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김기균, 34세. 김재관 35세. 김용구, 39세. 김기봉, 40세.
김직순, 36세. 김영업, 37세. 김익수, 38세. 김용욱, 39세.
.광무 8년(1904)에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니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독점권을 장악하였다.
일제는 걸림 돌이 없이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광무 9년(1905년) 11월, 조약체결을 위해 이토히로부미를
한국에 파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조약에 반대하는 여론이 강해지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대신들을 협박하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겼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지사들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거나 자결도 불사 하였다.
을사 5조약이 체결된 후에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장지연의 한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명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김기균(箕均, 34세)은
한말 대한제국의 육군부위로 면암 최익현이
호남지방에 내려와 창의하였다.
그 막하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창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세 부족으로 최익현은 대마도로 잡혀갔고,
공은 총상으로 잡혀 옥고를 치루었다.
김재관, 35세. (1888~1958 양간‧전리공파)
전북 고창군 고수면 월계리.
1905년 최면암의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 1908년 기삼연 등의 호남 의병 창의대와 합동으로
고창 전투에서 5~6차례 전투를 치렀다.
‧ 1913년 경술국치 후 새로 조직한 독립 의군부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관 직책으로 첩보활동에 종사하였다.
‧ 고종 황제 인산(因山)때 고창에 망월대를 축조하여 2년 복을 마쳤다.
‧ 1980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
김용구(容九, 39세)는
융희1년(1907)에 기산연과 함께 전라도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 회명소의 통령이 되었다.
장성, 영광, 고창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다.
흥덕 안치 싸움에서 크게 이겼으나,
아들 김기봉(起鳳, 40세)을 잃었다.
김직순(稷舜, 36세)은
고흥의 의병장이되어 보성, 영광의 의병장 안규홍과 손을 잡아
수많은 왜병을 섬멸하였으나 죽음을 당하였다.
김영엽(泳燁, 37세.
1869~1908 양간‧사온승) 전남 장흥군 관산면
을사‧정미 변란 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전남지역의 의병진에서 계책을 세웠다.
1907년 호남 창의 맹소를 세움에 기삼연, 김준 등 의병장과 합세하여
의병 50명(총 40정)과 더불어 장성 순창에 일어났다.
‧
1909년 남평 거성동 접전에서 나주, ‧능주 ,‧영암 세 곳에서
공격해오는 적과 싸워 70명을 사살.
‧ 1910년 전열을 정비하여 장성 백양사에 머물던 중
내부에 숨어든 첩자에 의해 살해 당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부인 수원 백씨는 3년 상을 마치고 공을 따라 자결하였다.
1985년 정부의 도움으로 의사의 묘지 정화사업이 진행되고
묘비를 제막하였다.
장성군민은 의사를 추모하여
장성군 남산공원에 의정비를 세워 추모하였고
대통령 표창 추서, 광주 표충사 배향
김익수(益洙, 38세)는
민종석 등 88인과 결의동맹을 맺고 400여 명의 의병으로 시작하여 부여,
사천에 이르는 동안 1천명의 의병으로 불어났다.
익산, 군산에서 왜병을 무찌르고 돌아오다가
논산에서 체포 되었다가 탈출하였다.
토벌작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사망하였다.
김용욱(容旭, 39세)은
의병을 창의 하여 불영사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평해, 영양, 봉화의 의병을 합하니 500명이 넘었다.
축지법을 쓰는 ‘노란장군’으로 통하였다.
이듬해 영덕의 의병장 신돌석부대와 합하니 그 수가 더욱 커졌다.
무기도 다량 갖추게되어 청송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안동, 영주 영양, 울진, 삼척, 강릉까지 적을 완전 소탕하였다.
경북 북부와 영동까지 왜적은 발도 못 붙이게 하였다.
태백산맥으로 본진을 옮겨 1921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사였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