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향이 날리면 / 이미옥
벚나무가 봄의 무게를 견디느라 바람에 휘청인다. 자잘한 꽃잎이 나무를 벗어나 아래로 떨어진다. 자동차 비상등을 켜고 계절이 오고 가는 거리를 보며 나른해질 즘 엄마가 차창을 두드린다. 까만 봉지를 든 채 차에 오른 엄마는 “옛날 맛이 안 나네.”라고 한다. 나이 들어 입맛이 변한 건지 오랜만에 해서 제대로 안 된 건지 모르겠다며 한참 푸념을 늘어놓는다.
며칠 전 엄마와 쑥을 캐러 갔다. 봄이 오면 길가에 푸릇하게 돋아나는 초록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틈에서 쑥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어린 시절, 봄은 산에서 진달래를 따서 씁쓸한 단맛을 보는 일로 시작되었다. 진달래로 화전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다 커서 알았다. 우리네 엄마들은 다들 바빠서 진분홍 꽃을 찹쌀 반죽 위에 곱게 올려서 부쳐 줄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이 알아서 잘 자라던 시절이었다.
여자아이들이 가장 많이 했던 봄맞이는 단연 나물 캐기였다. 학교가 끝나면 부리나케 칼과 바구니를 챙겨 누구네 논두렁에서 만나기로 한다. 비탈진 논두렁에 옹기종기 모여 까만 재와 검불을 뚫고 나온 여린 쑥을 서로 더 많이 캐려고 조잘거리는 것도 잊었다. 아직 찬기가 남은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쭈그려 앉았다 일어서면 어느새 친구들은 저만치 떨어져 있고 해는 붉은 꼬리를 드러낸 채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캘 때 푸릇하고 싱싱했던 쑥은 바구니 안에 시들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캐 온 쑥을 대부분 그냥 버렸다. 다듬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고. 가끔은 된장을 풀고 쑥국을 끓였다. 굴을 넣은 국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찬물에 살아난 쑥을 탈탈 털어 넣었다. 어렸을 때는 쑥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굴도 쑥향도 싫었다. 지금은 봄이 오면 꼭 쑥국을 끓인다. 엄마처럼. 엄마가 해 준 쑥 음식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쑥버무리였다. 찜기에 천을 깔고 밀가루에 버무린 쑥을 켜켜이 쌓아 찐다. 언니랑 내가 쑥을 많이 캐 오면 먹을 수 있었다. 쑥이 서로 밀가루에 엉겨 떡도 아닌 것이 오물거리면 설날에 먹던 쑥떡 맛이 났다. 엄마의 검정 봉지 안에 있는 것은 그 쑥버무리다.
벚꽃이 날리는 벤치에 앉아 엄마의 작품을 펼쳤다. 카페에 들러 사 온 커피와 대추차까지. 엄마는 내가 쑥버무리를 입에 넣을 때까지 맛이 없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맛있구만.”이라는 내 감상평에 살짝 안심했는지 대추차를 한 모금 마신다. 솔직히 엄마의 쑥버무리는 예전 맛이 아니었다. 밀가루를 너무 많이 넣어 퍽퍽했다. 커피를 들이켜야 넘어갔다. 요즘은 다들 쌀가루를 넣는데 예전에는 싼 밀가루를 넣었다. 엄마는 그 맛에 익숙한지 쑥버무리에는 밀가루를 넣어야 제맛이라고 했다. 예전만 못해도 은은한 쑥향이 좋아 연신 젓가락질을 했다. 엄마는 “그렇게 맛있냐?”며 한 젓가락 입에 넣는다. 둘이 먹어서 그런지 어제보다 더 맛있는 거 같다며 웃는다.
며칠 후에 돈 벌러 떠날 엄마가 교문 앞에 서 있다. 엄마 손을 잡고 신난 아이가 깡충거리며 걷는다. “엄마, 천지가 쑥인디 쑥버무리 좀 해 주고 가.” 엄마는 그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내내 그것이 마음에 걸린 엄마는 그 또래 아이만 보면 눈물이 났다. 그 후로 오랫동안 엄마는 쑥버무리만 하면 이 이야기를 한다. 오늘도.
쌉싸름하고 향긋한 봄이, 추억이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첫댓글 그림으로 그려지는 글이네요.
쑥국, 쑥버무리 완전 싫어하는 음식. 하하.
안녕히 주무세요.
저도 쑥국은 좋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답니다.
분위기는 다른데도 요즘 읽기 시작한 소설에 나오는 여자아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씩씩한 아이였으면 좋겠네요. 하하.
지금도 어머니께서 건강하셔서 쑥 버무리도 해 주시고 벤치에 앉아 차를 함께 드실 수 있음이 부럽습니다. 한 폭의 그림 같아요.
네, 실상은 그림 같지는 않지만요. 하하. 그래도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해 주신 개떡을 사무실 직원들이 너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봄이 되면 먹던 개떡도 이제는 상상속의 음식이 되어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개떡은 드라마 '몽실 언니'에서 처음 봤었는데 맛을 본 건 훨씬 지나서였어요. 쑥버무리도 개떡도 여전히 맛있는 걸 보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나 싶어요. 하하.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먹은 최고의 음식이었지요. 그때로 돌아가게끔 합니다. 글이 좋아요.
고맙습니다. 늘 칭찬해 주셔서 힘이 납니다.
어쩌면 타임머신을 부르는 글입니다. 엄마 가신지 서른해가 지났으나 쑥버무리 하던 손끝이며, 진달래꽃 한바구니 따와 맛보게 하던 따듯한 웃음이며. 매변 봄이 되면 내가 못하는 쑥버무리 그리워 떡 집에서 비스무레한 떡 사다가 그리움을 섞어 맛봅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댓글에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가 쑥버무리 잘 해 주셨는데...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글이네요.
아이들 위해 한번 도전해 보세요. 아이들이 싫어할지도...하하.
@이미옥 안 먹을겁니다.
'아이들이 알아서 잘 자라던 시절'
이 표현이 참 애려요.
저도 진달래 화전은 다 커서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하하.
너무 알아서 잘 자라 안으로 아픈 듯요... 고맙습니다. 댓글을 두 번씩이나..하하.
저도 밀가루 쑥버무리를 좋아합니다.
엄마와 오붓한 시간, 무지 부럽습니다.
한폭의 그림입니다.
입맛은 잘 변하질 않나 봐요. 하하. 고맙습니다.
아직도 엄마가 계셔서 쑥버무리해서 함께 나눌 수있는 행복한 시간 누리는 것 많이많이 부럽습니다.
건강하게 내 옆에 있는 걸로 이렇게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줄 알면... 저희 엄마 무척 기세등등 하실 듯요. 하하.
고맙습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에게 쑥버무리는 그리움이네오.
네, 쑥만큼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주는 풀(?)이 있을까 싶습니다.
쑥버무리에 엄마의 미안함과 고단함과 사랑이 다 들어 있군요.
저에게도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음식이 있어요. 쑥인절미
언젠가 제게도 쑥버무리가 엄마가 그리워지는 음식이 되겠네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쑥버무리 하면 엄마가 생각나고 소꿉 친구들도 그립습니다.
엄마는 하늘 나라에 계시고 같이 쑥 캐던 친구들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선생님 글 읽으면서 엣친구들을 떠올려봅니다.
저도 어릴 때 쑥 캐러 가던 생각이 납니다.
정월 대보름 전에 먹는 쑥이 약쑥이라고 하여 손을 호호 불면서도 캐러 다녔어요.
다른 점이라면 검불과 쑥이 반반이었지만 할머니가 그 어린 손으로 캔 것이 아깝다고 절대로 버리지 않았어요.
일일이 손질하여 뭐라도 만들었지요.
깔끔한 글만큼 여운도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