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옥터
상주에 있는 옥터성지는
안동교구 첫번째 복자인 박상근 마티아 (1837~1867)가 순교한 감옥터다.
1867년 1월 이곳 상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상주, 문경, 보은, 충북 영동, 제천지역에서 체포되었던 천주교 신자들이
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 순교하였는데,
상주 옥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성첩, 문루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한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복자로 시복되었다.
상주 신앙 고백비
경북 상주시 청리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 석간산(石壇山)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 고백비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군에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 (徐光修) 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 김씨 집안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2년)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10년을 넘어섰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됐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 천주 성교회 성호 십자가 (十字嘉는 十字架의 오자)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神夫는 神父의 오자)
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敎于는 敎友의 오자)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癸卯生本(古)盆城(今 · 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 金氏
* 고백비의 역사적 유래 *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악랄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66년 한불 수호 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石壇山) 아래 높이 127센티미터,
폭 39cm, 두께 22cm, 두께 22cm의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를 건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