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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번데기, 그리고 곡옥
C자형 곡옥은 인간의 태아나 번데기를 형상화한 것
장수와 사후 환생을 기원한 장신구로
옥
귀한 유라시아선 멧돼지 이빨 사용
필자 나이의 독자라면 어렸을 적에 먹던 번데기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린 필자도 집에 빈 병이 없을 땐 어머니 몰래 부엌의 간장병을 번데기와 바꿔먹고 혼났던 적이 있다.
난데없이 웬 번데기 얘기인지 의아히 여길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곡옥(曲玉)과 연관이
있다.
필자가 유학하면서 의형제처럼 지냈던 중국 고고학 전문가 세르게이 알킨 씨가 하루는 나한테 물었다.
"책을 보니 한국사람들은 비단벌레의 유충을 삶아먹는다는 데 진짜인가?"
그는 내가 한참 들려준 번데기 이야기를 듣고는 밥맛이 떨어져서 점심값을 벌게 됐다는 농담과 함께 자신의
연구를 소개했다.
이 곡옥은 곤충의 유충을 나타내는 동시에 복중의 태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명의 탄생과 부활을 뜻한다는
것이다.
곡옥은 우리나라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는 C자형으로 가공한 옥이,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 때에 널리 발견된다.
일왕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삼종의 신기인 검·경·옥(劍·鏡·玉) 중에 옥은 바로 곡옥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또 삼국시대에 내려와서도 곡옥은 널리 쓰여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라의 금관에도 곡옥이 달려있다.
한편 옥이 귀한 알타이와 같이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멧돼지 이빨이 많이 쓰였는데,
이것도 곡옥 사례와 비슷한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약간 형태를 달리하지만, 중국 각지에서도 곡옥이 발견된다.
만주지역에서는 5000~6000년 전의 신석기시대에 이미 곡옥형태의 옥제 장신구가 나오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돼지 같은 용(猪龍·저룡)또는 옥으로 만든 용(玉龍·옥룡)이라고 하여 용의 기원이라고 생각
한다. 중원지역에서도 C자형의 용 같은 옥기가 상·주나라 때에 흔히 발견된다.
그렇다면 C자형은 무슨 의미일까?
인간이나 다른 척추동물의 태아 모양은 거의 같다. 마치 C자처럼 굽어져 있는 모습이다.
과거 시베리아와 극동의 원주민들은 나무에 달려있는 곤충의 유충(번데기)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변태해서 날아가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충→ 알→ 유충→성충으로 이어지는 곤충의 끊임없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번데기를 형상화한 곡옥이 목걸이
와 같은 장신구로 사용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덤에 이런 장신구를 부장하는 것은 죽은 이가 다시 환생하기를 바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신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왕관에서도 비단벌레의 날개를 붙여서 장식한 사례가 최근 확인되었는데,
혹시 같은 의미는 아니었는지. 곤
충의 유충은 음식을 귀하기 힘든 봄철에 쉽게 얻을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이어서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각종
번데기를 먹었다고 한다.
중국은 최근 만주지역의 신석기시대, 특히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옥제 C형 장신구를 중국 문화를
상징하는 용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곡옥은 비단 중국뿐 아니라 시베리아,극동 그리고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있었던
세계관과 사후관에 대한 반영인 것이다.
홍산문화의 곡옥형태의 장신구 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2004년 10월에 이청규 서영수 박경철 교수님들과 고조선사연구회에서는 요령지역 답사를 갔었다.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우하량 전시관의 관장인 주달(柱達)선생은 '음주에 통달한' 주달(酒達)인가 싶을
정도로 두주불사로 소문난 분이다.
그런데 술 먹고 기분이 좋으면 발굴된 옥제 유물 중 진귀한 것을 보여준다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었다.
유적답사가 끝나고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건만 주달 선생은 술 한 잔을 걸치자고 제안하셨다.
답사팀 중에서 그나마 젊으니 낮술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중국어도 된다는 죄로 필자가 술상무로 불려갔다.
결국 주달 선생 옆에 앉아 50도 가까운 배갈을 컵에 따라 마시는 고행을 자처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주달 선생도 얼큰하게 취했을 즈음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우하량에서 출토된 옥제품 중에는 좋은 것이 많다면서요? 우리도 한 번 볼 수 있는 영광을…."
그러자 주달 선생의 심드렁한 대답. "허허, 우하량 옥제품을 특별전시회 한다고 해서 다 심양으로 보냈답니다.
술이나 한 잔 더 하시오, 젊은 양반! " 이때 심양에 보냈다는 옥제품은 2006년 5월 30일 개막한 요하문명전
에서 볼 수 있었는데, 전시창 넘어 자리잡고 있는 C자형의 옥룡에서 그때 우하량에서 마셨던 배갈의 구수한
누룩 향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17> 아무르강 여진족의 고구려계 불상
발해 영향받은 여진문화, 샤먼무덤 속 6.9㎝ 불상이 증거
중·러 국경 아무르강 유역 꼬르사꼬프 고분군에서 고구려계 약사여래상 발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강은 4400㎞에 이르는, 세계 8대강 중 하나로 극동지역 고대문화의
요람이기도 하다.
검은 용이 기어가는 듯 하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고도 불리는 이 강은 유장한 흐름 때문인지 자주
섬들이 생겨나고 육지에 붙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로 생기는 새로운 지형을 가지고 분쟁을 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니, 중국과 소련은 아무르강의
여러 섬 때문에 수십년간을 다퉈왔다.
아무르강으로 흐르는 우수리강의 작은 섬인 다만스키섬(珍寶島)을 두고 1969년에 중·소 전쟁이 일어난 것은
유명하다.
또 중국과 인접한 하바로프스크 주변에 있는 우스리스크 섬도 국경분쟁의 주요 원인중 하나였다.
2004년 10월에 타결된 협정에 의해서 러시아는 다만스키섬에 이어서 우스리스크섬 일대 174㎢를 중국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로 양분될 이 우스리스크 섬에는 극동 최대의 여진족 고분이 조사되었고,
거기서 고구려계 또는 발해계로 추정되는 조그만
금동불상이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꼬르사꼬프 고분군이라고 불리우는데, 광활한 우스리스크섬의 북서쪽 약간 높은 언덕에 1㎞가
넘는 강가를 따라서 분포한다.
1976년부터 16번에 걸쳐서 메드베데프 박사에 의해 발굴된 이 유적에서는 7~11세기 여진족의 토광묘
379기가
발굴되었다. 극동에서 발굴된 중세시대 무덤유적 중 가장 대형인 셈이다.
여진족 하면 생여진과 숙여진으로 나뉘고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 동북지방 변경에 있었던 사람들로 잘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한참 북쪽인 아무르강 유역에서도 이들의 문화가 발견되었다.
물론, 아무르강 유역의 여진문화는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된 것이다.
8~9세기에 발해가 번성하여 그 세력이 북쪽 아무르 지역까지 미치자 여진족은 발해의 선진 문화에 자극
받아서 여진문화를 발달시켰고, 이후 발해가 망하면서 남하해서 고려와 대치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여진족의 발달과정에서 발해나 고려와의 접촉은 필수적이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번에 소개
하는 불상 이외에도 성 쌓는 법, 토기 제작, 철제 무기 등 여러 방면에서 발해와 고려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불상은 꼬르사꼬프유적 중 무덤 112호에서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주인공은 노년의 여성으로 청동제
허리띠 장식과 목걸이 등 다양한 의례에 쓰이는 유물이 함께 부장되었다.
아마도 당시 여진 사회에서 의례를 담당했던 샤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북쪽에서 발굴된 고구려 계통 불상이다.
이 불상은 6.9㎝의 작은 크기로 얼굴은 갸름하고 온화한 표정이다. 이마 위에는 결발(結髮)이 표현되었다.
몸에는 늘어지는 가사를 걸쳤으며 왼손에는 단지를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상으로 추정된다.
발 밑에는 사다리꼴로 대좌가 있고 조그만 돌기가 있어서 원래는 제단같은 데에 꽂았던 것 같다.
극동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믿었던 발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샤먼을 신앙한 탓에 불교 관련
유물은 거의 없다.
이 불상이 묻힌 고분은 서기 10세기 경으로, 주변지역에서 이 당시 불교를 숭배했던 사람들로는 남쪽의
발해가 유일하다.
게다가 불상의 형식도 고구려계통에 가까운 편이니 발해지역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그런데 정작 무덤의 주인공은 샤먼이었다는게 흥미롭다.
아마도 더 많은 신력을 받기 위해 의례도구로 불상도 같이 쓴 게 아닐까 생각된다.
무덤에 허리띠며 방울같은 무속도구가 같이 출토되었는데, 아마 이 불상도 그런 치레도구 중에 하나로 걸려
있었던지, 아니면 지팡이 같은 것에 꽂아서 의식의 도구로 사용했을 것 같다.
지금도 무속인들 중에는 성모마리아 상이나 불상을 모셔놓는 분들이 꽤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듯하다.
또 꼬르사꼬프 175호고분에서 장방형의 금속판으로 된 허리띠 장식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에는 동그랗게
튀어나온 눈을 가진 귀문(鬼文)이 새겨져있다.
이런 형태의 귀문은 신라의 기와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물론, 기와와 허리띠 장식은 서로 기능이 다르니 섣불리 문화교류의 증거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중세시대 한반도와 극동지역간의 문화교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예라고 하겠다.
<18> 무덤이 없는 사람들
화장·조장·육탈… 발해의 말갈인 매장법도 가지가지
같은 묘지 속에도 다른 형태로 매장
혹독한 추위에 맞선 그들만의 방식인듯
필자는 1996년 서부 시베리아의 사르가트문화(기원전 7~3세기) 고분을 발굴한 적이 있었다.
필자를 포함해서 8명이 달려들어서 직경 18m, 높이 2m인 봉분을 순전히 삽으로만 제거하고 무덤 구덩이를
열자 목곽 안에서 5, 6인의 뼈가 한데 고스란히 모아져있었다.
육탈된 후에 뼈를 한 군데로 모아서 무덤 내 곳곳에 둔 것이다. 그런데 무덤의 한쪽 벽을 정리하다보니 가장
자리 바닥에 온전한 팔 1개가 발견되었다.
아마도 무덤에 시신을 넣어서 뼈를 고스란히 육탈시키고 다시 파내어 무덤바닥에서 정리할 때에 깜빡 잊고
한쪽 팔을 놔둔 모양이다.
놀라운 광경에 잠시 꽃삽을 놓고 한동안 사람의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깊은 상념에 빠진 적이 있다.
이런 얘기를 지인들에게 하면 시베리아 동토의 땅에서 벌목공도 아니고
도굴꾼이 되었냐고 놀리곤 한다.
고고학을 한다면서 고작 남의 무덤이나 파고 다니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무덤은 과거 사회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타임캡슐이다.
사자에 대한 아쉬움과 자신들의 종교생활, 물질문화가 함축적으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무덤이 거의 발견되지 않거나 반대로 다양한 장법이 같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연해주 지역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1000여 년 동안에는 무덤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해의 기층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극동지역의 원주민인 말갈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신을
매장했다.
아무르강 중류의 뜨로이츠꼬예 유적은 수백 여 기의 말갈무덤이 발굴된 일종의 공동묘지이다.
기본적으로 목관을 배치하고 그 안에 시신을 넣으면서 여러 가지 부장품을 같이 묻었다.
보통 장례에는 터부도 많고 여러 가지 신앙이 반영돼 한 집단 내에서는 하나의 무덤 만드는 방법이 고수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뜨로이츠꼬예 유적에서는 참 다양한 무덤이 사용되었다.
같은 묘지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냥 묻고 어떤 사람은 화장하거나 살을 육탈시키고 뼈만 따로 모아서 매장
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시신을 자작나무 껍질로 둘둘 말아서 묻기도 했다.
심지어는 같은 무덤구덩이 안에 합장한 묘에서 한 시신은 화장해서 뼈만 모아서, 다른
시신은 온전히 묻었다.
하나의 공동묘지에서 다양한 무덤이 나오는 아무르지역 말갈문화의 특징은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하는 이
지역의 특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하 30~40도를 오가는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맨 땅에 무덤을 판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테니 혹시
겨울에 세상을 뜬 사람들은 육탈시키고 다음해 봄이나 여름에 매장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화장도 무덤 구덩이 안에서 했는데, 상식적으로 장작불만 지펴서는 요즘 같이 완전히 뼈만 남도록 화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시신을 불로 정화한다는 의미로 한 듯 싶다. 심지어는 아예 무덤이 없는 경우도 있다.
현재 러시아 극동에 거주하는 에벤키(퉁구스)족은 사람이 죽으면 나무 위에 관을 만들어서 육탈시키는 풍장을
한다. 또 추코트카의 원주민 중에서는 시체를 잘게 쪼개서 새에게 주는 조장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무덤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후대의 고고학자들로서는 이렇게 무덤을 만들지 않았던 시기를 밝히기는 결코 쉽지 않아 미싱링크가 생기게
된다.
이래저래 무덤들을 연구하다보면 죽은 뒤의 자리 마련에 시간과 자본을 쓰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자. 저승에서 안식을 얻고자 수십 년 동안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든 파라오는 무덤이
발굴돼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었고, 피라미드를 짓다가 조용히 세상을 뜬 인부들은 자연 속에서 조용히 안식을
취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중요한 고고학 자료를 제공한 공로는 크지만, 본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 호화묘지에 봉분을 하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고 신문에 나기도 하는데, 지나치게 큰 무덤들은
몇 천년 뒤에 발굴되어서 유물은 박물관에 진열되고 유골은 박물관 지하창고에서 곰팡이들과 세월을 보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면 우리같은 서민은 조금 맘 편해질지 모르겠다.
사람 인생은 관 뚜껑 덮을 때까지 모른다는 말을 흔히 한다.
무덤을 파다보니 한마디 덧붙이고 싶어진다. '사람 인생은 관 뚜껑 덮어야 알고, 관 뚜껑 덮어놓고 보면 다
똑같다'라고. Memento mori, Carpe diem.
<19> 잃어버린 우리의 땅 - 녹둔도
이순신 장군도 한때 주둔 … 한·러 국경 심도 있는 연구를
독도문제로 다시 시끄러워지고 있는데, 한-러 국경인 두만강 어구에도 비슷한 운명의 섬이 있었다.
한국과 러시아가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무능한 중국의 황제덕(?)이었다.
1860년도에 현재 하북성의 승덕에 위치한 피서산장에서 북경조약을 맺으며 러-중의 국경을 우수리강으로
했고 그 결과 중국은 태평양으로 나가는 바닷길이 막히게 되었고, 러시아 영토는 마치 꼬리처럼 길게 남쪽
으로 이어져 한국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좁고 긴 땅 때문에 바다로 나갈 길이 막힌 중국으로서는 아쉬워할 일이었고, 만주국 시절에는
일본 관동군과 소비에트 적군 사이에는 이 땅을 놓고 대량의 군인이 희생된 하싼분쟁(장고봉사건)이 일어나
기도 했다.
한편, 중국과 러시아의 조약이 맺어지면서 두만강 유역의 끝자락 조선시대 우리의 영토였던 녹둔도도 같이
러시아의 영토로 포함되었다.
이 섬은 조선시대에 이순신 장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옛 기록에는 그 지리를 잘 모르고 두만강 하구의 작은 땅으로 표시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여의도 몇 배 크기의
엄청난 크기의 땅이다.
조선시대까지는 한국 쪽에 속하던 땅이었으나 두만강의 본류가 좀 더 남쪽으로 흘러서 녹둔도는 러시아측
으로 붙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대한제국 시절 고종도 실제 조사하고 국경을 명확히 하라고 지시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섬하나에 제대로 신경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고, 그냥 러시아의 영토로 바뀌
었다.
현재 녹둔도는 수슬로바 반도와 몇몇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저지대로 이루어져서 사람이 거주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아마 조선시대 조선인들은 언덕배기나 산 밑의 구릉지대에 근거해서 성을 쌓고 살았을 것 같다.
해수면이 조금만 높아도 저지대는 물로 차서 섬처럼 되었을 테니 섬을 뜻하는 녹둔도라 불리웠던 것 같다.
실제로 답사해보니 녹둔도는 멀리서보면 마치 사슴이 앉아있는 모습이라
현지의 고려인들은 '사슴의 엉덩이'라는 뜻으로 녹둔도라고
했단다.
필자는 작년 8월에 동북아역사재단의 김은국 박사와 함께 현지 끄라스끼노 마을에서 사업을 하는 오명환
사장의 도움으로 당시 조선인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비석을 조사한 적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주인공인 김인흡은 19세기 말에 살았던 사람으로 6대째 이 지역에서 거주하며 제법 큰
벼슬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의 밤섬같이 때때로 살던 곳이 아니라 어엿하게 큰 마을이었던 것
같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점은 거대한 영토의 러시아 마저도 1950년대부터 한-러 국경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해왔다는 점이다.
시베리아 고고학의 아버지인 오클라드니코프와 일련의 고고학자들은 녹둔도를 포함한 피터대제만과 주변
지역을 샅샅이 조사해서 유적들을 발굴하고 조사했다.
한-러 국경지역은 연해주 내에서 가장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꼽힌다.
현재에도 이 지역은 보이스만 패총이나 얀콥스키문화와 같은 한반도 고대문화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빗살문토기, 청동기시대 공렬토기나 돌대문토기, 석검, 패총 등 이 지역은 지금은 우리가 가 볼
수 없는 북한의 자료와 비교연구할 자료들이 산재해있다.
현재 대부분의 연해주지역 고고학조사가 발해에만 치중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녹둔도를 포함한 한-러 국경지역 일대는 바다와 강이 모여드는 지역으로 해안선이 복잡해서 다양한 패각류와
어족자원이 풍부해서 선사시대 이래로 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예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여진과 대치했었으니 샅샅이 조사한다면 조선시대 북방과의
관계를 밝히는 중세고고학의 자료가 나올 수 있다.
녹둔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수슬로바 반도의 끝에는 중세시대의 성이 아주 뚜렷이 남아있다고 지도에 표시
되어있다.
작년에 시간과 연구비의 한계로 그 지역을 자세히 조사해보지는 못했지만, 향후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빨리 흥분하고 곧 잊어버리는 한국사람의 특성은 월드컵같은 놀라운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주변국과 복잡하게 얽혀져있는 국경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하지 않을까?
<20> 수천년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비너스상
몽골인종 특징 그대로 간직한 신석기시대 여인상
튀어나온 광대뼈 낮은 코 찢어진 눈 그 시대의 전형인 극동 미녀상
선사시대 한반도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에 유독 인물상과 같은 예술품이 적은 편이다.
초기 철기시대의 잔무늬거울이나 청동기 유물에는 사실적인 그림보다는 태양이나 빛을 표현한 기하학 무늬가
주류를 이루었고, 신석기시대에도 빗살문을 사용했다.
마치 아랍사람들이 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아라베스크라는 독특한 추상적인 문양을 사용한
것처럼 우리 선조들도 구체적인 표현보다는 추상적인 무늬를 선호했었던 것 같다.
신석기시대의 예술세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토제인형은 울산 세죽이나 함북 서포항 등에서 발견된 적도
있지만, 그 예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과연 동북아시아에서 선사시대 대지의 여신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극동지역에서는 아무르강 유역서 발견된 여신상이 있다. 앞선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던 러시아의 고고학자인
오클라드니코프는 1960년대에 아무르강 중류의 콘돈 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을 발굴했다.
이 유적에서는 '아무르망상문'이라고 하는 마치 물고기그물 같은 문양을 동체에 새긴 토기를 비롯해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크기가 15㎝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여신상이었다.
진흙을 빚어서 여성의 상반부를 표현했다.
소박한 듯하면서 전체 몸의 특징이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넓적하니 큰 편이고 턱은 작게 오므려서 마무리되었다. 눈은 마치 웃고 있는 듯 서글서글하다.
자그마한 턱 때문인지 광대뼈는 볼록하니 튀어나왔고 코도 나지막하게 표현되었다. 옆으로 쭉 찢어진 눈매,
낮은 코, 그리고 넓은 이마에 광대뼈까지 누가 봐도 전형적인 북방계 몽골인종이다. 널찍한 이마는 뒤로 경사
지게 깎여 마치 모자를 쓴 채 목을 길게 내민 모습 같기도 하고 이마를 납작하게 누른 편두같기도 하다.
이 유물은 기원전 4000~5000년 전에 발견된 것이니 극동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여신상이다.
콘돈 출토 여신상 이외에 극동지역의 신석기시대에는 여러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작고 찢어진 눈에
넓적한 얼굴이 공통점이다. 아마 당시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미인형이었을 것이다.
더우기 놀라운 것은 이런 특징이 지금까지도 동북아시아 전역의 몽골인종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극동 원주민인 나나이나 울치족의 여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몽골에서도 보인다.
필자는 얼마 전 러시아에서 러시아-몽골-독일의 합작영화인 칭기즈칸의 '몽골'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여기에서 칭기즈칸의 배우자인 보르테로 나오는, 강한 여성상을 대표하는 역을 맡았던 배우 훌란 출룬의
이미지가 극동의 여신상과 정말 흡사해서 놀랐었다.
극동의 신석기시대에는 다소 해학적인 모습의 인물들이 새겨진 토기도 발견된 바 있다.
기원전 3000~2000년경에 아무르 지역에 분포한 후기 신석기시대인 보즈네세보문화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형태의 토우가 극동지역의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물방울 같이 커다란 눈망울에 하트형 이마, 그리고 기다란 목이 표현되었다. 얼핏 보면 SF영화에 나오는
우주인 같다. 게다가 손은 마치 개구리 같은 양서류의 물갈퀴를 닮았다.
아마 보즈네세보문화 토기의 '우주인'은 실제 사람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개구리나 여러 동물의 특징을
한데 나타낸 일종의 수호신이나 정령같은 것이 아니었을까한다.
콘돈문화에서 발견된 비너스상과 같이 토기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와 얼굴 모습 모두 최근까지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나나이족의 전통적인 문양이나 얼굴 형태와 유사하다. 수천 년을 극동지역에서 살아
왔던 우리 이웃들의 모습인 것이다.
요즘 같으면 콤플렉스깨나 느낄법한 그 얼굴이야말로 동북아시아의 각지에서 삶을 영위하던 우리들의
선조의 모습이다.
필자가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에서 강의할 때 당시 인기 있었던 사극과 영화들을 수업시간에
보여준 적이 있다.
학생들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달리 '왜 조선시대 사극인데 탤런트들은 모두 혼혈계통인가?'였다.
전통사극이라기에 화보나 옛 사진에서 봤던 조선시대 전통적인 모습들을 기대했는데 많이 실망한 모양이다.
여성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서구적 미모를 선호하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는 게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수천년 후에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한국을 발굴해서 잡지나 영상자료들을 본다면 21세기에 한국은
서구문화의 도입과 함께 대폭적인 인종의 교체가 있었다고 오해하지는 않을지.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