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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주일/사제성소의 문제와 위기진단
" 많은 곳에서 사제와 축성생활에서 성소 부족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공동체 안에서 사도적 열정이 없어서 사람을 열광하게 하고 끌어들이는 힘이 식은 탓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다른 이에게 소개하려는 생활과 열정과 욕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된 성소가 일어날 것입니다.
유별나게 헌신적이거나 기쁘게 생활하지 않는 사제가 있는 본당에서도,
형제적 생활과 공동체의 열정은 젊은이가 하느님과 복음의 가르침에 자신을 봉헌하려는 열망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 같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끊임없이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공동체의 젊은이에게 특별한 축성의 길을 용감하게 제시한다면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사제직 지망자들에 대한
보다 나은 선발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그 동기가 특히 감정적 불안, 권력 추구, 인간적 명예, 혹은 경제적 풍요 따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 지망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기쁨 제 107항)
지난 몇 십 년 동안 교구 사제 성소와 남녀 수도회의 성소가 급감하고 있다. 이러한 사제, 수도자 성소의 급감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연구도 있다. 역사, 문화, 사회, 경제, 심리, 영성 등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 지망자들이 줄어들고, 요즈음에는 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질(質)의 문제까지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입학정원과 응시자, 합격자의 추이만 보더라도 현재 각 교구의 대신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분산된 신학교의 모습은 마치 한국천주교회의 분산과 고립을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한 신학교에 여러 교구가 함께 살아갈 때 생겨나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이 이제는 빛바랜 사진 속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교구 간의 사목 정보의 공유나, 친밀감과 유대, 소통과 협력 등의 공동의 일들과 주제들이 함께 모색되어지면 좋겠는데, 지금의 가톨릭교회는 교구 간에 담장을 쌓고 무엇인가를 교류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현재 각 교구가 가지고 있는 사제 성소의 문제와 양성의 문제, 사제직 수행 과정 중에 드러나는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신학교 운영에 대한 명백하고, 현실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사제보수교육, 사제평생교육에 대한 나름의 중장기적 프로그램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가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 진다.
성직을 지망하는 예비신학생들은 일정기간 예신모임(혹은 예비신학교)에 나오면서 자신의 성소에 대한 식별의 과정을 거친다. 담당 신학생이나 수도자들과의 월례 모임을 통해서 성소의 의지를 굳건하게 해 나가고, 성경과 신학, 교리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전수 받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비성직자 후보들은 성직 지원의 동기와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하는데, 구조나 콘텐츠가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열심한 교우들의 자녀이거나, 부모들의 열심으로 등을 밀려 나온 학생들 이라는 사실도 문제가 된다.
대부분의 예비신학생들이 뚜렷한 성직지원의 동기가 없고, 성적 또한 중간 이하인 경우가 많다. 부모들은 ‘수도권에 어지간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신학교나 가라’ 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신학교는 입학에 있어 입학수능점수가 상당히 낮아져 있기 때문이다.
교구 성소국에서는 그러한 학생들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특별과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웃지 못 할 일들도 생겨난다. 정보가 공개되고 공유되면서 이제 전국의 사제양성 가톨릭대학교 성소자에 대한 입학 성적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사제직이 공부를 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수학능력이 의심되는 경우들도 상당히 있다. 그래서 간혹 신학교 입학 우회로를 찾아 지방의 대학을 1-2년 다니던 중 편입학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는 학생들도 간혹 있다.
교회 내에서 그들이 받는 처우와 조건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고달픈 대학생들의 삶과 대조를 이룬다. 일반대학의 학생들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편의점 알바, 노동인력시장, 해외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 연수 참여 등 자주적인 삶의 지평들을 열어가려 노력하는데 반해, 신학생들은 주어진 시간에 일어나고, 미사하고, 공부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당에 가면 맛있는 식사가 마련되어 있고, 넓은 운동장과 자연, 도서관에는 넘쳐나는 국내외의 많은 책들이 즐비하다. 방학이 되어 본당에 돌아가면 학사님 대접을 받으며 어깨도 으쓱하다. 이미 양성시작부터 우리는 그들을 ‘귀족’아닌 상류에 편입하도록 방관한 것이다.
군에서도 ‘군종’이라는 이름으로 특혜를 받는다. 군종 성당에서 사무장으로 일을 하거나 편안한 보직으로 빠지게 되며 신자 간부들을 만나게 되면 ‘학사님’ 대접을 해준다. 이렇게 시작부터 준성직자 대우를 받게 되고, 수품 이후에는 계급이 급상승하게 된다. 물론 인사문제로 교구장의 눈치는 보게 되지만 웬만하면 ‘무소불위’의 자리가 본당신부의 자리이다. 특별한 스캔들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자리는 철저하게 지켜진다.
처음 사제가 되면 넘치는 의욕으로 여러 가지 사목적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보좌신부와 주임사제의 갈등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만들어 낸다. 특히 주임사제가 보좌신부에게 사목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범이 되지 못할 때 보좌신부는 갈등을 하게 되고, 더구나 청년들이나 교리교사들에 대한 운영을 함께하지 않고 주임의 결재를 득해야 하는 경우에 보좌는 무기력해진다. 이후 주임이 되어서도 ‘예전에 다 해 보았던 것이다. 어차피 일 해봐야 욕이나 먹는다, 튀면 안 된다’라는 관성화된 사고방식으로 사제들을 머뭇거리게 한다.
사제 독신규정의 한계로 사제 성소가 감소되는가에 대해 실천적이 토론들이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단순히 ‘독신’ 문제만이 아닌 복잡한 요인들이 사제성소의 감소를 불러오고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신학교 양성 과정이나, 교과과정 등이 많이 쇄신되고, 사목적인 과정, 영적 양성, 현장체험, 공동체 생활 등 바람직한 사목의 다양한 요소들이 신학교 교육에 반영되고 있지만 변화하는 사목환경에 적응하는 사제를 배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비 성소자들에게는 ‘부르심’ 받았다는 깊은 의식이 사제 성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이러한 부르심에 일찍 응답하여 신학교에 들어와 사제가 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렸을 때에 부르심을 느꼈지만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신학교 입학이나 수도회 입회를 미루다가 세상의 삶의 방식이나 일들이 만족스럽지 않아 신학교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이 되어 들어오는 경우들은 자기들이 소속된 본당 공동체의 권유나, 사목자의 권유, 깊은 종교적인 체험 등을 통하여 사제직이나 수도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이 모든 경우에 부르심과 응답에 있어 비록 그 내용은 각자 다르겠지만 성소자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고 여겨지는 부르심을 잘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것은 하느님의 목적과 교회 공동체의 요구에 일치하고 부응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사제로 서품되면 신분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나이와 무관하게 지역사회의 비중 있는 인사가 되어 오피니언 리더가 된다.
어느 날 그들에게는 생애주기에 따르는 어려운 시기가 찾아온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품되어 본당공동체 사목의 현장에 들어가는 시기가 되면 오랫동안 익숙했던 신학교를 떠나 낯설고 다양한 새로운 관계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규칙과 공동체, 지도교수를 떠나 본당 사제로서의 직무를 시작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과소평가되어 질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학원 생활에서 수많은 통제와 감시 가운데서 양성되어졌다. 가령 인터넷 사용 문제만 하더라도 사용시간과 장소, 운영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는데 신학교를 떠나 본당에 오게 되면 어느새 그런 제약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바로 갓 서품 된 사제들이 스스로 이러한 문제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없는 경우가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규칙과 규율에 묶여 자신을 통제하다 보니 자신을 강제하던 규칙과 규율의 감시망이 사라지자 스스로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거나 통제가 가능하지 않는 문제가 생겨 위기를 겪게 된다.
음주 문제만 하더라도, 신학교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여 마시지 못했던 술을 방학이나, 외출이면 마음껏 마시게 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후 이것은 계속해서 문제를 만들고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억압된 성이 자유롭게 분출되면서 익숙하지 않은 관계의 경험으로 나아가게 되어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갓 서품 받은 사제들은 그런 의미에서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때, 이에 대한 이해와 격려, 도움과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대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사제직의 두 번째 과정은 ‘중년(mid-life)’ 이라는 시기이다. 이른 바 중년의 위기, 투쟁과 성공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모두가 거쳐 가는 이 시기에 대해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사제 개인으로서는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기이다. 자신의 삶과 일, 그리고 인간됨을 차근히 살펴보는 단계, 남은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목표와 노력의 근본적인 방향이 전환 될 수도 있고, 다른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는 위험하고 모험적인 시기가 바로 중년이다. 이 기간에는 많은 이해와 도움이 필요한데, 동료사제들이나 그 장상들은 고통이 많은 이 시기와 관계되는 모든 일들에 민감하게 협력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경우에 중년의 사제들의 고민은 “왜 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할까? 왜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자신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일까?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인가?” 의미에 대한 혼돈과 신앙에 대한 혼란이 생겨난다. 인생의 나이는 영적 여정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이 시기에는 무엇인가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놓아두는 것으로 자신의 내밀한 영혼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실망을 통해서 우리를 비우시고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개인기도와 성무일도, 성체조배, 묵주기도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고 무관심해지고 불만이 그들을 압도한다. 신앙과 교회의 조직 안에서 중년은 멈추어 서는 시기인데,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으로 내세워 자기주장이 완강해지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사제의 의무에 충실하다고 생각하며, 주일 미사와 각종 성사집전에 열심히 했다는 것, 사제로서의 규칙에 충실했다는 것,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자만감은 오히려 자신을 더욱 완고하고 냉혹하게 만든다. 다른 사제들을 욕하고, 그들의 윤리적, 신앙적인 느슨함을 심판하며 자신이 사제 삶의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옹졸하고 편협한 냄새를 풍기는 원로들이 있다. 그들 마음의 경직성은 공동체에 상당히 위협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세 번째 위기는 은퇴할 때 직면하게 된다. 은퇴를 준비하는 사제들은 그 동안 해왔던 교회의 직무들(미사와 강론, 고해를 비롯한 각 종 성사집전 등)을 그만둔다는 사실로 매우 외롭고 우울한 미래를 생각한다. 은퇴 이후 시간이나 능력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그들은 그 동안 어디에서도 다가올 ‘혼자’라는 상황을 준비하지 못했고 교육받지 못했다.
1940-1950년대의 교회 안에서 사제 수도자의 독신생활의 종교적 의미는 분명했다. 교회는 완덕의 길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이런 특별한 삶의 양식을 권장했다. 사제, 수도자들의 독신생활, 즉 축성된 정결의 삶은 복음적 권고 중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실제로 성직자들에게 강요된(?) 독신 생활을 하게 하는 초기의 요소 중 하나는 가족이나 결혼에서 오는 요청들이 사목자가 하느님의 일에만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제, 수도자, 독신 생활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스러움과 성(性)이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의심을 갖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생겨난 가톨릭 신자생활의 쇄신은 사제 수도자 독신 생활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공의회가 혼인생활이 지닌 영성을 재확인함으로써 사제 수도자 독신생활을 예수님을 따르는 ‘보다 나은 방법’ 혹은 ‘보다 높은 지위에 불리웠다’는 초기의 이해가 도전 받게 되었다.
사제와 수도자로서 독신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무언가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곧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선택인 것이다. ‘결혼도 없고, 결혼하는 일도 없는’ 시대의 마지막 증거자로서 사제와 수도자는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강하고 성숙하고 돌볼 줄 아는 사제, 수도자, 독신 생활자를 안다는 것은 성적으로 학대를 받는 사람에게나 매춘에 빠져든 젊은이들에게나, 성을 만끽하면서도 여전히 삶이 지닌 다른 가치들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체험이 된다. 성에 미친 우리 사회 안에서 사제 수도자 독신생활이 지니는 종말론적이고 상징적인 가치는 한 번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분야이다.
문제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생활을 지켜보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사랑과 자비로움과 기쁨의 표시라고 보지 않는데 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여 그 나라에 걸 맞는 기쁨과 평화, 사랑과 자비로 삶을 증거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다수가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우며 삶의 활력도 없고,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며 지적하고 훈계하는 역할로서의 사목자와 수도자들로 인식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오래된 승려를 고승이라 부르고 그들의 덕망과 가르침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는 반면, 천주교회의 사제나 수도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고집스러워지고 관대함이나 포용 보다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질투심 강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말과 행동으로 편협한 영성생활에 들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뒷담화의 소재가 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사제직과 독신생활에 대한 연결에 관해서도 신학적인 논쟁들이 분분하다. 독신생활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도력의 핵심은 아니었음이 신약성서의 성서 연구 결과 솎아지고 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와 절친했던 다른 추종자들도 분명히 결혼 생활을 했다. 사목서간에서도 주교들이 혼인한 것으로 드러난다 (1디모 3,2, 12: 디도 3,6).
그러나 교회사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4세기에는 결혼한 사제들이 성교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되었으며, 점점 더 적은 수의 주교와 신부들이 결혼하게 되었고 급기야 12세기에 이르러 사제독신이 사제직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성서적, 교회사적 증거들을 통해 대부분의 신학들은 사제직무수행에 사제독신이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제독신은 가톨릭 사제직의 부분이 되었다. 서품을 받기 위해서는 서품예정자들은 사제독신의 조항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서품 전에 이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그러한 독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구 사제들과 신학생들 (물론 수도 사제들이나 수도회 신학생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중에 사제 독신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공허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 혼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기에 그들이 지닌 영적인 선물이나 개인적인 성격이 이런 삶의 양식을 뒷받침해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공적으로 약속한 사제 독신 서원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면서 용감하게 살아간다.
진보적인 가톨릭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은 사제 수도자 독신생활과 사제직 수행의 연결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수 백 년 이후에야 이루어진 사목적 전략의 하나였음을 잘 알고 있다. 혼인성사와 성품성사가 양립할 수 없다고 강조 되어진 지 800년 이후 1139년에야 비로소 사제들의 의무적인 독신조항이 공적인 교회법의 한 부분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보여주듯이 사제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은 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들 자신, 가톨릭 교회 공동체에 진중하게 물어야 한다. 사제, 수도자 독신의 공동체적 선익은 과연 무엇인가?
독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특혜와 존경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사제가 사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금기를 잘 지키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제적 실존을 본질에 맞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제란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제사장으로서 미사를 집전하고, 복음을 해설하며 강론하고, 공동체에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신자 공동체의 영적 선익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이다.
사제가 존경을 받고 존중 받는 것은 그러한 직무에 얼마나 충실하게 성실하게 임하고 있으며, 직에 걸맞게 노력하고 연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가 금욕을 하고 있는지, 어떤 특별한 수행을 하는지는 그의 삶의 향기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가톨릭프레스 편집국
첫댓글 사제란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제사장으로서 미사를 집전하고, 복음을 해설하며 강론하고, 공동체에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신자 공동체의 영적 선익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