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1세의 분투
에드워드 1세와 벌인 로버트 브루스의 사투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여러차례 도주해야 했으며, 동생은 버웍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2살 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딸은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또한 로버트 브루스의 매제인 크리스토파 세톤은 덤프리스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후 잔인하게 사지절단 되었다. 다른 협력자들도 교수형으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내마저 적들의 손에 들어가 8년간 감금을 당했다. *1) 에드워드 1세는 적들에게 무자비한 인물이었고, 로버트 브루스는 도망치고 또 도망쳐 아일랜드 북쪽까지 달아나야 했다. *2)
유명한 거미의 일화는 이 무렵의 이야기일 것이다. 패배하고 지친 로버트 브루스는 처량한 모습으로 주저앉았고, 마음 속에는 절망감이 가득차 있었다.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계속해서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문득 눈에 보이던 거미는 수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미줄을 이어 자신의 집을 만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스코틀랜드의 왕에게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뭉클한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로버트 브루스가 계속된 고한을 이겨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에게 행운이 따라준 측면이 있다면, 바로 에드워드 1세의 사망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압박은 잉글랜드를 괴롭히고 있었기에, 에드워드 2세는 형식적인 원정을 이어나간 후 오래 지나지 않아 귀환하였다. 로버트 브루스로서는 한숨을 돌릴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로버트 브루스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1309년 3월 16일 그는 첫번째 의회를 개최하여 지배 체제를 안정화 시켰고, 그 사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반대 세력을 군사적으로 토벌하였다. 이 통합 전쟁은 1314년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1313년 1월의 퍼스 공격처럼 로버트 브루스는 스스로 해자를 건너 로프 사다리로 올라 야간공격을 시도하며 자신의 용맹함을 보인 적도 있었으며, 반대자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대신 아량을 베풀어 충성을 바치게 하기도 했으며, 정치적인 술책을 보이며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도 했다.
로버트 브루스의 공세 앞에 놓이게 된 스코틀랜드의 친 잉글랜드 파들은 믿을것이라곤 잉글랜드 왕의 군세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은 자연히 잉글랜드군과의 격돌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로버트 브루스는 적의 공격을 피해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로 대응하며 정면 대결을 피하였다. 그러나 라우던 힐에서 벌어진 싸움에서는 잉글랜드 군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말하자면 로버트 브루스는 다재다능한 전투를 치룰 줄 알았고, 그의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이제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급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잉글랜드 북부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1311년 8월 12일에는 솔웨이(Solway)를 건너 타인데일(Tynedale)을 침략하고 많은 소 떼를 전리품으로 끌고 왔으며, 같은 해 9월 8일에는 노섬벌랜드를 공격했고, 그 결과 지역 주민들은 1312년 2월 2,000파운드를 주며 휴전을 제의했다.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왕국의 의지와는 별개로 개별적인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로버트 브루스는 이를 통해 안정적인 식량과 자금의 유입 통로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경제적인 문제로만 따지자면 군사적 원정보다 구매한 휴전이 더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에게는 그것이 위신의 문제였고, 1315년부터 돈을 주고 휴전을 얻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 사이 로버트 브루스는 노섬버랜드에서 세번, 잉글랜드 서부 국경지대에서 네번의 구매된 휴전을 얻는 등 자금을 확충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자금들은 20,000파운드에서 40,000파운드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였다. *3)
이 자금들은 큰 비용이 소모되는 전쟁 자금을 메꾸어 주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로써 점차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요새로부터 그들을 몰아낸다는 전략 목표를 실현해 나가기 시작했다. 1312년까지 포스 강 북쪽 전 지역에서 퍼스와 던디의 요새만이 잉글랜드의 세력 하에 남아 있었다. 또한 1314년에 이르면, 스코틀랜드의 주요한 성으로서 잉글랜드의 손에 남아 있는것은 보스월 성과 스털링 성에 불과하였다.
이 시간 동안 에드워드 2세는 지속적으로 대귀족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2세라고 스코틀랜드의 공세를 등한시 한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론들에게 무장하고 버웍에 집결하여 하여 대비토록 했으나 그들은 왕의 명령 실천을 게을리하였고, 에드워드 2세가 직접 군사를 끌고 나서는것은 별 소득이 없었으며, 또한 내부적 문제로 인해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또한 그가 원정 비용을 모집하기 위해 귀족들이 참석할 의회를 소집하면, 국왕의 정적인 랭커스터 백은 이를 무시하고 토너먼트를 개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두문불출 하였다. 그 사이 잉글랜드의 무능력함과 의지박약에 절망한 스코틀랜드의 친 잉글랜드 파들은 직접 돈을 주고 평화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왕의 총신인 피에르 가베스통과 관련된 대립은 잉글랜드를 지리멸렬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베스통은 1312년 6월에 결국 처형되었으나, 이제 왕으로서의 위신 추락을 만회해야만 하게 된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굴복시키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1313년 12월 23일 그는 8명의 백작과 87명의 바론들에게 1314년 6월 10일까지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3월 9일 이후 인력과 물자의 이동을 위한 지시를 내렸다. 5월에는 식량수출이 금지되었고 군대물자를 수송할 말과 마차가 각 주에서 징발되었다. 이 와중에 랭커스터 백은 에드워드 2세의 소환 명령을 거부했다. 어찌되었던 전쟁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베넉번 전투
로버트 1세의 게릴라 전술로 잉글랜드가 장악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이 상실되는 사이에, 에드워드 2세는 기병, 장궁으로 무장된 보병과 잘 훈련된 궁병을 아일랜드, 웨일즈를 비롯한 각지에서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동원된 병력의 숫자는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잉글랜드의 원정군이 30만에 이른다고 주장 *4)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추산 규모는 20,000명 내외의 보병과 2,000 ~ 3,000명에 이르는 기병, 그리고 5,000여명의 장궁병으로 정도다. *5) 대략 2만 5천여명을 조금 웃도는 숫자였다. 랭커스터 백작에게 요구한 기병 동원이 거절 당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부대가 모였을 것이다.
버웍과 와크(Wark에 소집된 군대는 6월 17일과 18일 출발하여 6월 19일에는 에딘버러에 도착하였고, 22일간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그런 다음 전체 군대가 폴커크로부터 20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까지 행군하였다. 이에 맞서는 스코틀랜드 군은 6월 22일 4개의 여단 병력을 퇴각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토우드(Torwood)에 부대를 정렬시켰다. 그의 부대는 약 5,000여명에서 6,000여명 정도로, 잉글랜드 군 규모의 4분의 1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보병은 무장 상태에 있어서도 잉글랜드 군에게 상당히 뒤떨어진 편이었다. *6) 로버트 브루스는 토우드에서 다음 이동할 진지로 산림이 울창한 뉴 파크를 선택했다.
6월 23일, 에드워드 2세는 토우드에 도착하자마자 그 숲에 스코틀랜드 군대가 잠복하여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에 그는 기병대를 접근시켰는데, 머레이 백작인 토마스 란돌프는 이를 격퇴하였다. 스코틀랜드 군은 소규모 부대에게 맞는 게릴라 전법을 잘 구사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인 은폐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보병이 중심인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의 궁병이나 기병의 공격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유도하였다. 뉴 파크의 고지대는 나무와 숲으로 뒤덮혀 은폐에 적절한 땅이었다.
첫 번째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로버트 2세는 스털링 성 남쪽 2마일에 있는 뉴 파크의 고지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철군을 암시하는 대형으로 군대의 편제를 변형히켰다. 이 지역은 한쪽에서는 뉴 파크의 나무들로, 다른 쪽은 베넉번과 그 습지에 접한 땅의 협소한 도로로 접근해 오는 잉글랜드 군에게 불리한 지형 조건을 이루었다. 특히 기병이나 궁병의 공격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군을 보보 할수 있었고, 베넉번의 남쪽 강둑으로부터 잉글랜드 군이 접근하려 해도 이미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기병들의 말이 빠질만한 함정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앞선 기병들이 하나만 빠져도 뒤따르는 기병들은 혼란이 일어나 전열이 무너질 것이었다.
이때, 잉글랜드 기사인 헨리 보훈(Henry Boun)이 로버트 브루스를 발견하고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위기 일발이었으나, 위험에는 이미 단련될 대로 단련된 로버트 브루스는 오히려 그를 도끼로 때려 죽였다. 이 싸움은 숲 속에서 일어나 잉글랜드 군 주력 부대의 눈에는 띄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은 계속해서 진격하고 있었다.
이후 로버트 브루스는 머레이 백작에게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머레이 백작의 보병은 갑자기 잉글랜드의 로버트 클리퍼드가 인솔한 기병을 공격하려고 숲에서 나왔다. 기습 공격에 혼비백산한 잉글랜드 기병들 일부는 스털링 성으로 도피했고, 일부는 주력군이 있는 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진짜 전투는 다음 날 벌어졌다.
에드워드 2세는 궁병과 창병으로 구성된 병력을 이용해 스코틀랜드군을 숲 밖으로 몰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의 실트론은 숲과 슾지의 좁은 공간에서 잉글랜드 궁병들을 무력화 시켰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수차례 절망을 안겨 주었던 잉글랜드의 기병들은 대역습에 유리한 굳건한 땅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군이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1세는 고슴도치 모양의 편대를 기본적인 전술형태로 잡은 뒤, 이 방어적인 대형을 되려 이동 충자와 같은 공격적인 요소로 사용했다. 잉글랜드 군의 눈에 느릿느릿 진군하는 스코틀랜드 인이 보였고, 이 모습을 본 에드워드 2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스코틀랜드인들이 싸우려고 하는 것이냐?" 고 말했다. 그로서는 훨씬 숫자가 부족한 스코틀랜드 군이 대격전을 치루려 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생각없는 진격이 아니었다. 전투가 치뤄지는 길은 방해물도 많고 좁았기 때문에 후미의 부대는 그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먼저 스코틀랜드 군에 달려든 글로스터 백작의 선봉대는 실트론을 뚫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대형이 무너졌으며, 좁은 길에서 기병이 저지당하자 후미의 잉글랜드 군은 싸움을 도울 방법이 없었고, 남은 방법은 그저 도망가는 것 밖에 없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군은 기세를 타서 적을 강하게 압박했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스코틀랜드의 궁수들은 형편에 맞게 즉각 대처해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해 내었다. *7)
마침내 잉글랜드 군이 지리멸렬하게 패퇴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스털링 성으로 도망치고, 다수가 포스 강에 빠져 익사하였으며, 또 다른 자들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은 베넉번 강에서 익사하였다. 에드워드 2세는 처음에는 스털링 성으로 도피하였다가, 이후 다시 도망을 쳤고 스코틀랜드 군은 60여명의 기병과 함께 맹렬히 그를 추격하였다. 에드워드 2세는 쉬지 않고 도망친 후에야 전쟁터에서 60마일 떨어진 던바 성에 도착했고, 바다를 통해 간신히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제 지난 600년 만에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군주는 국경 북쪽에서 대패를 당하였다. 포로 협상을 통해 로버트 브루스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기사 42명은 참살되었고 60여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700명의 에스콰이어 역시 전쟁터에서 쓰러졌다. 스코틀랜드 군이 획득한 전리품은 마차 행렬이 20마일에 이르렀고, 물품의 가치는 200,000파운트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왕의 옥쇄마저 스코틀랜드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로버트 브루스는 잉글랜드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그 물건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8)
마침내 스코틀랜드 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스스로의 멍에를 던져내었다. 혹자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영웅 서사시처럼 용감히 싸웠고, 스코틀랜드인 답게 싸워서 마침내 그들의 자유를 쟁취했다
*1)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의 일행을 당국에 알리지 않는 인물도 처벌하였다. ─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65 ~ 166
*2) 로버트 1세의 가족이 머문 성의 대장장이는 황금에 눈이 멀어 모든것을 실토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병사들은 대장장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용해된 금을 부었다. ─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44
*3)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71 ~ 172
*4) Scotichronicon, vi, p. 351
*5)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89
*6) Vita Edwardi Ⅱ, p. 52
*7) 김현수, 왕실 스코틀랜드 : 영국사 pp.48
*8) *5) 홍성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운동의 역사적 기원 pp. 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