀴니우스를 압도적으로 왕에 선출했고 원로원도 승인했으니 라틴계, 사비니계로 이어져
내려온 로마 왕의 계보에 처음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이 등장한 것인데 그는 유능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으니 37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로마의 세력권은 더욱 확장되었을뿐 아니라 로마의
내부도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변모했고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비약적인 향상되었습니다.
즉위후 로물루스 이래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200명으로 늘렸는데 인구가 늘어난 것이 이유
였지만, 참뜻은 자신의 권력 확립에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원로원 의원만은 왕이 지명할 수
있었으니 자신의 입김이 닿는 사람을 원로원 의원으로 지명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신참자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기성세력의 아성인 원로원 이었습니다.
타르퀴니우스는 민중의 지지로 왕이 되었지만 민중의 지지에만 의존할 경우의 위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니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왕은 주변 부족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떠났는데..... 왕의 적절한 지휘와 병사들의 용맹으로 당시 로마군은 서서히 명성을
높이고 있었지만, 상대가 강적은 아니더라도 로마는 사람으로 치면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아직 치열한 격전 끝에야 승리를 거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
였는데, 타르퀴니우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싸움에 진 사람들을 로마로 이주시키고
시민권을 주어 동화시키는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으니..... 그 대신 패배자한테서 빼앗은
전리품을 수레에 가득 싣고 로마로 개선하자 시민들은 전리품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주변을 위협하고 있던 이웃 부족들은 당분간이나마 얌전해졌으니 타르퀴니우스는 이 기간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로마 개발에 착수했는데 그는 로마인이 일곱 언덕에만 살고 있으면 로마를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넓은 습지대로 눈을 돌렸습니다.
팔라티누스언덕 북쪽에 있는 저지대는 그때까지 도랑이 그물처럼 뻗어있는 습지대였는데 거기에 지하수로
를 내면 저지대 전체의 물을 모을 수 있으니 지하수로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면 모인 물의 배수 문제는
해결되니 지하수로 공사가 착수되었고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였습니다.
부족끼리 모여사는 일곱 언덕에 비해 중립지대가 되며 지하수로의 위쪽을 덮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만 돌로 포장하였고 이후 공공 건축물이 세워지니 로마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포룸 로마눔', 즉 '포로 로마노' 가 탄생한 것이며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던 습지대도 같은 방법으로 탈바꿈했으니 대경기장이 건설되었습니다.
간척사업으로 왕래가 편해진 일곱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는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이 건설되었으니... 에트루리아인이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이 도시
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로마도 오스티아항에 지하수로를 이용한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
각 민족의 특색을 유지하면서도 전체를 통합할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일곱 언덕과 주변을 흐르는 테베레강 으로 이루어진 로마는 단조로운 평야 보다 변화가 풍부한
아름다운 경치를 갖는데 개발사업을 수행한 사람들은 로마군단 병사들이었으니 리비우스에
따르면, 왕이 병사들을 이용한 것은 "평시에도 병사들을 전시와 똑같이 활동시키기 위해서"
였다고 하며.... 그후에도 로마에서는 이런 건설 작업을 군단 병사들에게 맡긴 예가 많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아직 이만한 대역사를 추진할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타르퀴니우스
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에트루리아에서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등을 들여왔으니 로마에 복이라고
할 것인데...... 자연히 로마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에트루리아인 기술자들이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때 에트루리아인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아 기술을 배우고 익혔으니 이것이 세계적인
토목기술자들을 키워내는 기초가 되었으니 타르퀴니우스가 도입한 에트루리아 기술로 변모한
로마 시가지를 보고, 원래 농경민족인 로마인은 비로소 기술력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대규모 토목사업에는 자재를 제공할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니 이것도 에트루리아인이 맡았습니다.
이전의 로마에는 가내수공업 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업과 수공업이 시내 전역에서
눈에 띄게 되었으니 당연히 경제가 활발해졌고 상공업의 활성화로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으며 이제 로마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 국가로서 균형 잡힌 구조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타르퀴니우스 왕은 한 에트루리아인 소년을 만났으니 마음에 들었던지 친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는데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타르퀴니우스는 이 젊은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자 타르퀴니우스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은 불안해집니다.
왕이 사위를 후계자로 결정하면 그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마는데 타르퀴니우스는 치세가 37년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여전히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원로원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이니
타르퀴니우스의 추천은 곧 당선을 의미하는지라 안쿠스의 두 아들은 선수를 치기로 결심
했으니 그들은 왕을 암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쪽도 왕위에 오르지는 못합니다.
3. 제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세르비우스를 소년 시절 부터 키워온 타르퀴니우스왕의 아내는 기원전 578년 남편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자마자 세르비니우스를 불러, 재빨리 왕위를 차지하라고 권했으니..... 왕비한테는
친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왕이 암살당한 직후 왕비가 부른 것은 사위였는데 이런 사정이
있어 제6대 왕이 세르비우스는 민회 선거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 결의만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6대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선왕 타르퀴니우스가 착수한 사업을 마무리짓는 일을 서둘렀으니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로 2천500년이 지난 오늘 '세르비우스의 성벽' 이라고 불리고,
현대 로마에도 군데군데 남아있는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 전부를 에워싸는 대규모 성벽이었습니다.
간척사업으로 된 평지에도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곱 언덕과 사이의 평지로 이루어진 로마
전체를 에워싸는 것은 방어면에서도 필요불가결한 일이었으니 세르비우스가 완성한 성벽의 보호를
받고 군사적인 성공도 거듭되어, 이 무렵에 로마는 주변 부족들 중에서도 우뚝솟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르비우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수렵의 여신 디아나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는데 이 여신은 목축업
을 주로하는 주변 부족들의 수호신이었으니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수 없을 만큼 훌륭한 디아나
신전을 로마 안에 세운 것은, 이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면 로마 시민이 아니더라도 로마에
들어올 수 있고, 신전에 참배할수 있다는 뜻으로 신전을 참배하는 것이니까 무기는 지니지 않았습니다.
세르비우스 왕은 타인을 거부하는 성벽과 남도 받아들이는 신전을 동시에 건설하여 완성
시켰으니 영리한 짓이라고 하겠는데, 그러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 개혁으로 이것은 군제 개혁인 동시에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기도 했으니... 국민의 의무는 세금을 내고 국가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에는 로마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군역으로 직접세" 를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야만 제구실을 하는 시민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시민이라면 당연히 권리를
가지니 바로 투표권으로 따라서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는 도식이 성립됩니다.
세르비우스는 테베레 강을 향해 펼쳐져 있는 습지대를 간척하고 '마르스의 광장' 이라고 불렀으니 군신
마르스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군신의 이름을 붙인것 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 평지는 군단의 집결지
이자 민회 투표장으로 이용되었으니 군제는 세제와 같고 선거제도와도 같다고 생각한 로마인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앞서, 세르비우스는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으니 주목적은 로마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인구조사에서 당시 로마의 총인구까지는 알수 없으며, 조사
결과 알게 된 시민의 수와 경제력을 토대로 세르비우스가 만들어낸 새로운 제도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세르비우스의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의 구별없이 경제력을 기준
으로 하여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제1계급이 너무나도 많은게 의아하니.... 우선,
부자인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인데 그들만으로 이토록 많은 수의 병력이 모일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돈을 주고 무산자를 고용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누구나 품을 것입니다.
재산(아세 : 구리 327g | 군제 : 백인(켄투리아) | 투표수 | |
제 1 계급 | 100,000 이상 | 기병 18, 보병 80 | 98 |
제 2 계급 | 75,000 ~ 100,000 | 보병 20 | 20 |
제 3 계급 | 50,000 ~ 75,000 | 보병 20 | 20 |
제 4 계급 | 25,000 ~ 50,000 | 보병 20 | 20 |
제 5 계급 | 12,000 ~ 25,000 | 보병 30 | 30 |
계 급 외 | 무 산 자 | 보병 5(예비역), 평시 면제 | 5 |
합 계 | 기병 18(1,800 명) + 보병175(17,500명) | 193 |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인데 첫째, 로마에는 말기가 될 때 까지 용병제도가 없었으며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며 둘째, 로마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
하고 있었으니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니, 전쟁이 나서
부자가 50명의 병사를 제공해야 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후원한 자들에게서 지원" 을 받아 낼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표 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겠지만, 이것은 로마의 독특한 투표 방식 때문이었으니, 로마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 않으니... 군단의 최소 단위이기도 한 백인대가 각각 한 표를 갖는데 백인대
내부에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뜻을 모으고, 그렇게 하여 나온 "통일된 뜻이 한 표" 로 연결되니.....
소선거구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만, "로마에서는 100명이 한 표" 를 갖습니다.
도표를 본 사람은 “이래서는 제1 계급 만으로도 과반수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사실 그렇습니다마는, 기원전
6세기 로마에서는 많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큰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니..... 시민의
의무, 즉 직접세인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16세 미만인 미성년 남자와 이미 오랫동안 의무를 수행한 60세
이상의 고령자, 여자와 노예, 재산이라고 자식 밖에 없는 사람을 뜻하는 '프롤레타리', 즉 무산자 뿐이었습니다.
여자는 가부장제가 엄격한 로마에서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여자라도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그런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기병이 타는 말의 유지비로 매년 200아세를 낼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기원전 6세기에 이미 로마는 2만명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겠지만, 이것은
예비역까지 포함한 수로 25세부터 45세까지의 시민으로 구성된 실제 병력을 세르비우스
왕은 "만명" 으로 계산했는데.... 물론 지휘관은 연령 제한이 없었으며 왕 자신도 종신제 였습니다.
같은 보병이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장비가 무거워지니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중무장
보병이 되고 계급이 내려갈수록 장비도 가벼워져, 5계급의 보병은 군복도 없이 각자 자유복장
이었고, 무기도 칼이나 창도 없이 몽둥이와 투석기, 그러니까 새총 정도가 의무화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군역은 직접세" 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장에서 무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각자 부담" 이었으며
로마 500년 세월 동안에 계급 외인 "무산자 프롤레타리" 까지 소집된 것은 단 한번뿐이었으니, 그들
은 이웃나라와의 전쟁과는 아무른 관련이 없는 자들이었는데 그래도 예비역 소집은 자주 있었습니다.
세르비우스왕은 병법도 확립했으니 로마군은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되며 전위는 맨 먼저 적과 부딪쳐
적의 전선을 흩뜨리는 역할을 맡으며 두번째로 대기하고 있던 군단의 주력부대인 중무장 보병이
승부를 결정짓고, 그후 세 번째 후위가 지원하러 들어가는 전술이며 기병은 기동대 역할을 맡았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그저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고대에 세르비우스의 병법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쳐들어가는 로마 군단의 위력은 압도적이었으니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니 세르비우스 왕의 치세는 평화롭게 끝날 것으로 여겨졌지만 불평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고 또한 성과가 많았던 그의 치세도 44년이라는 긴 세월에 이르렀습니다.
4. 제7대 마지막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암살당한 5대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뒤를 이은 것은 사위인 세르비우스였는데, 선왕한테는
친아들도 있었지만 로마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었으니..... 6대왕 세르비우스는 나라를 잘
다스렸고 실적도 올렸기 때문에, 불평분자가 있다해도 시민들의 지지를 기대할수 없었고,
그리하여 44년이 무사히 지나갔지만 불평분자의 아들 세대가 되면 부모의 모습은 비겁해 보입니다.
세르비우스한테는 두 딸이 있었으니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드세고 하나는 얌전한 성격이었
으며..... 선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쪽에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성격이 정반대여서
하나는 담찬 야심가였고 또 하나는 온건한 성격이었으니 세르비우스왕은 이 넷을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끼리 결혼시킨게 아니라 성미가 드센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사촌 오빠에게,
얌전한 왕녀는 야심만만한 사촌 오빠에게 시집보낸 것으로 결혼 생활을 통해 각자의 성격이 중화되기를
기대했던 것이겠지만 실패였으니 성미가 드센 툴리아 왕녀는 온건한 성격의 남편을 사사건건 멸시했습니다.
당신 같은 겁쟁이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한 행운의 여신은 나한테 미소도 짓지 않으리라는게 그녀 입버릇
이었으니 자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제부를 유혹했으며 곧이어 온화한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왠지
모르게 급사하고, 과부와 홀아비가 된 툴리아와 타르퀴니우스는 결혼했으니 세르비우스왕은 찬성
하지도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으니 상냥했던 딸의 죽음이 타격으로 우울증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은 왕위에 앉아 있었는데 왕위는 세습이 아니기 때문에, 왕의 딸이라도
반드시 다음번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툴리아는 남편의 마음에
불을 댕기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내가 생각한 그런 대장부라면, 당신을 남편으로 섬기고 남자로서도 존경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내 운명은 나빠질 뿐이예요. 왜 결단을 내리지 않는거예요? 코린트나 타르퀴니아
같은 타국에 나가서 행동하라는 건 결코 아니예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코린트나 타르퀴니아로 가버리면 돼요. 그리고 당신도 옛날 신분으로 돌아가면 돼요."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야망에 불이 붙은 타르퀴니우스는 우선 로마에 사는 에트루리아인들을 자기편
으로 끌어들였으니 이들은, 그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제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 로마의 초빙을 받고 왔다가 그대로 로마에 눌러앉은 사람들이니 원로원에서도 로마의
개발사업과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신흥계급의 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타르퀴니우스는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으니 출신도 확실하지 않은 자를
모시는 것은 로마의 수치라고.... 원로원 의원들은 타르퀴니우스의 말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쫓아내지도 않았는데 그때, 세르비우스 왕이 변고를 알고 달려왔으니 타르퀴니우스는 왕의
몸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원로원 출입구 계단 위에서 왕을 내던졌습니다.
세르비우스가 굴욕감을 씹으며 왕궁으로 돌아오자, 타르퀴니우스가 보낸 자객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세르비우스는 칼을 맞고 쓰러졌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는데...... 딸 툴리아가 모는 마차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버지를 덮쳤으니 이리하여 타르퀴니우스는 왕이 되었고, 툴리아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제7대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선왕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했으며 선왕파로 알려진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무장한 호위병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밖에도 나가지 않은 그는 민회에서의 선거도
원로원의 승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올랐으며 그후에도 줄곧 원로원에 조언을 청하지도
않았고, 민회에 찬반을 묻지도 않았으니 시민들은 뒤에서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라고 불렀습니다.
국내에서는 독재적 전제군주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거만한 타르퀴니우스)도 군사적 재능
은 뛰어났으니 주변 부족들과의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은 늘 로마쪽이었고 화친과 전쟁의
양면 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은 교묘했지만 음험하기도
했으니..... 국내에서 불안을 느끼는 지배자는 항상 대외관계를 확실하게 해두려고 애씁니다다.
타르퀴니우스는 첫 번째는 라틴족에게서 두번째는 에트루리아의 도시에서 상대를 찾았으니,
100년 전인 제4대 왕 안쿠스 시대부터 로마는 이웃 라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기는 동포였기 때문에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자연
스럽고 쉬운 일이기도 했으니 '라틴 동맹' 은 축제일을 함께 기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라틴족과 전투도 힘을 합쳐 치르는 일이 많아졌으니 처음 얼마 동안은 완전히 대등한 동맹
관계였지만 로마가 강성해지자 세력관계도 달라졌으니 함께 힘을 합쳐 전투를 치를 때에도, 병력
은 평등하지만 지휘는 로마쪽에서 맡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그래도 전리품은 평등하게 분배했습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라틴 동맹을 경신했으니 라틴족보다 훨씬 강력했던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여
동맹을 경신한 것인데 하지만 로마인들 중에는 에트루리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가 에트루리아한테 끌려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니 실제로 기원전 6세기
후반 무렵, 로마 안에서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은 전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습니다.
제5대 왕부터 시작해 제6대와 제7대 왕까지 잇따라 세 명이나 에트루리아계 왕이 나왔으니 후세
연구자들 중에는 이 시기의 로마가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로마 안에서는 막강했지만, 로마 밖에서는 이 시기를 고비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니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의 불운은 이 변화를 보지 못한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계속 후퇴하고 있는 에트루리아인들에게 그런 줄도 모르고 의지해 버린 것인데 급속히 발전한 민족은
쇠퇴할 때도 급속히 쇠퇴하니 한때는 네아폴리스(나폴리) 근처까지 세력을 넓혔던 에트루리아인은
100년도 지나기 전에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추문은 힘이 강할 때는 공격해 오지 않지만 약점이
드러나면 쳐들어 오니 그 추문이 당사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해도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왕의 아들 가운데 섹스투스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친척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짝사랑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으니 가슴속이 불처럼 뜨거워진 젊은이는 콜라티누스가 집을비운 밤에 사랑한
여인의 저택으로 갔는데... 시종은 한명도 거느리지 않았고, 콜라티누스와는 친척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루크레티아를 비롯한 콜라티누스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뜻이 환대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는
손님용 침실까지 마련해 주었으니 밤이 깊어 집안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섹스투스는 단검을 가슴에
품고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숨어들어가서는 단검을 들이대고 위협해 여자를 욕보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젊은이는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침대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남겨둔채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온 것으로 그날 밤, 루크레티아는 로마에 있는
아버지와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하인을 보냈으니 하인은 변고가 일어
났으니 믿을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급히 와 달라는 루크레티아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루크레티우스는 발레리우스를 데리고 달려왔고 남편인 콜라티누스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왔는데 침대에 앉은채 비탄에 잠겨 있던 루크레티아는 도착한
네 사람에게 사정을 설명한뒤, 숨겨 가지고 있던 은장도를 가슴에 꽂았으니 그녀는
괴롭게 숨을 몰아 쉬면서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수를 맹세시킨 다음 숨을 거두었습니다.
루크레티아의 유해는 로마로 운반되어, '포로 로마노' 의 연설대 위에 안치되었으니 시민들은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왕과 그 일족의 야만성과 오만함을 저마다 비난했으니.... 브루투스는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니 정숙하고 행실이 올바른 여자들이 두번 다시 이런 만행에 희생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타르퀴니우스왕이 선왕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임을 시민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왕과 그의 일가를 로마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하자 지금까지 로마인의 마음 속에
맺혀있던 타르퀴니우스에 대한 불만에 마침내 폭발했으니 브루투스의 제안에 커다란
함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한 민중은 민병대를 결성하자는 브루투스의 호소에도 열렬히
응했는데 이때 쯤에는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타르퀴니우스왕도 변고를 알았습니다.
왕은 당장 휘하 부대만 이끌고 로마로 돌아왔지만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으며
추방하기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이니 타르퀴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
들만 데리고 에트루리아의 도시 카이레를 찾아갔는데 왕비 툴리아는 이미 로마에서
달아났기 때문에 무사했고......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망명한 아버지와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원인이 된 셋째아들 섹스투스는 다른 도시로 도망쳤지만, 전에 그에게 모욕당한 적이 있는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의 치세는 25년 만에 끝났고 제7대 왕이었던 그와 함께
로마 왕정도 끝났으니 로물루스가 건국한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습니다.
그후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들어가는데 왕 처럼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종신제
인 왕의 시대가 끝나고, 임기가 1년 밖에 안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이니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체제라는 이유만으로 왕정
시대의 로마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는 할수 없습니다.
공동체도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편이 효율적이며 조직이 아직 여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는
것은 치명상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니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가 결정
하고앞장서서 실행하는 편이 효율적인데 로마의 일곱 왕의 역사를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등용한다는 원칙이 지나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 역사였습니다.
로마는 이런 위대한 왕들 덕택에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릴 수 있었으니 왕들이 모두 장수한
것도 다행이었는데, 왕들이 저마다 자신의 포부를 실행에 옮기고, 그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을 가질수 있었기 때문이니 그 덕에 왕이 바뀌어도 새 왕은 선왕의 업적 위에 안심
하고 새로운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사업의 중단이 초래하는 활력의 낭비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로마 왕정은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사명을 끝냈을 것이니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고 말할수도 있겠는데.... 5대 ~ 7대는 에트루리아계 왕이니 어떤 학자들은
로마인들이 이때 에트루리아인에게 지배를 받던 시기라고 말하는데, 에트루리아의 몰락과 함께 정치,
군사적 실패를 거듭하자 왕정에 대한 반발의식이 생기게 되어 공화정 체재로 변모하게 되었다고도 봅니다.
왕정체제가 초기로마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으니 권력집중형 통치의 최고 장점은 정책결정과 집행에
지체가 없다는 점이니 원로원이 존재하긴 했지만, 당시 입법권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조언자' 정도
역할이었기 때문에 과도한 정쟁을 피해 빠른 결정을 내릴수 있게되어 로마 발달에 일조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