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2세의 말년
성년이 된 리처드는 지적이며 민감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미술과 음악, 문학의 애호가였고 옹차림에 대해서는 세련되었으며, 섬세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교양인이었다. 하지만 왕으로서 그는 충동적이며 요령이 없는데다, 게으르면서 정치적 현실감각마저 부족했고, 사람과 상황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왕은 귀족들을 싫어하여 그를 멀리하였으며, 왕의 주변에는 그가 좋아하는 궁정인들과 관리들만 판을 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 인물은 상인의 아들로서 상서경이 되고 서퍼크 백이 된 마이크 들라 포울(de la Pole)과 시종장으로 임명된 무능한 궁정인 옥스퍼드 백 로버트 드 비어(de Verr)였다.
그러나 대영주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왕의 조언자라고 생각하여 리처드의 총신들을 혐오했고, 호주머니에 손수건을 꽂는것과 같은 왕의 행동을 '계집같은 짓' 이라 하여 비난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리처드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심한 악감정을 가졌다. 특히 그는 삼촌들의 통제에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대영주들이나 의회의 간섭을 질색하였다.
1386년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모두 상서경과 시종장의 해임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정은 의회에서 나오므로, 결국 리처드는 한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의회는 들라 포울을 부패와 대프랑승전에서의 문제를 들어 감옥에 가두었고, 11월에는 개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 위원회는 왕이 귀족들의 충언을 듣지 않을 경우, '최악의 경우' 를 각오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리처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1387년 서퍼크 백 들라 포울을 다시 불러들였고 미들렌즈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판사들로 하여금 개혁위원회는 불법이며 의회는 왕의 동의 없이 왕의 하인을 탄핵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케 하였다. 이에 글로스터 공, 워리크 백, 애런들 배의 지휘하에 영주들은 곧 군대를 일으켜 왕을 위협하면서 주요 고문들을 고발했으며, 이들을 심판할 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1388년 무자비한(Merciless) 의회, 혹은 경이로운(Wonderful) 의회로 불린 이 의회에서 5인의 귀족들은 왕의 총신인 드비어와 들라 포울을 고발하여 추방시켰고, 그 외에 리처드의 도당 대부분은 투옥되고 몇몇은 처형되었다.
이로써 글로스터 공과 그 동료들이 권력을 잡은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 또한 무능하기는 왕 못지 않았기에 점차 힘을 잃어갔으며, 1389년 22세가 된 리처드는 그의 보호자들을 해임하고 친정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약 9년간 타협하고 자제하면서 제법 무난하게 친정을 유지해 나갔다. 왕의 타협으로 인해 세금은 경감되었고 의회가 추방한 사람들은 불러들여지지 않았으며, 고발 귀족들은 자문회의에 머물러 있었으며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의 힘을 되찾았다. 또한 당시 인기있던 반교황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평온은 겉치레일 뿐이었다. 여러 권신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는듯 해 보였던 리처드는 사실 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으며, 조심스레 자신에게 충성하는 왕실 관리들의 핵심 세력을 만들어내고 온건한 영주들 사이에 하나의 당파를 구축했다. 마침내 힘을 기르 리처드는 1391년 왕의 대구너은 이전의 법에 제약되지 않는다는 선언을 상하 양원으로부터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여긴 리처드는 너무나 성급하게도 고발 귀족들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1394년 그는 왕비 보히미어의 앤(Ann of Bohemia)의 장례식에 여러 애런들이 늦게 도착한거을 트집 잡아 폭행을 일삼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1397년에는 글로스터, 워리크, 애런들을 체포하고 흰 사슴 문장을 단 그의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회를 열게 했다. 의회는 애런들을 처형했고, 글로스터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살해되었을 것이었다. 워리크는 무기징혁에 처해졌다.
또한 왕은 의회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는 불가침이며 왕의 대권에 반항하는 행위는 반역이라고 선언하게 했다. 리처드는 이로 인해 자신이 꿈꾼 권위를 손아귀에 가진듯 했다. 곤트의 존은 이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자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그드의 세력이 결집하게 만들었으며, 리처드의 지지율을 형편없이 만들었다. 본래 왕에게 우호적이었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었던 귀족들까지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기조가 폭발하게 될 쯤 리처드는 아일랜드 정벌에 나서 잉글랜드를 비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때 프랑스로 도망가 있던 해리퍼드 공 헨리가 리처드가 몰수한 자기 아버지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상륙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왕은 서둘러 귀환했으나 민심은 모조리 그를 등진 상태였다. 헨리는 리처드의 부재 동안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었고, 일반 대중들도 그에게 환호하였다. 리처드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체포되어 의회에 의해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전제와 실정을 이유로 드는 사람들 때문에 퇴위를 강요당했으며, 이제 랭커스터 공이 된 헨리를 스스로의 손에 의해 왕위에 추대하였다. 의회는 마침내 말 뿐이 아닌 실질적으로 '왕을 퇴위' 시킨 것이었다. 그 후 리처드를 복위시키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패로 끝났고, 리처드마저 감옥 안에서 비참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2)
14세기 잉글랜드의 시대상
14세기는, 13세기를 특징지은 팽창에 종지부를 찍고, 그 시대를 지배한 확신과 가치의 붕괴를 보여준 시기였다. 세기 초엽의 무질서와 혼란 끝에 왕이 퇴위를 강요당하고 마침내 살해당하는가 하면 세기의 첫 10년대부터 이미 인구가 감소하고 지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프랑스와의 긴 전쟁이 뒤따랐으며,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흑사병 마저 퍼져 인구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 다른 요인들 또한 구질서를 무너뜨리는데 작용했다. 경제적 침체와 부진한 직영지 경영은 장원제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곤경을 타개하고자 영주들이 펼친 농노제 강화의 노력은 농민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어는 중세 초기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무너뜨린 민족적 의식을 고양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젠틀먼 - 상인 - 법률가 등으로 구성된 부유하고 교육받은 새로운 속인 중산층이 물질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반성직주의 풍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14세기의 위기와 혼란으로부터 자본주의, 민족주의, 개인주의, 세속주의 등과 같은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제도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14세기의 마지막 사분기는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시기이자 또한 종교적 위기의 시기였다. 14세기 잉글랜드의 종교 세력은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강대했었다. 성직자의 수는 총 6만명에 가까워 인구의 약 2%에 달하였으며, 국내 토지의 약 3분의 1이 성직 지주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켄터베리와 요크에 있는 2명의 대주교 관할 아래 21명의 주교가 있었고, 다시 이들의 관할 아래 8,600명의 교구 사제가 있었다. 이들 세속 성직자들 이외에 크고 작은 많은 수도원에는 수많은 남녀 수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외형상 이처럼 강대한 잉글랜드 교회는 모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계 체제하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잉글랜드 교회의 무력하와 로마 교회에 의한 잉글랜드 교회의 지배와 착취를 초래했다. 당시의 로마 교회는 성직 매매와 복수성직제, 부재 주교, 고위 성직자의 탐욕과 오만, 교구 사제의 빈궁, 탁발 수도사의 타락, 종교재판소의 부정, 사면의 남용 등 갖가지 타락 현상에 시달렸다. 이 같은 교회의 추악한 모습은 이전 세기에도 없지 않았으나, 12세기와 13세기에는 시토 수도회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종교적 열정이 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는데, 14세기에는 이러한 종교적 열정마저 식어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영국인들에게 있어 프랑스인들의 앞잡이로 치부된 아비뇽의 교황들은 14세기 들어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간섭을 더욱 심화시켰다. 교황은 잉글랜드의 주교직, 성당 참사회원직, 교구 사제직에 대한 후보자를 지명할 권한을 고집했으며, 그래서 교황의 임명권에 맡겨진 성직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주교들이 교황에게 초수입세(annate)를 바치는 것이나 종교적 사건을 교황 법정에 상소하는 것 또한 부당한 관례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종교적 위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금기로 되어왔던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선구자느 바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였다. 위클리프는 요크셔의 중류 지주 가문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저명한 신학 교수이자 사상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과세와 교황권 문제에 관해서 반성직주의 견해의 지지자였던 그는 정부 업무에 고용되었으며, 특히 랭커스터 공 고트의 존에 애호르 받았다. 설교와 저술을 통해서 교회의 타락을 공격한 그는 반 성직주의 - 개신교적 이면서 세속적 - 에라스투스적인 신앙의 주창자로서 국민적 성격을 지닌 사상가가 되었다.
실상 위클리프의 사상은 독창적이지 못했으며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그 중 많은 부분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여하간 위클리프는 이단이라고 몰릴 위험성이 있는 몇가지 견해를 내놓았다.
① 먼저 주권의 이론, 즉 인간에 대한 모든 지배권 행사는 은총에 의존한다는, 다시 말해서 죄인은 권위나 재산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수 없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따라서 그는 성직자가 그의 재산을 잘못 사용할 경우, 세속 지배자가 그의 권한을 빼앗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② 두번째로 위클리프는 참다운 교회는 신의 은총에 의해 구원이 예정된 신자들의 공동체이지, 교직자들의 종교적 계서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교황과 추기경들의 권위는 베드로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정치 조직에서 연유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그들이 참다운 교회에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주교와 교구 사제 등 모든 성직자는 평등하며, 교황조차도 그가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이단으로서 심문의 대상이 되며 퇴위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③ 세번째로 그는 신의 의지는 불가해하고 무한하여 버림받은 자는 그 자신의 죄에 의해서 지옥의 고통이 예정되고, 선택받은 자는 그 자신의 공덕, 즉 소업에 따라 구원이 예정된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의식 - 고해 - 인덜젠스 - 성상 등에 의한 교회의 중개적 - 이적적 역할을 부인하고, 설교를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았으며 그리스도의 계시자이자 행동의 지침으로서 무엇보다도 ㅅ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렇듯 위클리프는 훗날에 제시되는 개신교의 교리 가운데 핵심인 '오직 믿음에 의한 의로워짐(justification by faith only)' 의 교리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교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같은 위클리프의 사상은 반성직주의 - 에라스투스주의적 사상과 합류함으로써 더욱 위험하게 되었다. 그는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를 주장했으며, 그에 의하면 교회의 재산과 보호권에 대한 궁극적인 최고권은 세속 정부가 가지고 있고, 따라서 왕정은 성직자의 임무를 종교적인 것에만 한정시키고 성직자의 재산을 몰수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1376년 위클리프는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하여 이단의 죄목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고트의 존에 보호와 런던 시민들의 지지 시위로 그를 재판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위클리프는 자신의 교리를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즉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바뀐다고 하는 교리를 부인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핵심에 대한 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영성체의 성사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한다는 믿음을 유지하면서도 화체설이 온전한 진실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너무나 급진적인 주장으로 인해 옥스퍼드의 신학자들은 그의 교리를 어긋나다고 규정했으며, 고트의 존 마저도 위클리프를 자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으며, 1382년 거물급 신학자들은 런던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 모여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가 대학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위클리프는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고 1384년 천수를 다하여 사망하였다.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반성직주의 풍조 속에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대중에게 널리 전파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중얼거리며 기도를 했는데, 이것을 비아냥거리는 뜻에서 '롤라드' 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어떤 체계적 조직도 갖추지 않은 채 가난한 설교자로서 거리에 나와, 정신적 지하운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유력한 교회인드르이 호사와 자만에 대하여 '청교도적' 비판을 가한 그는 덜 권위적이며 덜 기계적인 종교를 바라는 하급 성직자, 젠트리, 상인, 장인, 그리고 대학생 들 사이에서 동조자들 얻고 있었다.
롤라드에 대한 탄압은 정부 차원에서 시행되었고, 1401년 의회는 '이단자 화형에 관한 법' 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롤라드들은 미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살아남아 15세기 내내 지하에 잔존했고, 16세기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토양을 준비함로써 장차 튜더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 몇몇을 포함한 일단의 학자들은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잉글랜드의 민족주의
성서에 영어 번역은 사회의 한 단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4세기 이전 잉글랜드의 상층 사회는 세계 시민적인 사회였으며, 그 문화는 라틴적이거나 프랑스적인 것이었다. 미술과 건축은 대륙의 고딕 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교회인들은 그리스도교 세계 전역을 돌아다녔다. 충성과 용맹과 사랑을 중시한 기사의 윤리는 모든 나라의 지배 계층이 공유하였으며, 여러 나라의 기사들이 함께 이슬람교도와 싸웠다. 도시의 정치와 교역 또한 길드와 자치단체를 통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라틴어는 성직자들의 용어이자 학문 용어였고, 노르만의 정복 이후 프랑스어는 상류 지배층의 궁정 용어이자 법률 용어였으며, 영어는 농민들의 언어에 불과하였다. 영어 문학은 12세기와 13세기 라틴 고전이나 프랑스어 문학에 비하여 볼때 조악하고 얄팍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것이 14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민족성을 일깨우는 여러 힘의 작용이 활발해지고, 특히 백년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적인 문물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영국인들 사이에 영어, 잉글랜드 문학, 잉글랜드 미술, 잉글랜드적 사고방식 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14세기 후반의 50여년 사이에 상류 계층의 언어가 프랑스에서 영어로 바뀜에 따라 성직자들의 라틴어를 제외하고 영어가 모든 영국인들의 말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3세기 동안 무식한 하층민들이 영어를 단순화하고 번거로운 어미변화를 줄임으로서 영어가 우아한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특징과 더불어 놀라우리만큼 융통성 있는 언어로 성장한 결과였다.
이로 인해 법정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대체되기 시작하였고, 1363년 상서경은 처음으로 영어를 사용해 의회를 개원하였으며, 1385년에 이르면 잉글랜드의 모든 문법 학교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버리고 영어로 공부하게 되었다.
14세기 중엽 이후에도 라틴어는 여전히 교회 용어와 학문 용어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고 있었지만, 이제 영어로 쓰인 저작들이 등장했다. 옥스퍼드의 학자인 존 어브 트레비저는 역사와 과학에 대한 책을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했으며, 기적극들 또한 영어로 쓰였다. 15세기에는 월리엄 캑스턴의 인쇄술이 나타나고, 영어가 다시 교육받은 상류 계층의 용어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영어 방언이 있었는데, 점차 런던과 대학들이 있는 동부 미들랜즈의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
14세기 잉글랜드의 가장 중요한 저작자는 윌리엄 랭랜드, 존 가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이 세 사람이었다. 랭랜드는 작은 수도원의 가난한 성직자였으나 재주와 학식이 풍부했으며, 그의 많은 시는 신학자, 탁발 수도사, 부유한 고우 성직자들과 교회의 잘못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자,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담고 있었다. 부유했던 존 가워는 프랑스어와 라틴어와 영어로 된 시구를 명료하고 평이하게 섰다. 가워는 도덕론자였지만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농민반란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나타내었다.
런던의 부유한 포도주 상인에 아들로 태어난 초서는 귀족의 시동, 프랑스 전쟁에 참가한 병사,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 관세 징수인, 왕유림의 관리자, 치안판사, 의회 의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런 다양한 경력 덕분에 세상 일에 밝아지고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시종으로 근무하고 궁정의 귀부인과 결혼함으로써 궁중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그는 대학에 다닌 적은 없었으나 신학이나 법률상의 문제들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독서를 많이 하여 과학과 학문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습득했다. 이탈리아에도 다녀온 그는 이탈리아 문화의 생명력을 잉글랜드 문학의 핏줄 안에 융합시켰다.
그리하여 유머 감각, 도덕심, 서정, 풍자 등 여러 가지 기질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다양한 영국인 남녀들 사이에서 뚜렷한 동질성을 추출해 내는 능력을 보였다. 그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Troilus and Criseyde)』에서 젊은이의 영광과 비극을 기지와 연민의 정으로 그려내었으며, 최대의 걸작인 『켄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는 부유한 상인, 사냥하는 수도사, 음란한 법정소환인, 세속적인 탁발 수도사, 부유한 시골 지주, 가난한 학자, 그리고 희극적인 바스의 마누라 등 런던에서 켄터베리로 순례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대 잉글랜드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물의 이해, 넒은 동정심, 관용과 기지, 유머와 풍자, 시적 재능과 극적 감각, 탁월한 묘사력과 생생한 상상력 등에서 초서는 나중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찰스 디킨스의 작품으로 이어지는 영국적 전통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건물에 있어 14세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첫째는 13세기의 마지막 사분기와 14세기 전반기에 초기 잉글랜드 스타일의 건축, 즉 더욱 정교하고 사치스럽고 장식적인 고딕 건축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고딕 미술은 지나치게 정교하게 지나치게 장식적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인물들은 성자들이나 전사들이나 판에 박은 듯이 형식화되고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4세기 후반에 나타난 수직식 양식은 잉글랜드 특유의 미술과 성격을 좀더 뚜렷하게 표현했는데, 특히 건축에서 그 특징은 모남과 절충과 비논리성이었다. 사각형의 교회 성가대석, 교구 교회의 사각형 탑, 성당의 입구 등이 모두 모남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3세기와 14세기 그리스의 기하학적 방법을 근대적인 실험적 방법으로 변형한것은 옥스퍼드 철학자 그룹의 과학적 업적이었다. 그들은 귀납의 과정을 연역의 과정과 결부시켰다. 그로스테스트는 이런 과학작 탐구와 설명을 진전시킨 최초의 학자였으며, 그의 제자 중 가장 저명한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귀납과 연역의 이중적 방법을 빛의 연구, 특히 무지개의 연구에 있어 공헌하였다. 이 같은 과학적 방법에 주목한 윌러엄 오컴은 스콜라 철학의 근본에 대해 공격을 가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였다. 즉 붉음, 네모, 선함과 같은 개념은 특정한 붉은 대상, 네모난 대상, 선한 행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마음이 형성한 순전한 지적 구조물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우리가 실제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개별적 사물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라고 주장한 것이다.
*1) 개혁위원회에는 리처드가 가장 미워한 삼촌 글로스터 공 우드수톡의 토머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201