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의 동행
백인덕
저녁 안개를 만났다.
두 눈 다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에서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내 살 속과 뼈 밑, 등 뒤 부푼 종기에서 게워내는
피고름 안개를 만났고
어색하게 웃으며 나란히 걸었다.
가끔 서로를 확인하듯 아무렇게나 때를 묻혀주고
더러운 손을 마주 잡았다.
깊고 따뜻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 고통은 이미 앞선 어디쯤
깊이 땅을 파헤쳐 두고 기다리리라, 내 헛발이 그의
침묵의 집에 들어서기를. 그러나 나는 피해갈 수
있을까, 유보한다는 것일까?
나는 즐거워져 발밑 쓸려가는 바람을 흉내 낸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안개와의 긴장은 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으슥한 여고 뒷담장 끝 불 꺼진 약국 앞에
기어이 멈춰 섰을 때, 한 번도
온전한 나를 비춰주지 않았던 안개의 속 한 벽이
환히 밝아지며
네 것 아닌 고통마저 사랑해봐!
오늘도 나는 갈 수 없는 언덕과 숲, 지형이 바뀐
강변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돌아와야만 했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 등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현재 계간 리토피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